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5년 09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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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56쪽 | 446g | 128*188*20mm |
ISBN13 | 9788936437343 |
ISBN10 | 8936437348 |
발행일 | 2015년 09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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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형 |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 256쪽 | 446g | 128*188*20mm |
ISBN13 | 9788936437343 |
ISBN10 | 8936437348 |
빨간구두당 개구리 왕자 또는 맹목의 하인리히 기슭과 노수부 카이사르의 순무 헤르메스의 붕대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 거위지기가 본 것 화갑소녀전 |
『빨간구두당』은 안데르센 동화와 그림 형제 동화 등을 입체적으로 변주한 여덟 편의 단편집이다. 기존 동화의 원형을 갖고 있지만 판타지의 경계는 시대의 문제의식을 통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밝고 희망적인 것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며 시종일관 어둡고 절망적이다. 어쩌면 동화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인 우리들의 태도에서부터 작가는 이의를 제기했는지도 모른다. 현실적 측면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부분도, 상식적인 선에서 엄격한 규율로 새롭게 묘사된다. 그런 이유에서 동화를 객관적인 잣대로 비춰 본다면 전혀 다른 맥락을 타게 된다.
이를 테면, 착한 흥부는 게으른 욕심쟁이고 백설공주는 허락없이 난쟁이 집에 들어갔으니 가택침입죄가 성립된다. 『빨간구두당』의 주인공들은 고전 동화의 주인공들처럼 멋진 왕자나 아름다운 공주가 아니다. 반짝이는 후광을 가진 소수를 둘러싼 다수의 주변인이 화자이거나 주인공이다. 그들의 삶은 왕자나 공주처럼 멋지거나 잘나지도 못하고 부자도 아니거니와 풍요와는 거리가 먼, 그들을 떠받들 다수의 엑스트라에 해당한다. 또한, 중세시대 유럽은 빈곤과 콜레라가 창궐했기에 더럽고 악취가 나는 빈민가가 대부분이었다. 이를 반영하듯, 아래 인용문은 흉포하고 음산했던 시대의 민낯을 드러낸다.
누군가가 성냥을 필요로 한다 함은 불을 붙여 밝힐 등잔과 기름이 있다는 뜻이며, 더 나아가선 저녁 식사로 끓일 수프에 넣을 시든 채소와 반 조각의 고기가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니, 얼마 안 되는 식량과 재산을 힘세고 못된 이들에게 약탈 당할 가능성도 따라서 높아지는 셈입니다.
-「화갑소녀전」, (p257)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가 종교적인 것에 위배된다면 「빨간 구두당」에서는 전체주의 사회에 나타난 속성을 패러디한다. 「빨간 구두」는 원전 자체가 잔혹동화로 기억되는 몇 안 되는 동화중 하나다. 기존 모티프로 쓰인 「빨간 구두당」에서 소녀의 발목이 잘리는 것은 일치하지만 무채색만 있는 도시에서 빨간 구두를 바라본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의 아픈 현실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색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소녀와 함께 춤을 추면서 '빨강구두당'을 결속하고, 그들이 '빨강'이라고 발음했을 때 위험한 금기어는 폭발음에 가까운 광기로 일상이 전환된다. 「엘제는 녹아 없어지다」에는, 남자의 보조 역할이나 소유물에 지나지 않던 여성의 삶을 비관적으로 보여준다. 제 아무리 똑똑한 여자라도 학문의 기회가 적었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펼칠만한 토양이 없었다. 참정권의 기회 역시 전무했던 시대였으니 말로 무엇하랴. 「화갑소녀전」에는, 힘을 만드는 공장에서 자신의 몸이 소모품이 되어야 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무력해진다. 삼성전자를 겨냥해서 나온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생각난 건 나 뿐이었을까?
"예측 모델은 특정한 말이 승리할 확률을 추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말이 승리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 애덤 쿠하르스키 著, 「수학자는 행운을 믿지 않는다」중 p300, 북라이프 刊, 2016.
