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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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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 EPU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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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5년 0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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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13 9788958663003

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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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소음 때문에 K는 잠에서 깼다. 강제로 깨어난 불쾌감 때문에 K는 어리둥절하였다. 잠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K는 자신을 깨운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자명종 소리였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르릉─
자명종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울부짖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르릉─
K는 투덜거리며 머리맡 탁자 위에 놓인 자명종의 버튼을 눌렀다.
비명 소리는 멎었다.
K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상태였다. 자명종의 버튼을 눌러 끈 K는 필름을 영사기에 걸어 스크린에 투영하는 영사기사처럼 끊긴 잠의 필름을 의식적인 접착제로 강제로 이어 붙인 후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순간 K는 의식이 명료해졌다.
자명종이 울렸다면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K는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떠 시계의 숫자판을 쳐다보았다.
정각 7시였다.
7시라면.---pp.17~18

“이 핸드폰을 어디서 발견했습니까. 술에 취해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아서요.”
“극장입니다.”
‘을’이 대답하였다.
“어젯밤에는 휴일 전날이라 시간이 있어서 늦은 식사를 하고 심야극장을 갔었지요. 영화를 보는 도중 앞좌석 포켓 속에서 핸드폰을 발견했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주인이 찾으러 오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끝나고 나서도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극장 측에 맡겨 두고 올까 하다가 내가 보관하고 있었던 겁니다.”
“극장이라면 어느 극장을 말하는 건가요.”
“바로 이 건물 3층에 있지요. 가만 있자.”
‘을’은 주섬주섬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아, 여기 있군. 어젯밤에 보았던 영화의 입장권입니다.”
“내게 주시겠습니까.”
“가지려면 가지세요. 내겐 소용없는 물건이니까.”---p.101

오늘 아침 일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K는 수많은 낯익은 인물과 낯익은 존재와 만나고 헤어졌다. 낯이 익은 자명종 소리와 낯익은 침대, 낯익은 K의 방, 낯익은 아내와 낯익은 딸, 낯익은 강아지, 낯익은 처제의 얼굴과 낯익은 장모의 모습. 그와 반대로 낯선 벌거숭이의 몸, 낯선 성냥갑, 낯선 게이바와 낯선 결혼식, 낯선 장인의 등장과 휴대폰을 주운 낯선 ‘을’과의 만남, 낯선 여인의 넓적다리와 낯선 〈눈먼 자들의 도시〉의 영화 내용, 낯선 C열 45번,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는 아내의 얼굴과 닮은 동영상 속 낯선 여인의 얼굴.
K는 자신이 온종일 겪은 낯익은 사물과의 익숙함과 낯선 사물과의 이질감 사이에서 방황을 하고 갈팡질팡하는 인식이 자신을 불안케 하는 근본적인 원인임을 깨달았다. 어젯밤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pp.121∼122

H는 K의 친구가 아니다. H는 친구 역할을 하고 있는 대리인일 뿐이다. 대리모代理母가 불임 부부의 부탁을 받고 낯선 남자의 정액을 자신의 자궁 속에 흘려 넣은 후 아이를 낳고 보상을 받는 것처럼 K가 만나는 모든 인물들은 대리모처럼 고용된 사람들이다. 그 사생아는 출생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열 달 동안 품은 대리모의 존재 역시 모를 것이다. 실제 엄마가 아닌 대리모를 고용한 사람을 엄마라고 부를 것이다. 대리모를 통해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자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열매가 아니고 차가운 금전적 거래의 산물이다. 자식은 어미와 아비를 가졌으나 실은 고아인 것이다.
K는 고아이며, 독자獨子다. K는 사생아다. 창조주보다 더 교활한 이 거대한 무대의 연출자는 K를 지켜보며, 훔쳐보며, 낄낄거리고, 웃고, 박수를 친다. 대리 아내와 대리 딸, 대리 강아지, 대리 H, 대리 ‘을’, 대리 장인은 그 연출자에게 고용되었으며, 이 연극에 출연하기 전부터 철저한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순은 존재한다. 진실처럼 보이는 진리가 진리가 아니고 궤변이듯, 이 가상의 연극 무대 위에서 실수로 놓친 모순들이 조금씩 조금씩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pp.123∼124

