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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06년 01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317쪽 | 478g | 153*224*30mm
ISBN13 9788954600712
ISBN10 895460071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혼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 갖가지 익숙한 정체성의 징표들을 버리고 구별된 나를 선언한다. 배수아 다섯번째 창작집 『훌』

<저자소개>
배수아 |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소설과사상』에 「천구백팔십팔년의 어두운 방」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3년 한국일보문학상, 2004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아무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과거의 어느 사소한 순간이 생각날 때가 있다. 과거는 주로 미래의 한순간과 강하게 연결되는데, 예를 들자면 죽음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아주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듯이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과거의 사건은 이미 망각되어버린 것이거나 혹은 너무나 사소하고 무의미해서 미래의 어떤 순간과는 전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듯이 보인다. 그 과거의 사건들은 인생의 비밀을 미리 알려주는 암시였을까. 그것이 암시였기 때문에 어느 날 우리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무심코 갈망한 우연이기 때문에 미래의 어느 날 그것은 암시가 되는 것이리라.

--- p.9
우리는 정녕 타인과 손을 잡고 인사를 했으며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과 가족을 이루고 혹은 그들과 이별한 것인가. 설사 그 모든 것이 소문이 아닌 사실이었다고 해도 타인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그들은 아파도 울지 않고 총알이 뚫고 지나가도 피가 흐르지 않으며 공중에서 폭탄을 맞아도 진정으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공기처럼 흘러다니며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본 것이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이름을 가질 수 있을까. 타인이 정녕 애증의 대상이기나 한 걸까. 타인은 회색빛 옷을 입고 기묘한 모습으로 식탁 곁에 서 있으며 명령을 기다리고 주문을 받아적은 다음 음식을 날라올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개인의 역사 중에서 타인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타인은 과연 실재적인 것의 이름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비밀스럽게 존재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타인이 존재하며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왔다고 하는 것은 텔레비전의 선전이거나 종교의 광고문안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그들 타인을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실제로는 만난 일이 없기 때문이다.(「회색 時」)

시간은 이렇게 그를 지나쳤고, 그는 그렇게 ‘타인’을 지나쳤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시간을 스쳐갔고, 타인들 역시 그렇게 그를 스쳐갔을지도 모르겠다.
데뷔한 지 십삼 년, 그는 그렇게 변화해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고 실재하지 않는 ‘타인’과 마주하며.

1993년 데뷔 후 지난해까지 각각 한 권의 시집과 산문집을 포함 열일곱 권의 책을 펴냈으니(번역서 두 권까지 포함하면 열아홉 권!) 이 년에 세 권꼴로 책이 나온 셈이지만 1999년 『그 사람의 첫사랑』이 나온 이후 창작집은 칠 년 만이다. 그사이 출간된 산문집 『내 안에 남자가 숨어 있다』를 제외한 여덟 권이 모두 장편소설이다.
그사이, 배수아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공무원과 소설가라는 투잡(two-job)족--이 말은 배수아가 맨 처음 사용한 말이다--에서 전업 소설가가 되었고, 공항과 자택을 오가던 그는 이제 독일과 한국을 오간다. 독특한 문체 때문에 폭넓은 독자 대신 열혈 팬들을 거느리고 있던 그는 이제, 사유하는 문장의 힘으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2004년 『독학자』를 내놓으며 그는 “나의 초기 소설 및 그 독자들과 결별하고자 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독자들은 그를 놓아주지 않을 듯하다. 그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 역시 독자들에겐 놓칠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이므로.

