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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 양장, 개정판 ]
리뷰 총점8.0 리뷰 8건 | 판매지수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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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06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88쪽 | 830g | 148*210*30mm
ISBN13 9788971992494
ISBN10 8971992492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지난 2000년 출간된 이 책은 ‘한국전쟁’의 지배적 해석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비판서로, 국가의 공식적 기억이 아닌, 남북한 민중의 체험을 바탕으로 바라본 한국전쟁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또 전투가 아닌 정치 행위로서의 전쟁, 근대국가의 형성과 유지에 필수적이었던 원초적 국가 폭력으로서의 전쟁, 민중들의 적응 양태 등을 포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쟁의 경험과 기억을 보편적인 언어로 해석하고자 했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와 그 연원을 좀더 근본적이고 비판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인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조건들을 거시적인 역사적 안목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이 책은 출간 이후 주요 매체 및 기관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되었고, 2005년에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가 뽑은 ‘한국의 책 100’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독일어와 일어로 번역되고 있으며, 이번 한국어 개정판 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영어판이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고 초판 간행 시 시간적 제약 때문에 미비했던 점들을 대폭 보충했다. 별면 화보를 추가했고, 더불어 초판에 있었던 오류들도 상당 부분 바로잡았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1부 또 다른 전쟁
1.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전쟁 발발을 기념하는 국가 | 압제하는 앎과 예속된 앎 |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2. 왜 다시 한국전쟁인가? 3. 전쟁·국가·정치 정치의 연장과 과정으로서의 전쟁 | 국가 건설과 계급정치로서의 전쟁 4. 피란·점령·학살
2부 피란
1. 피란, 전쟁의 미시정치 2. 전쟁 발발 당시의 표정 한국군과 이승만: 허를 찔린 군대, 침착한 이승만 | 민중들 3. 위기 속의 국가와 국민 이승만과 국가 | 기로에 선 국민: 피란과 잔류 4. 정치적 책임과 한계 정치와 윤리: 무책임한 이승만 | 무책임의 배경: 주권의 부재 5. 맺음말
3부 점령
1. 뒤집어진 세상 2. 혁명으로서의 전쟁 인민정권 | 점령정책 3. 신이 된 국가 적과 우리 | 전시동원 4. 정복인가, 해방인가 5. 맺음말
4부 학살
1.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2. 학살의 실상 학살의 개념 | 학살의 유형 및 전개 3. 학살의 특징 학살의 장면들: 인간 사냥 | 비교의 관점에서 본 한국전쟁 시의 학살 4. 학살의 정치사회학 구조적인 배경: 국가 건설·혁명·내전의 삼중주 | 주체적 배경 5. 맺음말
5부 국가주의를 넘어서
1. 상처받은 반쪽 국가의 탄생 2.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피해자인 전쟁 3.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 4. 전쟁의 연장, 분단의 정치 5. 21세기에 바라보는 한국전쟁

저자 소개 (1명)

YES24 리뷰 YES24 리뷰 보이기/감추기

6·25와 한국전쟁은 동의어가 아닙니다
--- 김성광 (comma99@yes24.com)
2009-08-24
외국의 모든 학자들은 이 전쟁을 한국전쟁(Korean War)이라 부르고 있다. 그런데 왜 유독 남한에서만 한국전쟁이라 부르지 않고, 6·25라고 부르고 있는가? ...(중략)...

분명한 것은 한국전쟁에 관한 남한의 공식적인 인식과 국가가 국민들을 향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이 '6·25'라는 규정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바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에 의해 전쟁이 '기습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초래된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책임으로 귀착된다는 결론이 전제되어 있다. '6·25'라는 개념 규정 속에는 '상기하자 6·25, 무찌르자 공산당'의 구호에 집약된 것처럼 전쟁의 발발, 즉 전쟁 개시의 책임자가 누구인가, 누구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민족적 비극을 두고두고 되새김질하자는 문제의식이 강하게 깔려있다.그 결과 온 나라가 전쟁 개시일자인 6·25를 기념하고 있으며, 서울의 한복판 용산에는 '전쟁기념관'이 존재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인들은 전쟁이 개시된 날짜는 너무나 잘 알아도 휴전된 날짜는 알지 못한다. '6·25'라는 규정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한도에서는 1953년 7월 27일, 즉 휴전일이 설 자리는 거의 없었다.
--- 본문 중에서

오늘은 2009년 8월 24일. 7월 27일 휴전 기념일에 맞추어 읽었던 책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조금은 스스로가 게을러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50년이 넘게 남한사회에 영향을 미친 이 '숫자'가 글을 쓰는 지금이라고 그 영향을 거둬들였을 리는 없으니 그렇게 뜬금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라 믿어 본다.

