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는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죽음은 어떤 형태로든 보상받을 수 없다고 말할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조화가 가능하다는 생각 자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세상만사가 모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는 신념은 이 세상의 조화와 질서를 옹호하는 논리와 맞물려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영원 전에 예정하셨고 또 실제로 모든 일을 그렇게 정하신 대로 이끌어나간다면, 이 세상의 일들은 결국은 조화롭게 정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말 이 세상 모든 일이 조화롭게 정돈되어 있기만 하던가? 오히려 혼돈과 무질서 가운데 있는 일들이 더 많지 않던가?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중에서
고통 앞에서 기독교인은 재빠르게 신정론의 정답을 제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을 신앙의 변증가로 생각하곤 한다. 그들은 침묵하는 신을 대신해 소위 무신론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고소당한 신을 구해낼 변론을 찾는다. 하지만 신의 전능과 예정을 앞세워 우리 시대의 아픔과 통곡을 간단하게 처리하려는 모든 형이상학적 시도들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려는 인간적 욕망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과 세상을 구원해야 할 신을 인간 자신이 변호해줘야 하다니, 애초에 신정론은 궁색한 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구원의 주체를 구원의 대상이 구해주다니, 실로 엄청난 주객전도가 아닌가?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기보다 오히려 침묵과 공감, 경청의 시간을 허용해야 한다. 침묵이 하나님의 위로와 답변을 기다리는 시간이라면, 공감은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실제로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슬피 우는 자 앞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하는 존재이자 그처럼 아파할 수 있는 인간임을 자각하고, 주객의 구분 없이 모두 하나가 되는 거대한 존재의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나아가 우리 자신의 고통이 되는 사건, 그 속에서 고통당하는 자는 홀로 남겨지거나 버려지는 더 지독한 고통에서 해방되어 우리라는 삶의 공간으로 나올 수 있다. 해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에 함께 머물러 있어주는 일, 함께 울어주는 일, 함께 아파하는 일, 그것이 해답 없는 물음에 대한 우리의 유일한 응답이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며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기독교인이 줄 수 있는 최고의 대답이다.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중에서
차가운 바닷속으로 침몰해버린 세월호 안에서 신음하고 부르짖는 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회상하고자 하는 신학은 저들을 삼켜버린 세상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의 모든 현실을 문제시하며 비판할 수밖에 없다. 현실에 대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신학은 세월호와 함께 이미 침몰해버렸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신학은 더 이상 현실성 없는 교리들의 반복이나 사변철학적인 추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제 신학은 가장 현실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삶의 현실과 관련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의 전능은 이제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새롭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이제 우리는 가장 심도 있게 생각해야 하는 주제에 도달했다. 과연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_8장. “세월호 참사 이후 신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중에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 저편에서 세상사를 관망하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세계 한복판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다. 더욱이 오늘날의 신학은 하나님이 억압자가 아니라 억압당하는 자의 편이시며, 가해자가 아니라 희생자의 편이심을 고백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희생당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지금도 이 뒤틀린 오욕의 역사를 해방의 역사, 화해의 역사, 생명의 역사로 돌려놓으신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지 않는다면, 도대체 고통과 절망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겠는가?
---「고난이 묻고 신앙이 답하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