작가 구병모가 직접 규정하고 있는 바, "옛 이야기의 변주"(p288)임에 틀림없는 이 소설집은, '옛 이야기의 변주' 같은 것도 창작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라든가, '옛 이야기의 변주'까지도 그 작가의 창작물이라 할 수 있는걸까요? 와 같은, 혹여 제기될 수 있을 물음들에 대해 --- 이건, "제대로 된 관찰자"1의 역할을 하는 작가로서, 그 치열하게 관찰한/된 바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까지 확장된 해석, 그리고 그 기막히도록 멋진 해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낸, 새로운 창작이라 불리울 충분한 자격이 있는 이야기들이기에, 단 한 치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그러니까 구병모의 이 '변주들'은, 흡사 '말이 승리할 확률의 추정 뿐 아니라 승리하는 이유까지' 모두를 완벽하게 담고 있는 예측 모델과도 같습니다~라 대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제 '개인적 확신'은,
이 책 속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내용', 그러니까 현실에 대한 작가의 --- 흡사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글이 아닌가 싶게, 집요하게 끝까지 파고 들어가,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만듯한, '해석'으로부터의 감동이 한 축,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수많은 이야기 속에서는 대체로 현명하지 못하거나 착하기만 한 구닥다리 아버지에게 아름답고 지혜로운 딸이 있어, 위기에 놓인 아버지는 딸의 자문을 구하고 그녀의 조언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나간 끝에 임금의 장인 자리를 차지하곤 했는데, 그런 서사가 있다는 사실부터가 현실 세계에서 동일 사례를 찾기 힘들다는 방증이었다. (p101)
어느 작품의 어느 구절이라 콕 찝어낼 순 없으나, 분명 (역시나 제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준, 또한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이문열의 작품들 어느 곳에선가 분명 만나보았었던 어느 구절의 느낌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다라는, 예의 '문장의 스타일'이라는 '형식'에 있어서마저, 이 작가 구병모가 제 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바닥부터 천정까지 통째로 사로잡았다라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문장들이라는, 또 다른 한 축으로부터 기인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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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분홍신>이란 제목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2, 한 소녀가 분홍색 신을 가지기 원했고, 드디어 그것을 신게 된 소녀는 그 신을 신은 후 춤추기를 멈출 수 없었었다는, 간단한 스토리의 동화에 대해, 교사 박현희는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동화중 하나라 꼽고 있으며3, 이 이야기를 가리켜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다라 해석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 규범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에 잘못이다 아니다를 결정짓는 것이 중요하다라기 보다는4, 그러한 욕망을 가졌을 때의 결과로 너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춰야하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걸, 즉 --- 가해지는 제재에 대해, 그것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때 주어지는 불이익을 먼저 떠올리게끔, 은연 중에 우리를 세뇌시킨다5라는 거지요. 얼핏,
화가들은 회백색과 검은색으로 정물화와 풍경화를 그렸는데, … 태어나서부터 무채색의 세계만 알고 자랐으므로 그들이 화폭에 펼쳐 놓는 기괴하거나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 또한 흑백과 회색으로만 이루어졌다. (p12)
작가 구병모 또한 그러한 선천적 세뇌에 대한 방향으로, 이 동화를 해석하고 있다,라 생각해볼 수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6... 만, 아 물론, <학교-학원-학원-학원>의 스케쥴에 대해 '원래 삶이란 이런 것'이라 알고 있다는 강남 아이들에 대한 은유라고 볼 여지도 있겠습니다만, 그보다는...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아서 도시에는 색이 보이는 사람들끼리만 알 수 있는 유대감 내지는 결속력이 형성되었다. (p15) …… 그들은 자신들 눈에 빨강이 보인다고 주장했으며 빨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빨강이 얼마나 위험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인류에게 유용한 색깔인지를 설명했다. (p25)
(이 또한 교육의 산물일) 우리의 선입견이 이끄는 바로서의 '공산주의', 혹은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 등으로도 해석되어질 수 있겠는, 작가 구병모의 이 변주는 예의, 주제 사라마구를 떠올리게 해주는7다음 구절을 통해,
진작 빨강을 볼 수 있었지만 빨간 구두를 신지 않은 채 잠자코 일이 굴러가는 꼴을 지켜보던 이들 또한 검은 구두 신은 이들을 변호하러 나서지 않았다. 빨간 구두 아닌 검은 구두라고 증언하기 위해선 제 눈에 빨강이 보인다는 사실부터 밝혀야 했고, 단지 빨강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빨간구두당의 일원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 세상은 다시금 검정과 하양 그리고 그 사이를 어중간히 맴도는 회색으로 물들었고 …(p26)
이 세상에서, 정의(justice)가 불의라는 것을 이겨내기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결과적으로 이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라 전 생각했습니다. 이 '이겨내기 쉽지 않음'을 향해 '기회주의'8란 단어를 빌어 개인, 그리고 그 개인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혹여는!