이 책을 처음 만났던 때는 2000년. '6·25'라는 이름 대신 '한국전쟁'이라는 이름을 접할 기회가 조금씩 늘어가던 즈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2009년. 예전과 비해 6, 2, 5 이 세 숫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을 볼 기회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한국전쟁에 관한 인식의 전환을 상징하기보다는, '한국전쟁'이라는 주제 자체가 특별히 되새겨지지 않는 국면을 나타내는 것 같다. 결국 '6·25'로 상징되는 인식은 잠복-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상당히 불편한데, 여전히 한반도에 남한과 북한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인식은 북한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 지, 우리의 현대사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저자는 6월 25일이라는 ‘전쟁발발일’을 기념하는 것이 많은 것을 내포한다고 말한다. 전쟁의 ‘기원’ 혹은 ‘발발’이 아닌 발발‘일’을 기념하는 것은 ‘그날 누가 총을 먼저 쏘았느냐’를 주목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전쟁의 책임을 총을 먼저 쏜 자에게 묻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전쟁의 발발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해방정국에서 폭발한 민족적·계급적 모순의 해소요구와 좌우익간의 대립, 미소의 개입 등 수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또한 6월 25일 이전에 이미 남한과 북한 상호간에 부분적인 남침과 북침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났던 ‘준전시’ 상황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하며, 좌우익 간의 테러, 식민지 시기의 친일인사 들에 대한 테러, 미군정에 맞선 봉기와 유격전, 그리고 탄압과 토벌, 일부지역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학살 등 ‘사실상의 전쟁’ 상황이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승만이 ‘북진통일’을 줄기차게 외쳐왔고, 한국전쟁에 있어서 미국과 이승만이 ‘남침을 유도’한 측면에 대한 제기도 이뤄지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25일’만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은 전쟁을 북한의 책임으로만 떠넘기려는 시도이며, ‘적’을 명확히 함으로써 국가의 내적통합력을 높이려는-유지하려는 의도란 것이다. 즉, 발발일을 기억의 중심에 두는 것은 고도의 정치적 이해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야를 ‘발발일’에서 옮기고 보다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전쟁 기간에 있었던 일들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데, 이것은 단지 과거의 사실들을 ‘복원’하는데 머물지 않는다. 전쟁에 대한 기억왜곡('원수'로서의 북한을 상기하자는 주장)이 이후 남한에서 사상적 스펙트럼을 극도로 좁게 허용하고(좌파의 절멸, 우파의 독재),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손쉽게 제거하였던 억압적 현대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저자의 작업은 우리 현대사를 새롭게 그리기 위한 스케치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과거의) 복원을 넘어서는 새로운 설계인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 전쟁은 일방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는 일차원적 전쟁 영화가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할 때, 북한과의 관계설정에 대한 우리 사회의 합의가 도출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현대사에 대한 평가도 새롭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미 북한과 현대사에 대한 냉?시대의 인식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냉전시대의 인식이 왜 '반드시' 무너져야 하는지에 대한 흔들림 없는 근거를 우리들의 머리 속에 확실히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줄거리 줄거리 보이기/감추기

