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체계를 달리하는 사실상의 두 국가가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일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사상과 이념이 거의 같은 미국의 경우도, 건국 전후부터 남북전쟁까지 주정부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연합 이념과 하나의 연방국가 사이에서 끊임없는 갈등이 있었다. 예멘의 경우 남북 국가연합은 결국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더욱이 한반도의 경우 국가연합에서 연방국가로의 전환은 이들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다른 어려움이 있다. 남과 북이라는 지역의 차이 이외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제도의 차이가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한쪽에 외국군(미군)이 주둔하는 특수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미군은 북한과 정전중의 적대적 관계에 있는데, 이러한 상태에서 국가연합이 되면 북한이 주한미군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국제법적으로 내정간섭이 된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연방과 연합의 본질적 차이는 지역이나 제도·사상·이념의 '차이 정도'가 아니라 하나의 나라인가 아닌가에 해당하며, 그 핵심은 외세(외국군)의 존재 여부와 직결된다. 여기서 연방과 연합의 문제는 다시 선두 조항인 1조의 민족자주와 직결되는 것이다. 연방제를 북한판 분단고착용이라는 파악이나 심지어 실질적으로는 남한의 흡수통일론이 된다는 오해는 이러한 맥락에 유의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 pp.99-100
때문에 오늘날 세계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표현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금융자본 주도의 세계경제에서 자본은 '광(光)속도로 이윤 사냥'에 나서고 있지만, 노동자와 시민들은 그러한 자유와 선택을 누리지 못하고 여전히 국민국가 단위에 묶여 있다. "독일의 국방장관 클라우스 튀퍼가 뻬이징을 방문했을 때 리펑 총리한테 '중국에서도 인권을 중시하는 정치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하였다. 이에 대해 리펑 총리는 '독일이 인권보호 차원에서 매년 1천만 내지 1천 500만의 중국인들을 좀 잘 먹고 잘 살 수 있게 받아 줄 수 있겠는가?' 되물었다. 걸작의 반문에 퇴퍼 장관은 말문을 잃었다."
이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EU국가들은 동유럽권 몰락 이후 쇄도하는 난민을 막기 위해 솅엔(Schengen)조약을 맺어 비EU국가에 대한 장벽을 더욱 높였고, 미국 또한 NAFTA 이후 멕시코인들의 월경을 방지하기 위해 국경감시를 강화하였다. 이렇듯 자본은 세계화되는 반면, 노동자는 국민국가의 벽 속에서 선택의 기회보다는 해고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국민국가간에도 심화되고 있다. 미소 냉전시기에는 그래도 제3세계를 체제의 동반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선진국의 원조와 후원이 있었다. 정치·군사적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란 이름의 경제 열전이 전개되면서 수출, 외채, 1인당 GDP 등에서 남북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미소냉전이라는 '제3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제 신자유주의의 국민국가 공략이라는 '제4차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마르코스의 선언은 매우 시사적이다.
--- pp.185-186
21세기 한반도는 과거 분단의 시간과 미래 통일의 시간이 착종하면서 구조조정기에 돌입할 것이다. 그런데 지난 6월의 평양회담이나 그 이후 김정일 위원장의 송이선물을 보고, 또는 현대 등 재벌의 북한진출을 보고, 통일은 대중의 문제가 아니라 고위층과 가진 자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복잡다단한 한반도 분단 문제와 그 해결과정에서 위와 아래의 고정적 구분은 대단히 비변증법적인 것이다. 무릇 불도저가 길을 닦고 나서야 차가 다니고, 삽으로 도랑을 만들고 나서 물이 흐르듯, 이른바 '고위층'이 닦았다고 하더라고 '길은 여전히 만인의 것'이다. 금강산관광만 해도 그렇다. 포럼 뒷자리에서 "재벌 현대가 금강산까지 장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노래방 하나 분양할 수 없는 온천을 운영해서 무슨 큰 이윤을 남길 수 없다. 재벌 현대가 금강산관광을 운영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분단을 보고 통일을 느끼고 간 사람들은 다수의 대중들이다. 남북합작의 경제사업이 양측 모두에게 이익이 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이 자본주의적 이윤의 일방적 확대보다는 민족경제라는 개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마찬가지로 2000년 평양회담이 남북 최고위층 간의 만남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결과물인 '6·15남북공동선언'은 남북 만인의 길이다. 앞으로 당국자회담과는 별개로 민간 차원의 정당·사회단체·개인의 교류와 협력이 점차 활성화될 것이다. 이러한 6·15남북공동선언의 활성화 단계를 경험하고 나면, 한반도는 평화통일을 위한 정치협상과 구조조정의 단계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생각이 이에 미치면 하나(One)와 둘(Two) 사이의 차이와 거리를 점검하며넛 조정하는 일은 지금 시작해도 결코 빠른 것이 아닐 것이다.
--- pp.2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