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줄곧 잡지사와 출판사에서 취재, 기획, 번역 등 글을 짓는 일을 했다. 여행하고 사진 찍는 일을 일상의 즐겨찾기에 넣어 두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래디컬」, 「닉 부이치치의 허그」, 「성경에서 만난 내 인생의 멘토」, 「믿음 연습」 (이상 두란노) , 「하나님은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포이에마) , 「기도」 (청림출판) ,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생명의말씀사) 등이 있다.
왜 정의를 말하려 하는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기독교와 급속하게 멀어졌다. 이른바 ‘세상 친구’들은 시민권 운동을 옹호하고 지원하는 반면, 소위 골수 크리스천들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사회를 위협한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나는 이 기이한 현상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고 회의가 들었다. “어째서 신앙이 없는 이들은 인간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정의를 추구하는데 반해, 가까이 지내는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을 찾기가 힘든 걸까?” 돌파구는 어느 경건한 크리스천 그룹을 알게 되면서 열렸다. 사회의 전 영역에서 신앙과 정의를 통합하려고 애쓰는, 작지만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진보적인 사회정의 이론을 받아들여서 기존에 가진 신학적 기반 위에 덧붙이기에 급급했다. 성경이 정의의 토대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야말 로 깜깜했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역사가 서구 사회가 말하는 인권 개념의 뿌리이며 예언서들 또한 일관되게 공의를 부르짖고 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목회자가 될 준비를 하려고 들어간 신학교에서는 엘워드 엘리스(Elward Ellis)라는 흑인 학생을 만났다. 나중에 나와 결혼한 캐시 크리스티(Kathy Kristy)와 더불어 우리 셋은 아주 가까이 지냈다. 엘리스는 미국 문화 밑바닥에 깔린 불의의 실체에 관해 점잖지만 서슬 퍼런 지적을 하곤 했다. 언젠가는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 비수를 날렸다. “이봐, 그러니 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야! 그럴 뜻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겠지만 엄연한 사실이야. 넌 어쩔 수 없는 인종차별주의자야!”
(중략) 버지니아 시골 교회와 뉴욕이라는 거대 도시의 교회는 달라도 이만저만 다른 게 아니었다. 반면에 놀라우리만치 똑같은 점이 있었다. 하나님이 공의로 심판하시지 않고 은혜로 값없이 구원하셨다는 고전적인 복음을 선포했을 때, 어느 쪽 교회가 됐든지 그 메시지에 깊이 감격한 성도일수록 이웃과 사회에서 부당한 대접을 받는 이들에게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일과 공의를 추구하며 가난한 이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단단히 연결되어 있 었다. 호프웰 교회에 출석하던 이슬리 셸턴(Easley Shelton)이란 교인만 하더라도 엄청난 변화를 보였다. 그는 도덕적인 행실에 기반을 둔 삭막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던 이였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낌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있다는 진리를 차츰 깨달았다. 그때부터 얼마나 사람이 변했는지, 따뜻하고 유쾌하며 자신만만해진 그의 변화를 누구든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파격적인 변화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셸턴은 말했다. “돌아보니 평생 인종 편견을 가지고 살았더라고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단 한 번도 그 주제로는 설교한 적이 없었으므로 셸턴은 혼자서 그런 결론을 유추한 게 분명했다. 바리새인 같은 영적 독선에서 벗어나는 순간 인종 편견을 버리게 된 것이다. 하버드대학의 일레인 스캐리(Elaine Scarry) 교수는 「아름다움과 바름에 관하여」(On Beauty and Being Just)라는 멋진 책자를 펴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자기중심적인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 열린 마음으로 정의를 좇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 동안 목회 현장에서 그런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이들은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정의를 추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