나는 출판일을 하고 있는 서른한 살 먹은 여자다. 지난 수년간 무수한 일들을 벌이고, 수습하고, 매진하고, 버리고 취하기를 반복하며, 다큐멘터리PD, 잡지기자, 방송작가, 대학강사, 출판기획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내왔다. ‘한결같은 방황’ 속에 지내온 시절이라고, 도대체 이 복잡한 시절은 언제쯤 끝나는가 라며, 나 자신에게, 때로는 세상에 화를 냈다가, 화해했다가 하며…. 그러던 어느날 건축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김진애 씨의 글을 만났다. “30대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잘 보낸 여자들이 비로소 매력적인 여성이 된다. 물론 그 팽팽한 긴장감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여자 30대는 흔들리는 게 아니라 중심을 찾아가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라는 즉, “너 잘 살고 있는 것이다”는 요지의 글이었더랬다. 갑자기 힘이 솟았다. 김진애,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그렇듯, 서른한 살 출판인 구모니카, 일을 벌인다.
늘 일관되게 불안한 채로 흐르는 내 마음,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은 지 올해로 31년 째. 그 의문을 쪼개고 또 쪼개고 쪼개 보니,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위인도 있었고, 타인도 있었고, 지인도 있었고, 가족과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유영하는 내가 있었다. 내 주변에 인간이 없었다면, 난 결코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김진애 박사를 만나고 난 후에, 그녀의 원고를 받아 든 후에, 긴긴 방황을 끝낼 답을 찾았다.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자”는 것! 그래서 <남녀열전 : 파트너일까, 라이벌일까?>, 바로 그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과 탐구”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만들게 된다.
구모니카 :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나와 같은 족속들, 흔들리는 자아를 가진 인간들에게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집중하기가 가장 힘들다. 그런데 김진애 박사님이 그간 하신 일들, 책이나 건축, 도시설계, 나아가 정치에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것은 “인간”에 대한 호기심 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본인의 의견은 어떤가?
김진애 :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정확히는, 사람을 흥미로워한다. 가까운 사람에게야 ‘좋다’, ‘아니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흥미롭다’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왜 그 사람은 그 사람일까, 궁금증이 많다. 무엇이 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걸까, 호기심이 난다. 더불어 결점이 없는 인간은 별로 재미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물론 없지만, 그 인물의 행적 중에 결점, 갈등이나 딜레마를 찾을 수 있다면 더욱 흥미로워진다. 인간은 흠이 있기에 인간이다. 그만큼 나는 인간의 한계, 인간의 모자람에 너그럽다고 할까?
나아가 나는 사람의 ‘매력’을 찾는 데 열중하는 편이다. 뭔가 좋은 점, 뭔가 긍정적인 점, 뭔가 잠재력이 없을 리 없지 하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 사람만의 특징, 그 사람만의 매력을 정의하고 나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만큼 나는 사람에 대해서 긍정적인 셈이다. 또한, 나는 그 사람이 한, 또는 하고 있는 ‘일’에 주목한다. ‘실적’을 중시한다고 할까? 더 정확히는 ‘쓸모’를 찾는다고 할까? 그 사람의 심리나 개인적 면모보다는 왜 그 사람은 그 일을 할까, 어떻게 그 일을 할까, 왜 그 역할을 할까, 왜 그러한 선택을 할까 등에 관심이 많다. 말하자면 나는 ‘사적 인간’ 보다 ‘공적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내가 존재하는, 내가 일을 하는 저력이자 이유이자 목적이다.
구모니카 : 인간에 대해 무한한 애정과 관심이 부럽다. 그 중에서도 말씀하신 “매력”과 “쓸모”라는 기준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다. 설명 해달라.
김진애 : 우리들 모두는 나름의 인물 평가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매력”과 “쓸모”는 나의 개인적인 인물 평가 기준일 뿐이다. 각론에 들어가면 아주 복잡하겠지만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 만나보고 싶은가?
둘, 일을 맡겨 보고 싶은가?
쉽게 얘기하면 “매력”과 “쓸모”다. 만나보고 싶으면 여하튼 매력적인 인물일 것임에 틀림없다. 일을 맡겨 보고 싶다면 여하튼 쓸모 있는 인물일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매력의 종류도 가지가지이고 쓸모의 종류도 가지가지이므로 그리 간단치는 않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머릿속에 떠올리기조차 싫은 인물도 있잖은가. 그 이름을 입에 담기조차 싫은 인물도 있잖은가. 같이 일할 상대로 전혀 떠오르지 않는 사람도 있잖은가. 하물며 그 존재 자체에 전혀 관심이 가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고민한다. 나는 매력 있는 존재인가? 나는 쓸모 있는 존재인가? 바라기야 이 두 가지를 다 가지면 좋겠지만, 그 중 하나만이라도 있다면 적어도 무관심의 대상은 되지 않을 것이다. 좋아하는 대상이 된다면 최고이겠고,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된다면 더 말할 것 없이 좋다.(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양면성이 있으므로 여기서 제외하자.)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차라리 괜찮은 편에 속할지도 모르겠다.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끔찍한 일이고, 더 나아가 무관심의 대상이라면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매력”과 “쓸모”를 가진 인물이라 평가되는 것만큼 보람찬 인생이 또 있을까?