이 책은 ‘피난’, ‘점령’, ‘학살’이라는 세 과정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체험을 재구성하며 그에 따른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먼저 ‘피난’에서는 주로 국가, 이승만과 지배층, 민중들이 각각 전쟁을 어떻게 맞이하였으며,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한국전쟁의 성격을 살펴보고, 나아가 전쟁 속에서 국가와 국민은 무엇인지 묻는다.
이승만을 비롯한 정치 지배 엘리트층과 일반 민중들 모두 (물론 서로 다른 이유로)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지 않았다. 저자는 그 이유를 분석함으로써 피난 과정에서 보이는 국민들의 행동 양태를 기존의 공식화된 인식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지배자 중심의 전쟁 인식에서 피난은 ‘공산주의를 피하기 위한 행동’으로 단순화되었으며, 그래서 피난 여부는 ‘반공’의 표식이 되었다. 하지만 저자는 전쟁 발발 직후의 정치적 피난과 1·4 후퇴를 따라 혹은 미군의 폭격을 피해 움직이던 생존을 위한 피난, 두 가지를 구분한다. 또 모든 피난 과정에서 철저하게 무책임성을 보인 국가와 이승만의 행동 양태를 분석하며 지배층의 무책임의 정치가 오늘의 정치 현실에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다음으로 ‘점령’에서는 북한 인민군의 남한 점령과 동원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8·15 이후 남북한에서의 혁명과 반혁명, 국가 건설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이 어떻게 전쟁과 연관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특히 여기서는 북한의 점령 시기와 유엔군의 남한 수복 시기의 정치적 측면이 어떤 차이와 유사성을 보이는지 비교해 본다.
구체적으로 국민 또는 인민의 국가로의 편입 과정을 살펴보고 있는데, 북한은 주로 일제강점기 친일의 경력을 고려하였으나 남한은 인민군 점령하의 부역 사실만을 중점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한편 북한은 ‘적’으로 분류된 사람에 대해 즉각적인 처형이나 납치의 방법을 택하였으나 남한은 형식적으로라도 법적 절차를 거쳐 국민으로서의 승인 여부를 결정하였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적인 갈등과 증오, 보복이 전시체제하의 모든 정책을 압도하였고, 혁명을 기치를 내건 전쟁 역시 혼란과 공포의 전쟁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과정 속에서 국가가 신격화되는 과정, 반공이나 사회주의가 객관화된 정치 이념이 아닌 신앙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학살’에서는 국가가 전쟁 과정, 즉 ‘적’과의 전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으로 돌변하거나 ‘적’의 지지 세력이 될 수 있는 주민들을 어떻게 취급하였는지 살펴봄으로써 전쟁이 민간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추론한다. 특히 학살의 개념과 유형을 비교 고찰하면서 단순한 사실 발굴의 차원이 아닌 학살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저자는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을 국가기구에 의한 작전으로서의 학살과 사법적 처리 과정에서 발생하는 처형으로서의 학살, 그리고 사실상 국가의 묵인하에 이루어진 사적인 보복으로서의 학살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학살을 가능하게 했던 구조적 배경과 주체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일본의 난징 학살, 베트남전의 학살 등과 한국전쟁을 비교 분석한다. 특히 학살의 구조적 배경에는 국가 건설의 과정이자 혁명의 과정, 그리고 내전의 과정으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한국전쟁의 특수성이 깔려 있음을 지적한다. 인적 배경으로는 취약한 권력기반에서 비롯된 국가의 반공주의 콤플렉스,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온 군대와 경찰의 반민중성·상명하복의 정신, 전통사회에서 유지되어 온 반역의 담론 등을 살펴본다.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전쟁과 사회』 초판이 출간될 2000년 당시 국내 학계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들도 정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국내 학자들의 연구는 특정 주제(전쟁의 발발과 그에 대한 책임규명의 문제)에 한해, 냉전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이를 두고 저자는 한국의 젊은 역사연구자들이 한국 현대사 최대의 난제인 한국전쟁을 피하려 하는 것이 아닌가 비판하기도 했는데, 그후 이러한 비판에 답하기라도 하듯, 많은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연구 성과를 풍부하게 제출했다.
가령 박명림, 정병준 등의 학자들이 새로이 발굴된 관련 자료들을 꼼꼼히 정리해 당시의 사실들을 객관적으로 구성해내려는 방대한 저작들을 출간했고, 해방전후사에 꾸준한 관심을 보였던 소장 연구자들 기광서, 도진순, 이완범, 정용욱 등이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을 다루기 시작했다. 탄탄한 사료구성이나 치밀한 분석이 돋보이는 대작들도 나오고, 또 반공주의적 관점이 지배하던 학계에 평화나 인권의 관점을 도입한 연구도 나온 것이다. 또 학살 문제에 대해서도 방선주, 유영익, 이채진, 양영조, 전상인 최형식 등이 중요한 저서 및 논문을 발표했고, 나아가 구술청취와 생활사, 지역사 등 인류학적 조사방법론을 동원한 연구들도 ‘한국전쟁’ 연구에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김기진의 학살관련자료집이나 권귀숙, 김귀옥 등의 작업은 이러한 새로운 관심을 잘 보여주는 성과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화려한 연구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 관한 전반적 시각은 객관성이라는 순수학술적 포장 아래 오히려 보수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는 구소련·중국 측의 배후 개입을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의 발굴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공개된 자료 자체의 불균형·비대칭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비판적 안목이라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전쟁 개입 과정, 전쟁 발발 전후 미 정보기관의 활동 등에 관한 핵심적인 자료들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고, 붕괴된 구사회주의권의 자료들만이 공개되어 있을 뿐인데, 그 조건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냉전 이후 미국의 신패권주의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수 있다고 예리하게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개정판 『전쟁과 사회』는 다시 한 번 현재의 학술적 흐름을 성찰하고 ‘한국전쟁’에 관한 논의의 틀을 점검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회적 변화 역시 학술적 변화에 못지않았다. 인구 구성에서 전쟁세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고 그 상처가 희미해짐에 따라 냉전적 시각·반공주의적 시각만이 천편일률적으로 지배하던 사회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뿐만 아니라 ‘학살’의 진상을 비롯한 전쟁의 실체에 접근하고자 하는 열망이 조금씩 현실화되었고, 공식적 영역에서조차 그러한 과거사 청산이 주요 의제로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전쟁과 사회』는 출간 이후 꾸준히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고 논의를 이끌어냄으로써, 그 자체가 이러한 사회의 변화에 일조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통일전쟁’이라고 지칭했다가 구속·해고된 강정구 교수 사건이나 인천에서 일부 단체가 맥아더 동상을 철거하려다 발생한 충돌 등 한국 사회에서 ‘한국전쟁’은 여전히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다. 