이제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한 데나리온과도 같아야 할 햇빛 한 줄기조차 들지 않는 공장 안이 바깥보다 더 춥다는 사실을 압니다. (p280) …… 다시 바깥세상의 추위와 마주한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을 물처럼 흐르던 생각은 뚝 그치고 말라붙어 버렸습니다. 공장 안 숙소라는 작은 세상이 주는 최소한의 온열이란, 세상에 태어나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달콤한 초콜릿이나 부드러운 케이크와도 같은 장력으로 나를 끌어당겨 현실에 붙박아 놓았습니다. (p277)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발생되는, 행여 그것까지를 '기회주의'란 단어로 불러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마저 필요없다 할지라도, 과연
"영원한 을의 자리에 설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자본가들의 갑질을 성토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 익명의 네티즌으로서의 성토일 뿐, 막상 현실에서는 을이라도 되는 상황을 감지덕지 끌어안는다. 갑질을 당할 수 있는 을의 입장에 있다는 건 적어도 여전히 링크 안에 함께 서 있음을 의미하므로, 아예 그 링크에서 낙오되는 일이 있을까 경계한다. 이런 현상은 투표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이해를 대변해줄 사람에겐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자에게선 내가 떠나온 비참한 출신 성분의 향기가 풍긴다. 중요한 건 누가 가장 힘이 센가,이다. 비밀투표일지언정, 내가 강자의 편이라고 느껴야 안심이 된다." (pp10~11)
-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의 <역자 서문> 중 pp10~11, 생각정원 刊, 2015.
위와 같은 (비참한? 최소한의?) 바람(願)까지를 비난할 수 있는 것일지, "현실은 언제든 꿈에 젖어도 되는 것이었고, 꿈이 증발한 자리를 예상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p170)이란 개인적 감정의 up-and-down은 그냥 나 스스로 즐기게/괴로워하게 좀 내버려 두면 안되겠니,라 항변하고 싶은데, 문득!
"누구의 도움도 얻지 못한 소녀가 주검으로 발견된 사회적인 비극과 참상을, 안데르센은 할머니와의 만남과 승천이라는 아름다운 장면으로 덮어 버린다. 소녀 입가의 미소는 자신을 보호해 주지 못한 사회에 대한 어떤 원망이나 집착도 없이 다만 간밤의 꿈이 행복했음을, 세상을 등지는 대신 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한 기쁨만이 가득했음을 보여 준다."