“뭐예요?”
“죄송하지만 문을 좀 열어주시겠어요? 난 이곳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집주인이 잊었는지 문을 열어주지 않는군요.”
“뭐라구요?”
“문을 좀 열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난 바이올린 레슨 부탁을 받았는데 그것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그런데 이곳이 가르쳐준 주소이고 오늘 시간도 맞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들어갈 수가 없군요. 그러니, 문을 좀 열어주었으면 해서요.”
“도무지 못 알아듣겠네. 그러니까 당신은, 이곳에 찾아온 사람이 맞는데, 당신이 이곳에 들어와야 하는데 그 누군가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문을 대신 열어달라는 거군요. ……찾아갈 방이 몇호인데요?”
“1323.”“그런데 왜 내가 문을 열어줘야 하는 건지, 별일이네, 참. 이봐요, 난 1105호에 사는데, 그말은 당신이 벨을 누른 이곳은 지금 1105호란 말이에요. 1105호와 1323호는 비슷하지도 않은 숫자인데, 이상하군요. 왜 그러는 거지요? 내 생각에는 당신은 그의 이웃에게 부탁해야 당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나도 물론 그러려고 했지만, 아무도 집에 있질 않아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내 생각에는, 당신은 오늘 그냥 돌아가고 나중에 다시 방문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아니면 다른 이웃에게 부탁해보든가요. 나는, 내가 문을 열어주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돈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
(「마짠 방향으로」)

그는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린 어쩌면 대화가 아니라 끊임없는 독백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내 앞에 있는 것은 ‘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재하지 않는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우리)의 이야기는 허공을 맴돈다. 그 이야기는 결국 나(우리)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던가. 언제나 그랬듯이. 문득, 그의 소설을 읽으며 떠올려본다. 진짜 ‘대화’라는 것을, 나는 ‘나누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어쩜 듣는 이 없는 무언가에 대고 끊임없이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결국은 그가 나이고, 내가 너인 이 세상에서.(「훌」)

나는 말이지, 언제나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왜냐하면 너무 흔한 이름이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만날 수 있었거든. 내 할머니도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 게다가 가까운 친구 중의 한 명의 할머니도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 뭐야.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아이들 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언제나 한 명 이상은 반드시 있었어.(「마짠 방향으로」)
그런데, 정작 자신의 이야기를 던져놓기만 하는 줄 알았던 그가 이번에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하다. 최근 몇 년간 그의 인물들(실은 그의 ‘인물’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고민스럽다. 대부분 그의 인물들은 웬일인지 그 자신으로 읽혔다)은 그와 마찬가지로 항상 ‘길 위’ 어딘가에 있었다. 그들은(그리고 그는) 왠지 ‘지금-여기’가 아닌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분명 실재하는 어떤 세계이기는 하나 ‘지금-여기’는 아닌 듯한. 그런데, 이제, 조금씩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살갑게 다가와 말을 건네거나 조근조근 맛깔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들이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소설을 두고 ‘이야기’가 없다고 하는 독자들은 곰곰 다시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소설들이 지금 나에게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는지.

나는 완벽히 소외된 자였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사방에 무수히 많은, 그런 식으로 소외된 자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나는 그들처럼 그의 공간과 환호를 채우기 위해 징집된 존재였습니다. 내 탄생은 예술을 위한 징집이었을 뿐입니다.(「양곤에서 온 편지」)
이로써 어쩌면 대답이 된 걸까? 그가 “삶이 주는 모욕을 견디”(「병든 애인」, 『그 사람의 첫사랑』)며 살고 있는 이유가? 어쩌면 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야기하고 있었던 그 무엇을 우리가 너무 늦게,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눈치채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작가’ 배수아는 이제, 끝나지 않을 듯 보이던 길 위에서의 서성거림 끝에서 천천히 길을 찾는 듯하다.
사유는 더욱 깊어지고, 문장은 더욱 치밀하고 견고해졌다. 그것은 지금 활자화된, 지면 위에 붙박인 그 내용 이상의 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이제 우리는 너무나도 분명하고 정확해서 오히려 암호와도 같아진 그의 문장을 다시 한번 한 자 한 자 해독해나가야 한다.