앞으로 한반도 평화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더 많은 논란과 충돌의 전개될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다시, 논의의 중심에 (당연히 단일하기보다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하지만 미국인·일본인의 관점과는 분명히 다른) 남북 코리언들의 관점을 놓아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특히 무엇보다, 평화라는 관점에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국제전으로서의 한국전쟁을 야기한 지구정치적적 요소들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아니 오히려 재편·강화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때문에 저자는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베트남전쟁이 그러한 방식으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베트남전쟁이 다르게 전개되었다면 오늘의 미국과 세계도 다른 상황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한국전쟁의 비극적 교훈이 전후의 미국인 및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확실히 인식되었다면 지금 이라크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희생자들이 발생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이라크·레바논에서 벌어지고 있는 평화에 대한 위협들, 그것의 지구정치적 함의를 읽기 위해서는 한국전쟁을 정치사회학적으로 다시 읽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이 책의 역할은 6년 전에 비해 결코 줄지 않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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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주간우수작 지금의 한국사회를 이해하게 해 주는 교과서-한국전쟁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나무향기 | 2016.03.04 | 추천2 | 댓글0 리뷰제목
  헬조선. 한 나라의 국민들이 자신의 나라를 부르는 데 이토록 처참한 표현을 사용하는 나라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이 나라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라는 물음이 끊이지 않는 요즘의 현실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나라를 지옥과 같은 상황으로 이끌어 온 사건들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어찌보면 한국전쟁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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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헬조선. 한 나라의 국민들이 자신의 나라를 부르는 데 이토록 처참한 표현을 사용하는 나라는 흔치 않을 것 같다. ‘이 나라는 도대체 왜 이 모양이지?’ 라는 물음이 끊이지 않는 요즘의 현실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나라를 지옥과 같은 상황으로 이끌어 온 사건들을 찾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마주하게 되는 것이 한국전쟁이다. 어찌보면 한국전쟁이라는 말도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반공주의 교육체제 하에서 교육받아온 한국인들은 대체로 한국전쟁이라는 말보다는 6.25가 친근할 것이다. 이 표현은 주로 전쟁의 시작에 초점을 맞추고 그 책임이 온전히 북한에 있다는 것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는 전쟁이 시작된 국내/국외적 배경이나 원인, 그리고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 있었던 사건 및 전쟁의 결과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표현이다. 이 책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을 반공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벗어나 인권의 측면에서 다시 조명해 보여줌으로써 지금의 한국사회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한국전쟁을 현대 한국사회를 형성시킨 주된 원인으로 보고 한국전쟁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전쟁을 재해석하려고 했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김동춘 교수는 한국의 국가권력과 정치집단의 구조적인 무책임을 밝히고 있으며, 만성적 안보위기상황 하에서의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위축과 구조화된 국가폭력, 약자 배재의 체제를 여러 사료들을 제시하며 설득력있게 서술하고 있다. 기존의 한국전쟁 연구서들과는 달리 전쟁기간 중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부각시키고 이것이 이후 한국의 만성적 국가 폭력과 인권 침해로 이어져 왔는지를 지적하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5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대결, 냉전체제 형성기의 국제정치, 미국의 국내정치, 소련과 중국의 상호관게, 북한의 국내정치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즉 우리는 아직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해 조금은 바로 알기 위해 저자는 몇 가지 전제를 확실히 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먼저 1950년 당시 미국과 소련 간의 힘이 대등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북한의 공격을 공산주의 진영이 자유세계를 위협했다는 주장은 선전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니다. 두 번째로 미국은 한국전쟁을 충분히 예상했고, 전쟁 발발 직후에도 소련, 중국과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냈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로 한국전쟁은 식민지 시절의 굴욕적 체험과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남북한 한국인들이 갖게 된 분노와 열망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민족주의에 기초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한, 사실 남북한을 둘러싸고 있던 국가들은 전쟁의 승패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음을 인정해야 한국전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김동춘 교수의 결론은 자신이 서문에서 쓴 것처럼 상식적이지만 확실하다. 즉, “한국전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 정치, 한국 경제, 한국 사회, 한국의 법과 사회심리, 이데올로기 등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남북한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면 ‘북한을 응징해야 한다’는 호전적 주장이 나라 전체를 압도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과거 군사독재 정권들은 차치하고서라도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요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또한 전쟁을 통해 한국 사회 민중들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생존을 위한 기회주의가 몸에 배어버렸다. 전쟁 이후엔 거의 모든 정권에서 안보위기와 군사적 대립을 내부 사회 통제의 자원으로 활용한 병영국가가 되었다. 사실 오늘날 한국의 국가와 사회는 멀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체제와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형성된 전쟁 수행의 체제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슬프게도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본 경험이 없이 지난 반세기를 흘려보내 버렸다.


