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는 마음속 어느 지점에서는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젊은 시절의 지적인 훈련과 야망들이, 심드렁했던 약물남용과 나태함, 그리고 실망감 때문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는 것, 나에게는 목적도 방향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삼십 대 때보다 훨씬 적게 생각한다는 것, 나 스스로 빠른 속도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_32쪽, 《쇠락과 몰락》
어쩌면 고대 유적에서 배우는 가장 간단한 교훈은, 뭐든 수직으로 세운 것은, 그게 도리아식이든, 이오니아식이든, 코린트식이든 상관없이, 훗날 경외의 대상이 된다는 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수평적인 것들이 주는 매혹에 저항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바로 그 때문에 하늘이나 바다의 수평선을 배경으로 선 고대 수직 기둥들에 더 큰 경외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 배경의 관점, 그러니까 바다나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렙티스는 폐허의 초기 단계에 불과할지 모른다. 언젠가는 남은 유적들이 모두 사라져 사막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수평선을 방해하는 수직 기둥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것이 시간에 대한 공간의 최후의 승리일 것이다. _72~73쪽, 《렙티스 마그나》
나처럼 살다 보면, 그러니까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며 이 도시 저 도시에서 살다 보면 열아홉, 스무 살 시절 대학에서 배웠던 것들을 조금씩 까먹어가며 살아갈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새 친구들을 만드는 일이 낯설지 않다. 이런 삶이 가져다주는 것들 중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_91쪽, 《수평선상의 이동》
마침 밖에서 누군가가 화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화장실을 얼마나 오래 쓰는 거냐고,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 나는 젖은 바지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새 바지를 벗었다가 뒤집어서 다시 입는 일은 대단히 위험 요소가 많아 보였다. 안팎이 바뀌기는 했지만 어쨌든 입기는 했고, 나한테는 그 점이 중요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