난 어떤 하나의 문학적 언어가 ‘완성’의 단계에 가 닿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도구로서의 언어가 항상 폐쇄적인 룰을 갖고 있다고 믿지는 않아. 적어도 나는 가능한 한 최경계에서 작업하고 싶어.(『당나귀들』)
“작가란 동시대 정신을 대표하는 자가 아니라 그 경계에 있는 자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언제가 말했다. 그는 분명 ‘작가’이다. 그저 ‘소설가’가 아니라.
1993년, 데뷔 당시 독특한 신세대 작가 중의 하나였던 그는, 이제 경계에 있는 자의 대표가 되려는 듯하다.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영혼에 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회색 時」)
그의 영혼이 또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을지, 또 어떤 잠재력을 보여주게 될지, 그의 앞으로가 더욱 궁금해지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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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훌]로 불리우는 이름 없는 세계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무****피 | 2016.01.14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여기 '훌'이 있다. '훌'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타인이기도 한데, 어쨌든 모두 '훌'이라고 불린다. 소설 「훌」의 세계에서 '훌'들에게는 이름도 인종도 국적도 없다. 다만 화자에 의해 '훌'이라고 인식되고 불리울 뿐이다.    「훌」은 동명의 소설집 『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이다. 배수아의 소설들은 본래 전통적 의미의 서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작품이 많다. 현학적이고;
리뷰제목

여기 '훌'이 있다. '훌'은 세 명의 각기 다른 타인이기도 한데, 어쨌든 모두 '훌'이라고 불린다. 소설 「훌」의 세계에서 '훌'들에게는 이름도 인종도 국적도 없다. 다만 화자에 의해 '훌'이라고 인식되고 불리울 뿐이다. 

 

「훌」은 동명의 소설집 『훌』에 실려있는 단편소설이다. 배수아의 소설들은 본래 전통적 의미의 서사와 거리를 두고 있는 작품이 많다. 현학적이고 해체적인 배수아 고유의 글쓰기는 1990년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많은 단골독자들을 (필자를 포함하여♥)형성해왔다. 그러나 일부 작품들은 자아분열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혹평을 받아오기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훌」이다. 확실히 「훌」은 읽기가 여간 쉽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바로 그 쉽지 않음, 해체적 글쓰기가 이루어지는 지점이, 필자에게는 전지적퀴어시점을 바탕으로 몹시 퀴어하게 읽힌다.

 

「훌」에는 세 명의 '훌'이 등장한다. 나 '훌', 나의 친구이자 연인인 '훌', 그리고 나의 직장 동료인 '훌'이 그이들이다. 인종이나 국적이 정확히 명시되지 않았기에 독자가 쉬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들 세 사람이 모두 먼 이국의 나라에서 독일로 흘러온 노동자들이라는 것뿐이다. 나 '훌'은 자신과 동일한 이름, 동일한 기표로 불리는 두 명의 '훌'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 나 '훌'은 직장 동료 '훌'에게 시시한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달래기도 하고, 친구이자 연인인 '훌'에게 약을 사다주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이방의 도시를 우왕좌왕 모험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세 명은 동일하게 '훌'로 불리우는가?

 

「훌」은 '훌'이라는 이름을 한 인물에 대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여러 인물을 아우르는 이름, 마치 일반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다. 더불어 소설의 시점이 의도적으로 뒤엉켜 있다는 점에 근거해 「훌」은 자아분열적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읽다보면 반복되는 동일 이름에 의해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겪는 독자도 있을 법하다. 「훌」은 '훌'과 '훌', '훌'이 이방의 도시에서 관계 맺는 이야기이나 딱히 군중 속 개인의 몰개성화 현상을 그리고 있지도 않다. 오히려 '훌'과 '훌', '훌' 등 세 인물의 성격, 취향, 취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특색 있게 그려지는데, 이에 의지해 독자는 그들 '훌'이 각기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간신히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왜 '훌'인가? 바로 이러한 혼란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소설 「훌」은 성공한 듯 보인다.

 

「훌」은 이름에 대한 신화를 무색하게 만든다. 고유한 이름이란, 없다는 것이다. 「훌」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기표에 불과하다. 기존의 세계관에 의하면, 이름이란 무지막지하게 의미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존재 개개인은 고유하며 그 고유함은 응당 존재 고유의 '이름'으로 명징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詩 김춘수의 「꽃」 또한 기존의 세계관에 빚지고 있지 않던가.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고. 반면 배수아의 「훌」은 위와 같은 기존의 이름 짓기 기법을 단숨에 비틀고 부정한다. 고유한 개별적 이름들을 하나의 구덩이(hole)에 빠뜨려 전체화(whole)한 '훌'이라는 이름은, 개별적 이름이 각각의 고유한 자아로 인식되던 기존의 세계관에 의하면 자아분열에 다름아닐 것이다. 불편할 법도 하다. 그러나 이름을,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는 단편적 기표로 전제한다면 어떨까? 즉 이름이란 것이 생각보다 뭐 별 거 아니라면?