  전쟁 과정 중 피난의 경험은 권력자와 민중들 모두를 질서나 규칙 속에 살아가기보다는 당장의 이익추구와 목숨 보존에 여념이 없게 만들었다. 저자는 버스에 먼저 타기 위해 밀치며 다투고, 차를 앞질러 가기 위해 경적을 오란하게 울려 대며 상대방 차를 향해 상소리를 내뱉는 오늘날의 남한 사람들의 행동을 50년 전 전쟁 때 피난 가던 사람들의 행동과 비유하고 있는데, 어느 정도는 그 당시의 상황이 여전히 연장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은 그 어떤 것보다 우위에 있는 가치가 아닐까 생각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헬조선, 각자도생 등의 표현은 이와 같은 전쟁 상황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60여년 전 한국전쟁 시에 국민들은 사실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2016년 현재에도 대다수의 국민들은 국가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국가권력의 무책임과 민중들의 살아남아야 한다는 열망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사회를 비정상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전선이 남북으로 이동하면서 이루어진 점령의 정치는 억압과 감시체제를 일상화시켰다. 이 때에는 또한 사적인 갈등과 증오가 법의 집행 혹은 공권력 행사를 압도하였다. 전쟁은 적과 나라는 이분법을 강요했다. 특히 박근혜와 새누리당이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최근에 이러한 모습이 데자뷰처럼 겹쳐진다. 저자의 지적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한국전쟁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깊이 통감한다. 전쟁 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동족 간의 그리고 국가기관인 군대에 의해 의도되고 조직된 학살은 우리 사회에 지금까지도 엄청난 트라우마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전쟁 시기에 이루어진 학살의 조직적 은폐와 합리화는 4.19혁명, 5.18광주민주화 운동에서와 같이 이후에 벌어진 비극적 사건들에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청산이 없었기에 우리 사회에는 전쟁과도 같은 비극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체 국민들이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로 3년 간의 전투는 일단 종료되었으나 전쟁은 종료되지 않았다.” 이 휴전 체제는 우리 사회에 군사적, 정치적 대결체제를 일상화시켰다.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남북한의 민중들과, 말단 병사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생을 이어왔다. 이들의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전쟁기간 동안에 권력자들이 보여 줬던 무책임의 정치는 2016년 현재에도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사회는 멀게는 일제식민지 시절부터 가깝게는 한국전쟁 시기에 이르기까지 미완의 국가, 즉 자율성 혹은 독립성을 갖추지 못했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남한의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도 자율성 부재의 연장선 상에 놓여있다고 보여진다. 전쟁이 내재화되어 버린 이 사회를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사회로 바꿔갈 수 있을까? 피상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어 무척이나 두려울 수 있는 자율성의 회복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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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전쟁과 사회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죠르바 | 2015.11.04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전쟁과 사회를 읽은 후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쟁과 사회 김동춘 지음 / 돌베개   1부. 또다른 전쟁   1.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66)6.25라는 명칭에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평화로운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이 낳은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전쟁을 도발한 국제공산주의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책임이라
리뷰제목

