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켰을 때 안채 대청에는 모든 것이 놀랄 만큼 제자리에 있었다. 늘 어머니가 앉곤 하시던 색 바랜 우단 의자가 쇠 난로를 향해 있고 그 앞에는 볼품없는 다리를 가진 느티나무 탁자가, 그 위에는 바느질 바구니와 성격책이, 지게문 옆의 쇠못에는 묘자 아주머니가 젖은 손을 닦고 걸어둔 수건이 그대로 있었다. 안당은 그동안 시간을 가두어둔 것처럼 그토록 태연했다.---p.8
“할머니는 이제 돌아오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죽음은 문과 같지. 할머니는 그 문을 통과해 하느님 곁으로 가신 거란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채 방에 데려다주고는 바쁜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 문 밖으로 서둘러 나갔다. 나는 혼자 방 안에 남았다. 나에게 시간은 직선으로 지나가는 게 아니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자전거 체인 모양이었다. 나는 끝이 없는 세상으로 가보았다.---p.33
이제 내 편지를 귀하의 나무상자에 보관해주기로 한 우리의 계약은 성립되었습니다. 이 일이 당신에 그다지 피해가 되지 않는 한 쓸데없는 의혹은 갖지 말아요. 나에게는 성장의 기억을 송두리째 맡기는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요.---p.80
그날 밤 이후 이틀이 지나도록 율이 삼촌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밤새 고열이 나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낮이 되면 우두커니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방 안으로 들인 미음과 간장 종지가 그대로 놓인 소반을 거둬갈 때마다 묘자 아주머니의 표정이 어두웠다. 어머니는 수예점에서 새로 주문해온 병풍 자수 감으로 안당의 명주 발 안에서 밤늦게까지 십자수를 놓았다. 어머니는 가끔 수틀로 얼굴을 가리고는 모래언덕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p.174
“무엇을 망설이는 거요? 무슨 이유요? 당신을 기다리게 한 그 긴 세월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보시오. 어떤 이유도 이 마음을 대체할 수가 없을 거요. 이 세상에서 사랑을 필적할 핑계거리를 찾기는 더욱 어려울 거요. 한 사람의 생을 구하는 일이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 하지 않소? 지금 당신이 구해야 할 한 마리의 병든 새가 앞에 있소!”
『비밀 정원』은 좀 특이한 소설이다. 개인의 인생을 죽 적어나간 낡은 일기장을 보는 것 같으면서 어느 시대에선가 멈춰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를테면 ‘요즈음도 이렇게 소설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할 정도로 묘한 ‘빈티지’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묘한 즐거움을 가지고 읽었다. - 황석영(소설가)
그들의 세상을 나의 비밀스런 정원으로 만들어가는 어렵고 먼, 에둘러 가는 길,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같은 흔들림, 먼 데서 빛나는 등불 같은 순간들, 세부가 빛난다. - 성석제(소설가)
긴 칼에 찔린 듯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작가의 의중에 남았을 숨겨진 세계로 조금이라도 더 끌려들어갔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비밀 정원』의 작품세계가 두렵다. - 이병천(소설가)
소설을 읽다가 어느 사이 문장에 빠져들며 위로를 받았다. 세상이 하도 참담해 익숙하고 깊숙한 포용이 필요한 때였다. 어쩔 수 없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채로 품고 굳건하고 우아하게 노관을 지킨 엄마의 슬픈 숨결이 다채로운 수법과 정갈한 언어로 펼쳐진다. - 전경린(소설가)
오랫동안 이런 이야기를 기다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련하고 낮은 목소리의 소설, 순수했던 한 시절로 되돌아가게 하는 소설. 『비밀 정원』은 흘러간 시대의 이야기이지만 지금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무뎌진 감각을 일깨우는 새로운 이야기이다. 하성란(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