“내가 내 안에 들어 있는 여성성을 발견한 것은 40대 중반 이후였네. 어느 날 낯선 골목을 지나다가 빨랫줄에 걸린 여자의 속옷을 보고 그것을 훔쳤지. 그리고 한번 입어보았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어. 일찍이 그리스의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말하였다네. 태초에 남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이며 여자인 세 가지 성性이 있었다고. 남자는 해이며, 여자는 땅, 남자이며 여자는 달이었지. 남자이자 여자인 제3의 인간은 점점 교만해져서 제우스의 눈에 거슬릴 정도가 되었어. 그러자 제우스는 제3의 인간을 둘로 갈라놓았고 그렇게 둘로 떨어진 인간은 서로 반쪽을 찾아 방황하게 되었네. 남자이자 여자인 제3의 인물이야 말로 인간의 원형이며, 미래에 있어서도 가장 진화된 호모루덴스라고 할 수 있지. 남자이자 여자인 제3의 인간이 늘어난다면 성범죄나 성차별, 사회적 부조리 등은 ?동적으로 해결될 걸세. 그리고 가정은 보다 자유롭고 일종의 성의 해방구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게. 나는 양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자는 더더욱 아니네. 어디까지나 여장에서만 성적인 흥분을 느끼고 여장을 할 때만 변신하는 것뿐이야. 이것은 오로지 심리적 안정 때문이지. 우리를 동성애자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을 느낀다네. 나는 얼마든지 남편이 아내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고, 여자가 남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성은 얼마든지 공산共産화할 수 있으며, 가정은 소유욕이나 질투심이 없는 지상의 낙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네.”---pp.206∼207

JS는 K의 발에 입을 대었다. JS는 익사 직전의 사람을 물 밖으로 끌어내 인공호흡을 하는 구조대원처럼 보였다. JS는 더러운 K의 발목을 자신의 입으로 빨기 시작하였다. 진공청소기의 흡입력처럼 K의 발목에 흡착된 입의 에너지는 강력하였다. K는 당황하였다. 즉각적이고 저돌적인 JS의 접문接吻에 당황한 K는 몸을 빼기 위해서 주춤거렸다. 이러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JS가 억압하듯 말하였다.
“독소를 빼내지 않으면 광견병에 걸릴지도 몰라. 그대로 있어.”
그러한 행위가 K에게 득이 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이며 아직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는 ‘ 지난번의 그 미안함 ’을 상쇄할 수 있는 보상 행위인 듯 JS는 헌신적인 자세로 K의 상처 부위를 빨았다. JS의 입술은 공격해야 할 상처 부위에 밀착되었다. 혀는 그 상처 부위를 집요하게 핥고 있었다. 그 행위에 열중하고 있어서 JS의 엉덩이가 K의 휴대폰에 저장된 포르노의 영상처럼 클로즈업되었다.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누이의 포즈가 마치 펠라치오의 오랄섹스 체위처럼 보였다.---p.235

생명의 나무.
세일러문으로 변신한 소녀가 지키려는 지구를 살리는 유일한 생명의 나무.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창조신이 만든 선악과가 아닐까.
성경에는 창조신이 자신이 만든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돌보게 한 후,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마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가 아담에게 열매를 따줌으로써 원죄原罪가 생겨났으며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파라다이스에서 추방당한다.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창조신의 말대로 인간은 먼지로 돌아가게 된다. 생명의 나무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 살리려는 지구 위에서 죽어가는 생명의 나무. 그것은 창조신이 만든 그 생명의 나무가 아닐까.
“생명의 나무를 살리는 세일러문의 노래를 불러드릴깜.”
세일러문은 마법의 봉으로 K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하였다. K가 그래 달라고 응낙도 하지 않았는데, 세일러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p.266