 

우선 사전을 뒤져보자. '훌'이라는 이름은 영단어 'whole' 또는 'hole'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whole'은 '전체의, 전부의, 모든, 온전한'을 뜻하는 형용사이며 동일 의미의 명사이기도 하다. 'hole'은 구덩이, 구멍을 뜻한다. 전체의 구덩이 또는 구덩이의 전체. 복수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전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며 하나의 몰개성화의 구덩이에 빠질 뻔, 한다. 그럴 뻔, 하는 것이다. 배수아는 이들을 쉽사리 빠뜨리지 않는다. 세 명의 '훌'들은 독자에게 (게슈탈트 붕괴 현상을 극복해야 하지만!) 저마다 고유한 다른 존재로 인식된다. 이름이 같아도 이들은 충분히 고유한 존재로 설명된다. 전체의(whole) 구덩이(hole)에 빠질 뻔한 '훌'들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다. '훌'들은 저마다의 행동거지, 발언, 취향, 개인의 역사에 따라 존재감을 드러낸다. 「훌」의 세계에서, 한 인물의 정체성은 어떠한 기표나 이름이 아니라 저마다의 이야기에 따라 결정된다. 존재를 구원하는 것은, 이름이 아닌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는 어쩜 듣는 이 없는 무언가에 대고 끊임없이 내 얘기를 들어달라고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통 부재의 세상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결국은 그가 나이고, 내가 너인 이 세상에서.(「훌」)

  

언어로 소통하는 인류에게 이름 짓기란 불가피한 숙제나 마찬가지다. 끝없이 소통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개별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방식은 확실하게도 편리한 구석이 있다. 문제는 이름의 권력구조다. 이 세상의 '민수', '철수', '존슨'은 '지은', '혜진', '에밀리'보다 힘이 세다. '민수'는 '지은'과 결혼해야 하고 '에밀리'는 '지은'을 사랑해선 안 된다. '존슨'은 '혜진'의 나라에서 환영 받지만, '혜진'은 '존슨'의 나라에서 혐오의 대상이다. 이름의 권력구조는 존재의 우열을 결정 짓고, 때로는 이름대로 살아가기를 명령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짓지도 않은 이름에 의해 내가 설명된다. 배수아의 「훌」은 이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이, 정말 당신이냐고. 당신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게 맞냐고 말이다. 

 

이름의 권력이 제거된 「훌」의 세계에서, 이름이란 더이상 세계를 인식하는 주요 도구가 아니다. 그저 내 사랑, 내 친구, 내 동료를 부르는 청각적 기호일 뿐이다. 네가 '훌'이어도 '훌'이 아니어도, 너는 사랑스럽다. 네 이름이 어떻든, 너는 여전히 '향기로운 세재 냄새가 살짝 남아 있는, 새로 세탁한 이불이 아니면 몸에 두르지 않'는 너이며 '기다랗고 마른 한 팔을 침대 아래로 쭉 내리고 반쯤 엎드린 채' 잠드는 너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가슴에 찔리듯이 충격이' 오게 하는 너이기 때문이다. 

 

(덧: 친구이자 연인인 '훌'은 출판사 서평 등 대부분의 소개글에서 친구라고 소개되어 왔다. 이러한 세태는 명백하게도 이성애중심주의적 시선의 폐단으로 읽힌다. 나 '훌'과 또 다른 '훌'의 관계는, 비록 아쉽게도 성애적 요소는 제거되었으나 실상 연인과 다름 없는 점들이 많다. 연인 '훌'에 매혹된 나 '훌'의 감정을 사랑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작성: 빅뷰티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무지개책갈피
www.rainbowbookmar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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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3점 아*작 | 2008.12.06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참 난감한 작품을 만났다. 첫 작품을 내가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배수아라는 작가의 작품이 좋다라는 평가를 익히 듣던 바였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난감하다. 이 작품은.         이 책은 총 일곱편의 중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있다.       으흠, 일단 내가 최근에 읽어;
리뷰제목
     참 난감한 작품을 만났다. 첫 작품을 내가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배수아라는 작가의 작품이 좋다라는 평가를 익히 듣던 바였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난감하다. 이 작품은.

