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는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이 있는데, 브만큼 자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채소를 손쉽게 기르려면 검은 비닐로 흙을 덮어 주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법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검은 비닐로 흙을 덮어 주면 그만큼 태양열을 많이 받아들이고 잡초가 자라지 못해 일거양득이라는 것, 그렇지만 마음대로 숨을 쉴 수도 없고 햇볕도 직접 쬘 수 없는 흙이 얼마나 답답해할 것인가. 흙의 은덕으로 살면 서 그 흙을 학대하는 것 같아 나는 차마 그럴 수가 없다.
--- p.129
이제 내귀는 대숲을 그쳐오는 바람소리 속에서 맑게 흐르는 산골의 시냇물에서 또는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에서 비발디나 바흐의 가락보다 더 그윽한 음악을 들을수 있다. 빈방에서 홀로 않아 있으면 모든것이 넉넉하고 충만하다. 텅비어 있기때문에 오히려 가득찼을때보다 더 충만한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가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순간마다 새롭게 태어남을 뜻한다. 이 새로운 탄생의 과정이 멎을 때 나태와 뇌쇠와 질병과 죽음이 찾아온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니 이 대지에 봄이 왔다고 할 것이다'
'일년 열두달,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중에서 무더운 여름철'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무게를 헤아리는 계절로'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이다''더위 자체가 되어 일에 몰입하게 되면 더위가 미칠 수 없다'
'보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기를'
'모든 것은 변한다.'
여기저기
엊그제는 눈이 많이 내려 눈 치느라고 땀깨나 흘렸어요.
새해에는 날마다 좋은 날 이루시오.
--- p.184
아침 일찍 일어나 밤 동안 건조해진 화분에 물을 뿜어 주면서 잎새 하나하나에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는 것도 선이 될 수 있다. 비록 말이 없는 식물이지만 자기를 보살펴 주는 마음씀에 생기 넘치는 몸짓으로 응답하는 내밀한 생명의 신비를 감득할 수 있다면 그게 마음의 빛인 지혜가 아니겠는가.
--- p.43
세상에 언혀사는 우리들도 저마다 하나의 섬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광대무변한 이 우주 공간에 침묵처럼 떠 있는 섬. 물론 섬은 그 뿌리를 지구라는 한 대지에 내리고 있지만, 저마다 홀로 외롭게 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시장기 같은 자신의 무게를 안으로 헤아린다. 우리들이 지나온 허구한 그 세월 속에서 과연 내 목의 삶을 제대로 챙겨왔는지, 되돌아보게 하는 계절이 또한 가을이다.
저녁노을 앞에 설 때마다 우리들 삶의 끝도 그처럼 담담하고 그억할 수 있을까 묻고 싶어진다. 온갖 집착에서 벗어나 꽃이 피었던 그 가지에서 무너져 내리듯이, 삶의 가지에서 미련없이 떠나 대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 p.118, 160
산과 바다는 그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어, 한쪽에 치우친 삶을 서로 보완해 주는 것 같다. 산의 고요와 침묵은 인간에게 명상의 씨를 뿌려주고, 바다의 드넓음과 출렁거림은 꿈과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 우리 삶에는 산만 있고 바다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고, 또한 바다만 있고 산이 없어서도 균형잡힌 삶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 p.32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게 아니라 꽃이 피어나니 이 대지에 봄이 왔다고 할 것이다'
'일년 열두달,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 중에서 무더운 여름철'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무게를 헤아리는 계절로' '우리 모두를 뿌리로 돌아가게 하는 계절, 시끄럽고 소란스럽던 날들을 잠재우고 침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절이다''더위 자체가 되어 일에 몰입하게 되면 더위가 미칠 수 없다'
--- p.184
며칠 전 내린 눈으로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한 사흘 사람 그림자 대하지 않고 순순하게 내 식대로 살았네. 산은 이래서 한겨울이 좋다네. -218-
보배를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그대가 서 있는 그 자리다.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기를 -219-
산중의 가을은 차가운 개울물이 흐르는 골짜기로부터 물들기 시작한다. 어느새 벼랑 위에도 단풍이 들었다. 저 골자기와 벼랑 위에 진달래가 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가을이 물들고 있다. 철다라 옷을 갈아입는 산천의 경계를 지켜보면서 인간의 지혜도 자연으로부터 배울 바가 크겠다는 생각을 했다. -121-
--- p.121
나는 겨울숲을 사랑한다. 신록이 날마다 새롭게 번지는 초여름 숲도 좋지만, 걸치적거리는 것을 훨훨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의 당당한 기상에는 미칠 수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도 이런 숲의 질서를 배우고 익힌다면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대할 때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의모습도 함께 비춰볼 수 있다면 나무로부터 배울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겨울 숲에서 어정어정 거닐고 있으면 나무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빈 가지에서 잎과 꽃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나무들은 겨울잠에 깊이 빠져있는 것 같지만, 새봄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눈속에서도 새움을 틔우고 있는걸 보라. 이런 나무를 함부러 찍거나 베면 그 자신의 한 부분이 찍히거나 베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나무에도 생명의 알맹이인 영이 깃들여 있다.
--- pp.161-162
글줄 속에는 스님이 지금 머물고 있는 강원도 산골의 눈 내리는 적요함도 있고, 비 쏟아진 뒤 볼일의 뜰에 여물어 가는 물소리도 담겨 있다. 그런가 하면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바다 풍경도 그려져 있으면,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오두막으로 향한다는 짧은 연락도 있다. 고장난 소리통으로 듣는 바흐의 올갠 음악도 있고, 삼십 리 밖 시장에 가서 사온 아욱 한 단과 두부 한 모, 연필 두 자루도 그 속에 있다.
--- p.175
가을하면 독서의 계절을 연상한다는 친구를 만나 어제는 즐겁게 입씨름을 했다. 내 반론인즉 가을은 독서하기에 가장 부적당한 비독서지절非讀書之節이라는것.물론 덥지도 춥지도 않은 추야장秋夜長에 책장을 넘기는 그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디 그 길이 종이와 활자로 된 책에만 있을 것인가. 이 좋은 날에 그게 그것인 정보와 지식에서 좀 해방될 수는 없단 말인가. 이런 계절에는 외부의 소리보다 자기 안에서 들리는 그 소리에 귀기울이는 게 제격일 것 같다.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상하다. 얼마나 책하고 인연이 멀면 강조 주간 같은 것을 따로 설정해야 한단 말인가.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 하기야 단행본을 내봐도 기껏해야 1,2천 부밖에 나가지 않는데, 어느 외국 백과사전은 3만 부도 넘게 팔렸다는 게 우리네 독서풍토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이 가을에 몇 권의 책을 읽을 것이다. 술술 읽히는 책 말고, 읽다가 자꾸만 덮어지는 그런 책을 골라 읽을 것이다. 좋은 책이란 물론 거침없이 읽히는 책이다. 그러나 진짜 양서는 읽다가 자꾸 덮이는 책이어야 한다. 한두 구절이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주기 때문이다. 그 구절들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 권의 책이 때로는 번쩍 내 눈을 뜨게 하고, 안이해지려는 내 일상을 깨우쳐 준다.
그와 같은 책은 지식이나 문자로 쓰여진 게 아니라 우주의 입김 같은 것에 의해 쓰여졌을 것 같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수 있다. 1973
--- p.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