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도 언어 이전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연을 느끼고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던 시절에는, 우리도 몸의 감각들을 모두 열어놓고 몸이 시키는 대로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깨어 있을 때 너무 많은 신호들에 둘러싸여 있고, 수많은 생각들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럽다. 내면의 볼륨이 줄어들수록 직관의 소리는 점점 뚜렷하고 선명해진다.
이성을 통해 대상을 알아가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 세밀하게 한 단계씩 거쳐 올라가야 하고, 그 단계가 미심쩍을 때는 다음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처음부터 검토하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내 몸이 익혀온 감각은 이 모든 과정을 단번에 압축해버린다. 머리로 확인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몸이 낼 수 있는 육체의 속도는 나이와 함께 쇠락해가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단련된 몸의 감각들은 연륜이 쌓일수록 가속도가 붙는다. 그리고 그 속도가 극점에 다다르는 순간, 감각은 나의 이성적 판단을 넘어 커다란 안테나를 펼친다. 그랬을 때 감각은 하나의 기교를 넘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직관의 힘으로 성장한다.
---「빛처럼 번쩍하고 찾아오는 영감의 순간」중에서


공간은 사람들이 만들었던 파동을 지문처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이를 감지하기 힘들다. 밤에 혼자 있을 때면 옆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정도다. 그러나 파동을 감지하는 센서가 발달한 사람들은 그것을 3D 입체영상으로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면 마치 ‘유령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릴 수도 있고, 냄새나 감촉으로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 역시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잔상일 뿐이지만.
몇 년 전, 나도 유령 DNA를 생생히 느낀 적이 있다. 평소처럼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부모님 집에 갔을 때였다. 초인종을 누르자마자 문 앞에서 익숙한 소리가 났다. 부모님이 키우시는 강아지 예쁜이가 ‘컹컹’짖는 소리였다. 아내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어, 예쁜이다!”
그렇게 우리는 반갑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예쁜이가 지난주에 뇌출혈로 죽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환청이라면 아이와 나, 그리고 아내가 어떻게 동시에 들을 수 있었을까. 깜짝 놀라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계셨다.
“안 그래도 요즘 아침마다 예쁜이가 얼굴을 핥는 느낌이 들어서 잠을 깨곤 한다. 집 안 어딘가에 꼭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요즘도 외출할 때마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을 두고 나가곤 한단다.”
그 말씀을 하시는 아버지의 얼굴에는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사랑하는 존재를 떠나보낸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다시 그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하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나올
것 같고, 익숙한 인기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리움이 만든 허상도, 환청도, 그렇다고 귀신도 아니다. 그저 공간이 잠시 기억하고 있는 우리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유령DNA가 당신 곁을 맴돈다」중에서


어릴 때 한 번쯤 소리굽쇠 놀이를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피아노의 ‘라’ 음에 해당하는 소리굽쇠를 놓고 그 옆에 똑같은 음의 소리굽쇠를 둔다. 그리고 한쪽 소리굽쇠를 때리면 그 옆의 소리굽쇠가 같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저 옆에 놓아두기만 했을 뿐인데‘웅’소리와 함께 떨리기 시작한다. 이것 역시 라디오와 같은 공명현상이다. ‘라’ 음은 440hz의 주파수를 가지고 있고, 같은 주파수를 가진 모든 악기들과 공명할 수 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다. 나의 심장은 버스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주파수대가 같다. 때문에 심장과 심장 사이에는 같은 주파수로 실시간 무선통신이 오간다. 내가 떨리면 그도 떨리고, 그가 답답하면 나도 답답해진다. 그렇게 우리의 몸은 주변 사람들의 몸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예를 들면, 남편의 입덧이나 여성의 집단생리 같은 증상들이다. 아내가 입덧을 하면 함께 입덧을 하는 남편들이 꽤 있다. 단순히 심리적인 증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속이 메스껍고, 입맛이 없고, 온종일 잠이 오고 나른해진다. 나 역시 아내가 임신했을 때 똑같이 겪었던 일들이다. 여학생들이 며칠 동안 한 방에서 생활할 때, 한 명이 생리를 하면 마치 ‘감기가 옮듯이’ 같은 방 여학생들이 생리를 시작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서로의 자궁이 사이좋게 공명해버린 것이다. 이처럼 공명은 멀리 떨어진 소리굽쇠를 울리듯, 육체와 육체 사이의 견고한 벽을 단번에 허물어버린다.
---「모든 존재와 공명할 수 있는 힘」중에서