 

      이 책은 총 일곱편의 중 단편 소설로 이루어져있다.

      으흠, 일단 내가 최근에 읽어왔던 한국소설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를 가진 소설이다. 바로 그 점이 난감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세밀하게 한 번 생각을 해보자, 으음...왜 그런지...

 

      하나 하나 정리해보면, 먼저 이 책은 방황하는 고등학생이나, 20대 초반, 또는 스스로 사고 성장이 남들보다 빠르다 하면 중학생 정도가 읽고 같이 생각해 볼만한 주제들이라고 생각이든다. 나는 그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거의 전반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토마스 만의 타입을 닮아있었다. 노벨 수상작가의 글 분위기를 닮았다고 해서 이 작품이 뛰어나다고 말 할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분위기만 그럴 뿐, 토마스만이 가지고 있는 구성이라든가, 깊이, 주장, 고뇌의 간격등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잘 만들어진 소설로서 그 가치를 인정할 뿐이지 작가가 읊조리는 내용들에 대해서는 거의 반대의 입장이기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하물며 이 책은 분위기는 토마스만과 비슷하면서도 그 내용면에 있어서 완성도는 현저하게 떨어지니 읽는 내내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른다.

 

      상기의 느낌을 풀기 위해 일곱 작품을 보고 한 문장으로 말해보라고 한다면 생각의 겉멋만 잔뜩 들어있는 작품들, 이라 평하겠다.

      주제 자체가 가벼운 것들은 분명 아니며 또 한 번쯤은 고뇌하고 넘어가줘야 할 부분인 것도 확실하다. 그러나 그런 주제들을 두고 모호한 언어들을 사용하여 표현함으로 누구나 쉽게 알수 있는 감정을 한층 어렵게 이야기 하고 있다. 한마디로 혼자 놀고 앉았다라는 느낌이 그것인데, 이는 작가 스스로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바로 이 점이 특히 토마스만과의 차이를 보여준다. 아주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뭔가 정리되지 않은 자신의 생각을 주절거리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얘기이다. 한마디로 소설이라고 볼수 있는 작품은 7편중에 단 한 편도 없어보인다. 그냥 방황하는 청소년이 삶과 인간과 기타 그때 생각하게 되는 주제의 것들을 끊임없이 떠오르는 대로 끄적여 놓았다는 느낌을 지을수 없다.

      즉,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독자들과 공유하려고 쓴 목적이 아니라 혼자 주절거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대체적으로 뭘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쟤 지금 뭐래는 거야? 하고 일갈해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혹, 이런 걸 주제로 말하고 있는 거야? 라고 짚이는 몇가지가 있긴 했지만 그게 맞다면 정말 십대들이나 읽어야 할 작품이다. 

 

      7편중 [양곤에서 온 편지]라는 작품이 특히 토니오 크뢰거를 떠올리게 하는 편이었는데 그 첫번째 이유가 이 책의 공통적이기도 한, 번역소설의 분위기가 난다는 점이다. 어색한 담화도 그렇고 정확하지 않은 지명과 인명도 그렇다. 작가가 노린 것이 그런 것이라면 성공했다. 그냥 스스로만 성공했고,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다.

      이 작품이 난감하다고 여겨지는 중요한 포인트는 이것이다. 문장이 좋다는 것이다. 문장이 독특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느낌을 좋다고 말할수 없다는 이유가 한 문장만 봤을 때 그렇다는 게 문제였다. 문장과 다음문장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고, 하물며 문단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매끄럽지 않게 진행되지 못하는 점에서 바로, 생각난대로 끄적였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품 전체를 굉장히 산만하고 일관성이 없어보이도록 하고 있으며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게 뭔지 도무지 알수 없다. 통일된 주제가 없다. 즉, 이 책은 구성이라는 게 없어보이고, 뭐랄까 이걸 작가 개인의 일기라고 해야하는 건지..뭔지...장르를 모르겠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고뇌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회 경험이 지극히 미숙한 자들이 그 세계에 합류되지 못하고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는 염세적인 것들이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생각만 하고 사는 사람들 말이다.