구모니카 : <남녀열전 : 파트너일까, 라이벌일까?>에는 총 46인의 인물이 나온다. 인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야 박사님의 개인적인 기질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인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광범위한 정보가 놀랍다. 평소 인물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얻고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는가?
김진애 :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은, 이번 책을 쓰면서 각 인물의 모든 면면을 다룬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인물 평전적 시각에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필자의 ‘주제 제기’ 시각에 따라 각 인물의 특정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음을 집고 넘어가고 싶다. 모든 인물에 대하여 인터뷰를 할 수 있는 대상도 만나 볼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으므로…. 다만, 흥미를 끄는 인물들에 대해서 나는 평소 귀를 열어 두고 인터넷 서핑도 꽤 한다. 새로운 사건과 뉴스가 등장할 때마다 나의 인물 파일에 그들이 만든 새로운 사건을 추가하며 생각을 정리하곤 한다.
나는 평소에 관심이 가는 인물들이 행한 작업들을 부지런히 찾아보는 편이다. 예술인, 문화인, 지식인인 경우에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들의 작업 자체가 그들을 알기에 가장 귀중한 자료다. 저작, 영화, 기록영화, 그림이나 사진과 같은 예술작품 등, 그들의 작업은 그들을 말해 준다. 사람은 확실히 작업으로 말한다. 정치인, 언론인 등 공인의 경우에는 당연히 그들의 정치 행적, 정책 행적, 현장 행적이 그들을 말한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면 뭘 하나. 아무리 수사(修辭)가 좋으면 뭘 하나. 결국 그들이 어떻게 시대를 읽었는가, 어떤 과제를 설정했는가, 중요한 시점에 어떤 선택을 했는가가 그들의 인물됨을 나타낸다. 설혹 그들이 현실 정치에서 실패했더라도 그들의 이념과 철학에 귀 기울일 필요는 충분하다.
내가 ‘운명적 행동인’이라 정의하는 인물들, 즉 특별히 뛰어나거나 모라자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수수께끼 같은 운명의 장난에 걸려들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인물들, 예컨대 오스왈드나 마타하리, 전혜린이나 미시마 유키오 같은 인물들에 대해서 나는 각별하게 연민을 느낀다. 이런 인물들을 볼 때는 그 시대, 그 공간에 전개되었던 여러 정황에 대한 관심도 함께 작동하게 마련이다. 운명의 장난을 인정한다면 인간은 훨씬 더 겸허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관심이 가는 인물의 행적을 통해서 시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나의 일상이다.
구모니카 : 하필이면 왜 남자와 여자를 매치했는가? 이런 작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김진애 : 나는 이 전에 <남자 당신은 흥미롭다>, <여자 우리는 쿨하다>라는 두 권의 책을 동시에 낸 적이 있다. 방송과 잡지 등을 통해서도 이래저래 5년 여 동안 남녀 주제를 다루어 왔다. 그동안 여러 질문을 받았다. 왜 남녀냐? 남녀의 차이를 보려는 것이냐, 남녀의 공통점을 보려는 것이냐? 남녀의 관계를 보려는 것이냐? 남녀 역학, 남녀 사회학, 남녀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냐? 나 자신이 확신할 수 있는 명쾌한 답이라면, ‘흥미’다. 남녀라는 주제 자체가 흥미롭다. 또한 남녀가 시사하는 모든 이슈들이 흥미롭다. 차이도 흥미롭고 공통점도 흥미롭고 남녀 관계도 흥미롭고 남녀 역학도 흥미롭고 남녀 정치학도 흥미롭다. 그런 흥미는 나의 삶을 흥미롭게 해주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도, 나는 변화하는 이 시대에 남자 여자는 서로에게 이성으로서의 상대 이상으로 인간으로서의 상대, 인물로서의 상대 성에게 각별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남녀가 어깨를 맞대고 자웅을 겨루는 시대다. 상대에 대한 담담한 응시와 창조적인 상상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남녀를 대비해 보는 것은 충분히 유효한 발상이다.
그러니 <남녀열전>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 내가 자라오는 과정에서 내가 바라볼, 추구할, 지양할, 지향할, 참조할, 이끌리는 어떤 인물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쌓여 드디어 글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좋겠다. 나는 역할 모델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성장에는 특정한 역할 모델보다는 수많은 인물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실제 지향할 사표적인 인물에서 얻는 것만큼이나 지양할 반면교사적인 인물에서 얻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많은 인물들에 자신을 비출수록 자신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은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위인전’ 이상으로 ‘인물전’이 필요한 것 아닐까.
그만큼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괜찮은 인물들이 많은가를 알면 살맛이 더해진다. 또한 인류의 역사 속에 얼마나 괜찮은 인물들이 많은가를 알면 인간에 대한 신뢰도 더해진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알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도 피어오른다. 물론, 우리는 그 인물들처럼 될 수도 없거니와 꼭 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전혀 되고 싶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인물들의 가치에 우리가 눈을 뜬다면, 이 흥미롭고 즐겁고 끌리는 인물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 삶은 그리 무료하지도 그리 지루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사람과 사람이 기를 통하는 것은 가장 흥미로운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