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음식의 대부분은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도입되었다. 그 후 불과 백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다양한 음식문화를 즐기고 있고, 국내에서 전 세계 모든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100년 남짓한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진 걸까. 외래의 서양음식은 어떤 식으로 수용되었을까. 메이지 유신은 현대 일본의 다채로운 음식문화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는 가장 흥미로운 시대의 개막이었고, 근대화를 향한 탈피였던 메이지 유신은 그런 의미에서 동시에 ‘요리유신’이기도 했다. --- pp.10~11
서양요리가 본격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사회의 상층부에서부터였다. 1872년 메이지 천황이 솔선해서 육식을 한 것을 시작으로 정부와 지식인들은 적극적으로 육식을 장려하고 나섰다. 궁중의 정찬에도 프랑스요리가 도입되었으며, 밤마다 열리던 로쿠메이칸(鹿鳴館: 1883년에 도쿄 히비야에 지어진 국제사교장―옮긴이) 무도회에도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서민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일본요리와 서양요리를 절충해 새로운 스타일의 음식 ‘양식洋食’을 만들어낸 것은 역시 쌓이고 쌓인 서민들의 창의와 궁리였다. 그 과정은 이렇다. ① 서민들은 처음 마주하는 양식 조리법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서 ② 이윽고 쇠고기를 그때까지 먹어왔던 일본식 조미료(된장, 간장)로 맛을 내어 쇠고기전골과 스키야키를 만들어냈고 ③ 나아가 양식 조리법에 일식 조리법을 절충한 독특한 양식을 가정요리에 받아들였다.
(중략) 서민들이 자유자재로 양식을 만들어 먹게 된 것은 육식이 해금된 지 60여 년이 흐른, 다이쇼大正 시대(1912~1926)에서 쇼와昭和 시대(1926~1989)로 넘어가는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그리고 그 60년 세월은 곧 ‘돈가스’의 탄생에 이르는 과정이기도 했다. --- pp.12~13
이 책은 문명개화를 배경으로 한 양식 이야기다. ‘돈가스’나 ‘단팥빵’이 주인공인 양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돈가스나 단팥빵이라는 물건의 세계에만 집착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해서 단팥빵이 만들어지고 돈가스가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요리유신에 정열을 쏟으며 관여해왔는지를 얘기하고 싶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물건보다 사람이 중심이었던 이 시대 사람들을 되돌아보면서 현대의 진정한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 p.16
밀가루, 계란, 빵가루로 입힌 세 겹의 튀김옷이 뜨거운 기름과 고기를 격리시켜 육즙이 유출되는 것을 막고 육질을 부드럽게 유지한다. 그리고 빵가루에 적당히 스며든 기름이 풍미를 더해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그만이다. 양식의 왕자 돈가스의 탄생, 그리고 돈가스가 그 발상지 우에노上野와 아사쿠사淺草에서 전국으로 급속하게 퍼진 일이야말로 일본 서민이 서양요리를 소화하고 흡수했음을 나타내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 p.17
그러나 가축을 먹는 것은 기마민족의 습관으로, 고대 일본에는 없던 것을 ‘도래인’이 가져온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일본인에게 육식 금지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은 금지령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히려 불교의 융성과 함께 대두되기 시작한 도래인 세력을 음식 측면에서 억압하려고 한 정책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 p.36
같은 불교국가지만, 중국에서는 일본과 같은 육식금지령이 발포되지 않았다. 살생계가 사원을 중심으로 한 일부 신도들에 의해 지켜지긴 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소, 돼지, 말, 양, 닭, 물고기 등 뭐든지 먹었다. 다만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는 고기와 술을 삼갔다. 한반도에도 살생금지령이 있긴 했지만, 일본만큼 엄격하진 않았다. 쇠고기는 몽골의 침략 무렵에 부활해 조선시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 중국, 한반도는 각기 전혀 다른 육식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서양의 요리를 받아들이고, 나아가 독자적인 절충으로 ‘양식’을 만들어낸 것은 일본뿐이었다. --- pp.36~37