      어떤 작품은 골방에 처박혀 외로움에 미쳐가고 있는 정신병 환자가 쓴 글 같기도 했고, 어떤 작품은 60년대에나 볼 수 있는 음습한 한국 소설의 전형처럼 쓰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역시 내용은 없다. 혼자 고민하는 것들이 전부다.

      나는 이렇게 사회적인 내공없이 겉에서만 빙빙 돌면서 심각한 척하는 작가를 매우 싫어하는데 이 책이 딱 그렇다. (물론 본인이야 심각하겠지.) 좀 컸으면 좋겠다.

 

       독자로서 왜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도 짚어내며 짜증을 내고 있는가 하면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스토리가 없다. 그러므로 엄청 지루할 따름이다. 내 친구 같은 녀석이 이 책을 보면 뭐냐? 이게, 라고 당연히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책 깨나 읽었다는 독자의 입장으로서 이야기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소설이 아니다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그렇다면 장점이 뭘까 라고 생각하며 읽고, 다시 읽은 것이었다.

      그러나 장점은 오로지 딱하나, 독특한 색깔의 문장. 그마저도 연계성이 없이 이어지므로 퇴색해버리는....

      염세적인 시각이다. 그것도 열심히 뭔가를 살아보고 염세적이라기 보다 그냥 겉멋만 잔뜩 들어있는 염세적인 주절거림이다. 인간의 이해? 진짜 인간을 이해하고 쓴 글이 아니다. 혼자 방구석에 앉아 상상하는 인간의 이해일 뿐이었다. 나는 이런 작품을 냉소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냉소는 일면 날카로운 부분이 있어야 하므로 그렇다. 즉, 날카로운 부분이 없다라는 점이 뜬구름 잡는 겉멋만 든 고뇌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아니, 소설이라면 이야기가 재미있든가, 그게 아니라면 진정으로 삶에 대해 생각해 볼 주제의식이 있다든가, 또 그것도 아니라면 뭔가 보다 정확한 비판적 시각이 담겨있다든가, 이거 저거 모두 없다면 구성이 짜임새 있어서 문장을 읽는 맛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단 하나도 가진 장점이 없어보인다. 그러므로 결론은 나 역시, 이게 뭐냐. 이다.

      말했듯 딱 한 줄의 문장을 전부 떨어뜨려서 본다면 매력이 있다. 그런 이유때문에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겠지만 그 한 줄의 문장이 여전히 이 책과 같이 뭉치면 따로놀고, 내용도 없고 그런 식이라면 나의 생각은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어린 양반도 아니고 뭐야 대체. 인생을 상상만 하고 사나? 그러면서 열심이 사는 인간세계를 말해보겠다고? 어이 없다.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은 아주 가관이다.  쓸 게 없으면 쓰질 말든가. 삽질하기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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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를 만나다.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야**옹 | 2008.04.05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호불호가 뚜렷하고, 대중보다 평단의 호평을 받는, 다작하는 작가.  배수아. 그녀를 읽었다. 첫 작품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훌을 택했다. 그것 역시 한 서평에 의한 시작이었다. 누군가의 서평에 적힌 배수아를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알려면 훌을 읽어보라는 조언에 의한 것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고, 무작위로 선택하기엔 그녀가 지금까지 써온 작품이 엄청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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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불호가 뚜렷하고, 대중보다 평단의 호평을 받는, 다작하는 작가.  배수아. 그녀를 읽었다.

첫 작품을 뭘로 할까 고민하다가, 훌을 택했다. 그것 역시 한 서평에 의한 시작이었다. 누군가의 서평에 적힌 배수아를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알려면 훌을 읽어보라는 조언에 의한 것이 작용한 것이기도 하고, 무작위로 선택하기엔 그녀가 지금까지 써온 작품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 일단 첫 느낌은, 관념적인 영화를 본 느낌이랄까. 김기덕 감독의 '빈집'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 그것과 비슷했다. 그냥 전체적인 커다란 첫 느낌이 그랬다.


