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은 금지된 문을 열 것인가?
죽은 자의 제국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초대장
런던 대학 의학부 대강의실, 의학도 존 H. 왓슨은 졸업을 앞둔 오늘에야 처음으로 ‘죽은 자 소생’ 실습을 하게 된다. 차가운 강당의 해부대 위에 올려 둔 시체에 가짜 영혼이 주입되고 “일어서!”라는 인간의 명령에 시체는 죽은 자 특유의 어색한 걸음을 뗀다. 그 시체는 지치지 않고 달리는 마부, 두려움을 모르고 갱도를 파헤치는 광부, 포탄을 피하지 않는 군인 등 유용한 자산이 되어 제2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사회를 위하여 말없이 봉사할 것이다. 19세기 말엽, 인류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개발한 죽은 자 소생 기술을 발전시켜 노동과 군수 분야에 활용 가능한 ‘크리처’라고 불리는 생물을 제조했다. 아니, 그들은 엄밀히 생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불어넣은 생명은 가짜 생명이기 때문이다.
왓슨이 처음 ‘죽은 자 소생’을 본 날, 마침 강의실에 객원 교수로 방문한 반 헬싱 박사는 그에게 국가를 위해서 봉사할 기회를 제의하고, 그날을 계기로 평범한 학생이었던 왓슨은 군의관이라는 위장 신분을 부여받고 첩보원으로 파견되어 전 세계를 무대로 믿을 수 없는 모험을 겪게 된다. 봄베이의 성곽 지하에서 들려오는 낮은 신음 소리, 아프가니스탄 오지 계곡에 감추어진 신성 모독적인 음률, 일본 화학 공장의 불 꺼진 복도 너머로 풍기는 피비린내…… 그 모든 모험의 이유는 오직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죽은 자의 제국’과 그 제국을 이끄는 수수께끼의 수장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편의를 위해 생산한 산업의 비품인 죽은 자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만의 제국을 이루고자 한다면? 왓슨의 모험이 밝혀낼 치명적인 진실은, 과연 밝혀져도 되는 것이었을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 있는 듯 움직이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으며, 한때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상품으로 취급받는 ‘죽은 자’라는 가상의 존재를 통해 이 작품은 의식과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철저하게 탐구한다. 속도감 넘치는 첩보전과 모험담 끝에 기다리고 있는 예기치 못할 정도로 거대한 사유는, 언어에 대한 천착으로 유명한 엔조 도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SF계를 압도했던 이토 게이카쿠가 만들어 낸 단 한 차례뿐인 환상의 이중주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풍경이면서도, 또한 그 존재를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풍경일 것이다.
영혼의 무게 21그램, 우리의 생명이란 환상에 불과하다면?
뇌리를 자극하는 사변 실험과 짜릿한 엔터테인먼트의 이종교배
『죽은 자의 제국』을 더욱 특별하게 하는 점은 바로 이 작품이 ‘본격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는 명제 아래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담은 메시지의 무게와 달리 실제 작품 자체는 각종 장르 문법의 사용과 빠른 장면 전환, 문화적 코드의 변용 등을 통해 매우 가볍게 읽어 내릴 수 있다. 대개의 스팀펑크 작품에서 그러하듯 대체 역사에 기반한 이 작품에서도 과거 사건과 인물과 원전과 이론이 등장하여, 원래 의미와 다른 의미를 부여받아 사용된다. ‘셜록 홈스 시리즈’의 존 왓슨, 『로빈슨 크루소』의 프라이데이, 『미래의 이브』의 아달리, 『해저 2만 리』의 노틸러스 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문화적 코드를 생경한 장소에 등장시키며 일으키는 화학작용 또한 이 소설의 읽는 쾌감을 더해 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죽은 자’란 사후, 영혼이 빠져 나간 시신의 뇌에 네크로웨어라 불리는 가짜 영혼을 인스톨시켜 주요 노동력으로 쓰이는 존재를 뜻한다. 엔조 도는 특설 사이트에 게재한 글에서 이러한 비약적인 설정과 생전 이토가 ‘좁은 의미의 SF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던 점을 들어 이 소설을 엔터테인먼트 작품으로 구상했다고 밝혔다. 인간 의식의 실체와 언어의 기원, 생명의 정의 등 깊은 철학적 명제들을 소화하고 있으면서도 작품은 시종일관 통쾌한 정통 활극과 독특한 위트, 스피디한 진행을 유지한다.
런던탑 화이트타워를 반파하는 스케일 큰 액션 장면 바로 뒤에 바벨 이전의 언어에 대한 상상이 등장하고 세상을 파괴할 만한 생물 병기의 이면에 신체가 없는 의식에 대한 단상이 등장하는 기상천외한 작품, 이 책을 펼친 독자들은 지금까지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전대미문의 엔터테인먼트를 즐기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