일본에서는 스키야키나 샤브샤브용으로 얇게 썬 고기가 가게 앞에 진열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외국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육고기가 공기에 노출되면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만 얇게 썬 고기가 생겨난 것일까. 일설에 따르면, 육식을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생선 먹는 식으로 변형한 것인데, 거기에는 얇게 썬 고기만이 갖는 독특한 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 p.60
두 사상의 차이에는 서구화를 철저하게 추구하는 육식장려론과 전통적인 쌀밥에 집착하는 쌀밥 우위론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도회파’와 ‘농촌파’의 차이였다. 도회파는 서양의 근대화를 뒤쫓아 따라잡기 위해서는 모든 점에서 서양을 따라 배워야 한다, 그러려면 논농사를 폐지해서라도 목축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촌파는 논농사가 목축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극단적인 서구화와 일본 전통에 대한 재평가 사이의 대립이었다. 실제로는 이것들을 절충한 화혼양재 사상이 일본의 근대화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민들은 본격적인 서양요리에 사로잡히지 않고 밥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일양절충의 ‘양식’을 만들어냈다. ‘돈가스’가 양식의 스타로 등장하고, 빵은 밥을 대체하는 대신 밥과 역할이 겹치지 않는 독특한 ‘단팥빵’의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먹을거리의 탄생은 일본 음식문화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생각할수록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 p.85
서양요리를 먹기 위해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려면 그야말로 결사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요코하마에 있는 ‘가이요테이’의 주인 오노 다니조大野谷藏는 개점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서양요리를 먹으러 온 손님들은 나이프와 포크로 입 안을 찔러 피투성이가 되는 악전고투를 벌이곤 했다. 고기조각을 나이프로 찍어서 함께 입 안에 넣고 씹다가 빼는 바람에 입술을 베어 피를 보는 일도 있었다. 또 수프를 마시는 법도 몰라서 접시를 손에 들고 된장국 마시듯 들이켰다가 가슴에서 무릎까지 온통 뜨거운 수프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핫토리 세이이치가 쓴 『도쿄 신번창기』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적혀 있다. “고기를 먹을 때는 왼손에 젓가락, 오른손에 나이프를 각각 쥐고 나이프로 고기를 잘라 젓가락으로 찍어서 먹는 진풍경도 있었다.”--- p.114
한편 빵은 16세기에 일본에 전해졌지만, 오랜 쇄국정책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 막부 말이 되면서 각 지방의 번은 앞을 다투어 군용 빵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코앞에 닥친 국방상의 필요 때문에 빵을 긴급식량으로 채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육해군이 정백미 과잉섭취로 생긴 각기병에 대한 대책으로 빵을 군사식량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상층부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빵은 서민들이 좀처럼 익숙해지기 어려운 외국음식이었다. 서민들은 오랫동안 밥을 주식으로 해왔기 때문에 음식문화가 너무 다른 빵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1874년 ‘단팥빵’이라는 전혀 새로운 음식이 만들어지자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전국을 제패하고 천황의 식탁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아래에서 위로 진행된 커다란 변화였다. --- p.150
에도 시대에 완성된 일본요리에서는, 밀가루는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재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단팥빵’과 ‘돈가스’의 탄생과 함께 밀가루는 요리의 주역으로 화려하게 거듭났다. ‘고로케’도, ‘카레라이스’도 밀가루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일양절충요리, 즉 ‘양식’은 한마디로 일본음식에 밀가루를 들여와 만든 요리인 셈이다. --- p.170
‘돈가스’의 이름에는 여러 설이 있다. 커틀릿에 사용하는 고기는 본래는 쇠고기, 닭고기였다. 그것이 돼지고기로 바뀌면서 ‘포크가쓰레쓰’, ‘돼지고기가쓰레쓰’라고 불렸다. 이 무렵 ‘돈豚가쓰레쓰’라는 이름이 요리책과 메뉴판에 곧잘 등장하는데, 아마도 ‘포크커틀릿→포크가쓰레쓰→돼지고기가쓰레쓰→돈가쓰레쓰→돈가쓰(돈가스)’로 변한 듯하다. --- p.202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