훌은 단편집이다. 나는 그중 회색의 시와 훌을 재밌게 읽었다. 그래서 처음 두 단편을 읽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금 의아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다. 많은 서평들을 봤을 때 그녀는 그다지 재밌는 작가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한 나의 생각은 세 번째 단편을 읽을 때부터 맞아들어가기 시작한다. 정확히 훌이후 작품을 읽고부터, 나는 지루해져가기 시작했다. 단연 표제작이 훌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읽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보통, 마음에 들지 않는 단편은 건너 뛰기도 하고 아예 책 자체를 내려 놓는데 배수아의  책은 놓기가 싫었다. 그저 '견뎌'보고 싶었다. 문장은 굉장히 긴편으로 두줄을 넘어가는 문장이 다반사이며, 심지어 세줄, 네줄까지 이어지는 문장도 종종 눈에 띌 정도로 그녀는 긴 문장을 구사한다. 문장에 거침이 없어 보인다. 신경숙의 더듬거리는 문장과 정반대이고, 김훈의 문장길이와 정반대이다.


그녀의 언어선택 또한 굉장히 관념적이다. 그녀 말대로 그녀는 뭔가 뚜렷히 나타나는 문장들을 싫어하는 듯 보인다. 또한 그녀의 글에 나타나는 주인공들은 모두 다른듯하지만 비슷한 생각들을 가졌으며, 읽다가는 이것이 주인공의 생각이 아닌 배수아,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했다. 이를 눈치채기라도 한듯, 그녀의 단편'돼지~'에서는 주인공과 친구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니 이야기를 내가 소설로 만들어도 괜찮겠느냐며 묻는데 상대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뛴다. 그리고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픽션일 뿐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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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시 ★★★

내용상 흥미라기보다 이야기에 들어난 작가의 생각들이 마음에 들었던 단편. 

 

죄의식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 한다. 지나간 시간이 그 내용과 관계없이 결국은 수치이자 죄의식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나이들어 늙게 되면서 비로소 깨우쳤다. 그것의 시작은 행복하다고 느껴보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행복하지 못하다는 감정이 죄의식과 연결되는 것은 무언지 모를 자신의 막연한 과실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어느 순간들을 그대로 헛되게 흘려보냈다는 과도하게 예민한 책임감에서 기인한다. 혹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그 소심하게 겁먹은 비굴함의 원인이 바로 자신에게 있으리라는 지레짐작 때문이다. 내가 늙기 전에는 그것이 단지 개인사의 불행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의 계단을 점점 더 많이 내려오면서 죄의식은 그 자체가 곧 과거의 보편적인 거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인 감각기관에서 효소처럼 비밀스럽게 분비되어 배출되는 일 없이 일생동안 조금씩 쌓이는 매우 비선택적인 물질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일생동안 어떤 윤리적인 판단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했다 할지라도 죄의식 그것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감수성이 둔할 뿐이다. 아무런 외관상의 흠하나 없는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영원한 죄의식에 시달리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는 듯하다.

 

훌★★★★★

별을 열개 주어도 아깝지 않은 단편이다. 정말정말 마음에 들었던 소설. 

사실 훌을 읽고 다른 단편을 읽었을 때의 느낌은 참달랐다. 훌은 뭐랄까, 좀 특별했다. 지금까지 읽었던 소설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 배수아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싫어한다고 했던가? 아무튼. 이건 훌과 친구 훌과 동료 훌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서로의 말 속에서 원하는 부분만을 듣고 원하는 식으로 이해한다. 자신의 의견을 옳다고 주장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답답해 한다. 훌은 나와 동료와 친구의 이야기이자, 나와 나와 나의 이야기다.

 

모두들 그 일에 대해서 "네가 원했다면, 그것이 무엇이었나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라거나 "사실대로 말했다면 나라면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면 "설사 네가 정치적인 성향의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바보천치 선동가는 아닐 테니까. 난 그렇게 생각해." 혹은 "난 말이야. 너를 위해서 변명해 줄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모두들 합창하듯이 똑같은 모양으로 입을 벌리고 " 난 말이야. 특별한 사람이니까 " 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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