누군가로 인해 몸과 마음이 크게 진동하면 그 울림은 몸이라는 공간의 구석구석에 기억된다. 그렇게 한 번 기억된 울림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그 울림을 주었던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면 몸은 내 의식의 속도를 넘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서로에게 반응하고 공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공명이 바로‘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인연은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특별한 사건들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의 일들로 만들어낸다.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은 수많은 인연들이 벌이고 있는 공명의 장場일 수도 있다. 다만 내 몸이 그 미세한 울림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그녀와 나처럼 헤어져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연인이었을 수도 있고 부모, 자식, 형제, 친한 친구일 수도 있다. 그들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그들도 나처럼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우연처럼 서로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인연은 언제나 이루지 못했던 마지막 순간을 비워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는 매듭을 지어야만 또 다른 인연을 만들 수 있는 인연의 생리이기도 하다. 나 역시 우연히 그녀를 만났던 그날 비로소 그녀와의 남은 인연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비록 멀고도 짧은 만남이었지만 채우지 못했던 한 방울의 순간이 채워지기에는 충분한 시간과 거리였다. 그것이 아마도 그 날, 그 시간, 그렇게 그녀를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이제는 그날이 떠올라도 예전만큼 슬프거나 아련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멀리서도 첫사랑을 알아보는 이유」중에서


사람이 손으로 직접 만든 물건은 만든 이의 체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넓은 의미에서의 ‘유령 DNA’를 갖고 있다는 뜻이 된다. 항상 입는 옷, 목걸이와 반지, 신발, 칫솔, 모자 등 우리의 진짜 DNA가 묻어 있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자주 쓰는 노트북이나 책장, 의자 같은 손때 묻은 가구나 물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24시간 나의 자국을 흩뿌리고 우리 주변의 사물은 그 잔상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세상에는 똑같은 물건에서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의 그림, 글씨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을 만들 당시의 작가의 몸과 마음을 느낀다. 녹음된 가수의 목소리에서 억눌린 내면의 떨림을 듣기도 하고, 누군가가 쓴 책에서 감춰진 감성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평범한 물건은 나의 염원이 담기면서 특별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보통의 백설기가 부처님 앞에 올라가면 ‘기도떡’으로 재탄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도들은 그 떡에 대중들과 스님들의 기도가 담겼다고 여겨, 그 어떤 음식보다 소중히 여긴다. 언뜻 보면 근거 없는 믿음처럼 보이지만 유령 DNA의 관점으로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말 떡에 기도의 파동이 남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보면, 사실 내 주위에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언제나 보고 만지는 모든 물건 속에는 내 유령 DNA가 지문처럼 찍혀 있다. 그리고 보이지 않지만 나로 인해 변형된 파동을 공간에 퍼뜨리고 있을 것이다. 마치 살아 있는 DNA를 가진 나 자신처럼.
그래서 나는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 마치 내 일부를 버리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되도록이면‘이별의 숙려기간’을 둔다. 3년 상을 치르듯, 오랫동안 창고에 깊숙이 넣어둔다. 충분히 낯선 느낌이 들때에야 누군가에게 주거나 버린다. 특히 부모가 되어보니 아이들 물건일 때는 더 신중해진다. 아이가 서너 살 때 입던 옷들은 수년이 지난 요즘에서야 조금씩 떠나보내고 있다. 장난감도 소중하게 써줄 사람들에게만 준다. 지금 몰고 있는 차도 10년 정도 되면서 벌써 걱정이다. 우리 가족을 다 기억하고 있을 텐데 모르는 사람에게 가는 것도, 폐차장에서 쓸쓸히 뒹구는 것도 싫다. 아무래도 때가 되면, 주변의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해보면 고인의 물건을 태우는 오랜 풍습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주인을 기억하는 물건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사람에게도, 물건에게도.
---「나를 기억하는 물건과 이별하는 방법」중에서


그러나 눈빛 하나만으로도 엄마와 교감하던 아이들은 커가면서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는 단어가 많아져서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늘어날수록 대화는 길어지고 다양해지지만, 정작 마음은 복잡한 언어의 미로에 갇혀 가야 할 길을 잃게 된다. 나름대로 나를‘표현’하긴 하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럴수록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 그리고 이해받는다는 것은 점점 요원한 일이 되기 마련이다. 결국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가는 길이 얼마나 먼가를 인정하게 된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지인들이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올리는 일상들이 내 삶을 노크한다. 가만히 앉아서도 그가 요즘 갔던 곳, 만났던 사람, 읽었던 책, 오늘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까지 알 수 있다. 정보의 네트워크를 통해 수많은 이들이 마치 옆집에 사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것은 서로가 밀접해진 게 아니라 거리감을 잃은 채 뒤엉킨 것일 수도 있다. 마치 온갖 물건들로 어질러진 방처럼 말이다. 물건들이 넘치지만 꼭 필요한 것을 찾기는 힘든 상황이 된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많아질수록, 꼭 봐야 하는 것을 놓치게 만드는 아이러니.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이 연결될수록 더 강한 외로움과 소외감에 시달린다. 정말 힘겨울 때 스마트폰을 켜보지만, 연락처에 저장된 그 무수한 사람들 중 누구에게도 전화하지 못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