- 「빨간구두당 : 이야기의 뿌리들」중 pp43~44, Internet copy
나도 역시, 위와 같은 사회적 세뇌의 결과물만을 생각해낼 수 있을 뿐이며, 이러한 세뇌의 확장은 이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고 일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가늠하는 데 중요9"(p268)하지 않을까란 (나 스스로의 혹은 타인의) 의문에 대해 "노동 생산으로 먹고살아야 할 사람에게 감수성이라니, 그처럼 터무니없는 사치와 낭비라니"(pp191~192)와 같은 자기검열 내지는 비판을 스스럼 없이 가하게 되고, 그리하여 결국엔 "던져져도 파열음을 낼 줄 모르는 돌, 파문을 일으킬 줄 모르는 수면과 같은"(p100) 삶을, 마치 가장 이상적(ideal)인 상태의 삶으로 믿어버리곤, 급기야 그 믿음을, 그게 가능하다면, 나 뿐만이 아닌 타인, 완전한 타인 및 나의 후손들에게까지 강요까지 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란 게,
인간들은 살아 있는 한 신의 커다란 동그라미 안에 갇힌 것처럼 저마다 지겨운 일을 반복해야 하는 운명을 지녔으니까. 얼마나 더 지루하거나 위험하거나 더러우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p85)
나 스스로 이걸 더 이상, '체념'이 아닌 '당연'이라 생각하고 있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의 감정이란 건 참...
………………………………………………………
한 편의 이야기를 하나의 동그라미라고 할 저에 그 중심부에는 마법에 걸린 왕자와 공주의 행복이 있지요. 이 세상 어디로 간다 해도 중심이 아닌 모든 것은 주변이고, 수부는 자신이 가장자리의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았습니다. 주인공들의 충만과 상승과 고양을 위해 존재하는 이 세상의 수많은 지렛대 가운데 하나. 세상을 떠받친 아틀라스의 잊힌 어깨 같은 것들. (pp92~93)
우리는, 자신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수단으로 사용되길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 몸과 마음은 당신께 바치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그에 따라 살아왔습니다"(pp53~54)와 같은 선서가, 더 이상은 강요되지 않는 세상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 내가 왕자이고 당신이 공주가 아닌 한, 그리하여 세상이 나/우리를 주변, 가장자리, 지렛대 중 하나로/일 뿐이라 간주한다면, 그런 선서는 명시적으로만 강요되지 않을 뿐, 마치 농부에게 주어진 "땅에 묶이고 땅을 부치는 보편적 삶의 필연성과 유한성"(pp181~182)과도 같이 살다가, "그러고 나니 이제 나란 사람은 줄 것도 별로 남지 않았구나 싶답니다"10와 같은 깨달음으로 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까지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라 전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처럼,
여기에 실려있는 8편의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우울합니다. 이 우울함이, 본연의 스토리로부터 기인된다라기 보다는, 물론 그런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뭔가 --- 작가 구병모의 글이, 작가의 문체가, 어쩌면 작가의 생각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연이어 읽어 본 3 편의 책들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리고 전... 작가의 이런 우울함에, 오랫만인 사정(ejaculation) 후의 노곤함과도 같이 완전히, 녹아져 버렸고 말이죠.
※ 읽어본, 작가 구병모의 다른 작품 :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파과」
※ 기존 동화의 '새로운 해석' : 「백설공주는 왜 자꾸 문을 열어 줄까」 · 「어른들을 위한 잔혹동화」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지금 이 블로그에 와있는 당신에게마저 여하한 구실로라도 '나를 아는' 이란 형용사를 붙여 --- 꼭 한번 읽어보시라 말하고 싶은 책들의 제목 앞에 ★표시를 붙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표시이겠지만 가끔은, 타인의 주관을 한번쯤 믿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더군요.
... 금연 76일째
민음사 오늘의 작가상과 황순원 신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라고 한다.
빨간 구두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의 내용을 작가의 시각으로 다시 쓴 책이고 추천책이라고 해서 집어들었다.
기존 동화의 뒷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동화를 통해 느꼈던 순수했던 감정이 동화를 읽음으로써 퇴색되는 느낌을 받는 다는 건 별로인 것 같다.
같은 주제 다른 표현과 좀 더 현실적인 표현이라는 점과 기존의 명작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표현했다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동심을 간직하고 싶은 나같은 사람에겐 좀 슬픈 소설이 아닐까 싶다.
너무 현실적인 동화는 어린시절의 기억을 슬프게 할 수 도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솔직히 현실적인 동화는 내게는 안 맞는 듯 하다.
어린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남기는게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깊게 했던 책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