“우연은 어차피 있는 법이니까.”
레인저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자, 다시 가위, 바위, 보.”
K2는 이번에도 가위를 냈다. 레인저 역시 가위였다. 레인저가 악몽에서 깨어나려는 듯 신음 소리를 냈다.
“속도를 올리기로 하지. 가위, 바위, 보.”
K2는 주먹을 냈다. 레인저도 주먹이었다.
“삼세번은 있을 수 있어. 젠장 할, 닥치는 대로 해보자고. 자, 시작해 이 새끼야. 가위, 바위, 보.”
K2는 가위를 냈다. 레인저도 가위를 냈다. 다시 보를 냈다. 레인저도 보를 냈다. 생각할 겨를도 없는 무차별의 내기였다. K2가 주먹을 내면 레인저도 주먹을 냈다. 어김도 없고, 착오도 없었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는 내기였다. 어차피 승자도 패자도 없는 게임이었으므로.
파이가 소수점 아래 어느 자리에서도 끝나지 않고 3.14159265358979…… 무한하게 계속되는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무한급수이자 초월수다. 최근에 슈퍼컴퓨터를 4백 시간 가동시켜 파이의 값을 1조 2천 4백억 자리까지 계산해도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두 사람은 가르려야 가를 수 없는 이위일체二位一體인 것이다. 그제야 레인저는 가위바위보로는 K2에게 이길 수도 질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손바닥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pp.332∼333

“나쁜 새끼, 더러운 새끼, 너 같은 놈은 맞아 죽어도 싸. 잘못했지, 잘못했지, 잘못했지, 이 새끼야. 대답을 해. 잘못했지, 잘못했지.”
아내의 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잘못했지, 라는 말은 대답을 기다리는 질문이 아니라 비등점을 향해 끓어오르는 아내의 교성임을 K는 느꼈다. K 또한 한낮부터 끓어오르던 용암이 드디어 분출할 만한 엷은 지층을 발견한 것처럼 그곳을 향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잘못했지, 잘못했지. 아아, 잘못했지.”
“잘. 못. 했. 어.”
K의 몸에 들어 있던 긴장된 총탄이 마침내 방아쇠에 의해 발사되었다. K의 아내 역시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일부러 줄을 끊어버린 겿처럼 알 수 없는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물물교환은 성공리에 끝났으며 K와 레인저의 아내 혹은 아파트의 아내는 동시에 부부로서 확인 도장을 찍고, 성공리에 부부로서 재계약을 마친 후, 서로를 부둥켜안고 지난 낮에 P교수 아니, 올렝카가 말하였던 잃어버린 K의 반쪽과 아내의 반쪽이 서로 합쳐져 하나의 원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여인은 남자의 갈비뼈로 환원되어 시원의 진흙인간으로 돌아갔다.
(354∼355페이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지하철의 전조등 불빛이 탈옥수를 향해 집중된 교도소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뿜어져 나왔다. K는 이제 재빨리 대피하지 못하면 지하철에 깔려 죽을 것임을 간파하였다.
“안 돼. 제발 빨리.”
“하얀 장미의 기사님.”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 말하였다.
“절 버리고 가세요. 어서요.”
K는 세일러문의 손을 놓고 탈출할 수 없었다. K는 시뮬레이션 연극의 엔드 마크가 다가올 때임을 깨달았다.
K는 더욱더 강하게 세일러문의 손을 쥐었다.
기진하여 더 이상 체력이 없던 손에 갑자기 강한 힘이 더해졌다.
K는 자신의 손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그 찰나의 순간, K의 손에 누군가의 손이 합체되었다. K는 그 손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K1, 바로 레인저의 손이었다. 레인저는 K2를 보고 빙긋이 웃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하나의 ‘ 나’ 로 합체하였다.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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