전쟁과 사회를 읽은 후 힘주어 말하는 부분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

 

전쟁과 사회

김동춘 지음 / 돌베개

 

1. 또다른 전쟁

 

1.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66)6.25라는 명칭에는 1950625일 북한이 평화로운 남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는 점, 그리고 전쟁이 낳은 모든 불행과 고통은 전쟁을 도발한 국제공산주의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책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73)남한의 정치세력과 지식인들이 미국의 냉전적 시각만을 고집하거나 남측의 공식적 전쟁 해석을 건드리지 않은 채 그 물질적 성공을 자랑하며 통일의 주도권을 쥔다면, 결코 북한 주민들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지지와 동의를 이끌어 내지는 못할 것이다.

2. 왜 다시 한국전쟁인가?

(96)현대 한국의 정신적 지도자 중 한사람인 함석헌은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은 직후 이미 그것을 좌우의 충돌로 보지 않고 국가주의의 충돌로 본 매우 드문 선각자였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인을 그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이 없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대적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러므로 국가주의가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38선의 비극은 멸망해 가는 국가주의의 고민이다. 남북 분열의 책임은 국가주의에 있다.”

 

3. 전쟁·국가·정치

(102)결국 한국전쟁은 19458월 이후 전개되었던 정치갈등의 대단원인 동시에 1953년 이후 한국의 국가, 즉 한국 정치사회의 출발점이 되고, 미국과 소련의 이후 반세기 동안의 냉전적 대결체제의 기원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04)한국의 근대국가와 근대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한반도에서 분단국가의 수립을 조건지은 미·소의 38선 분할점령과 점령군에 의해 추진된 남북한 단독정부, 미국 혹은 소련과의 군사·정치·경제적 관계, 적대적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한 귀결로서 3년간의 한국 전쟁이다.

(104)결국 오늘날 한국의 국가와 사회는 멀리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체제와 미군정, 그리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 형성된 전쟁 수행의 체제에 기원을 둔다고 볼 수 있다.

(107)일제강점기 이후 계속되었던 국가 형성을 둘러싼 정치세력 간 투쟁의 연장으로서 내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을 북한의 침략전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107)한국전쟁이 적대하는 두 국가 간 전쟁의 측면 외에, 베트남전쟁이 그러하였듯 탈식민 이후 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전쟁, 스스로 국가임을 선포한정치세력들 간의 내전으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108)한국전쟁이 위기에 처한 이승만 정부와 대한민국을 구출하여 그 권력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성공이 장기적으로 억압과 통제를 위주로 하는 군사형 사회, 국가예산의 30% 이상을 군비로 지출하는 경제, 그리고 외국군이 상시 주둔하고 그들이 국군의 작전권을 소유 한 외세 의존 상태를 야기했다는 측면을 함께 보아야 한다.

(110)자연발생적인 권력투쟁과 계급갈등은 이미 8·15해방 직후부터 분출되어 나왔고, 한국전쟁은 그 갈등이 전면전이라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11)절반의 국가가 나머지 절반인 북한과 전쟁에 돌입하였다는 말은 이 전쟁이 양 국가를 세운 실절적 주역인 미국과 소련의 전쟁이었음을 의미한다.

(111)한국의 국가 형성과 한국전쟁을,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체제하의 반공블럭 구축의 일환으로, 38선 이남에서 계속되었던 계급갈등의 연장으로 볼 때 우리는 한국전쟁 중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4. 피란·점령·학살

(114)이 모든 과정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외세,국가,계급,국민이다.

 

2. 피란

 

1. 피란, 전쟁의 미시정치

(121)피란 행동은 전쟁 이후 남한 사람들의 정치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21)피난사회에서는 모두 떠날 준비를 하고, 모두가 피란지에서 만난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며, 권력자와 민중들 모두 어떤 질서와 규칙속에 살아가기 보다는 당장의 이익추구와 목숨 보존에 여념이 없다.

 

2. 전쟁 발발 당시의 표정

(125)3월에서 5월 사이의 공비 토벌 과정에서 전면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였으나 육군본부에서는 이를 무시했다. 그리고 6·25 발발 불과 2주 전에 중앙 요직을 포함한 사단장과 연대장급의 대규모 인사이동이 있었으며, 613일에서 20일 사이에는 전후방부대의 대규모 교체가 있었다.

(127)긴급 각료회의는 전쟁이 발발한 지 열 시간이 지난 오후 2시에나 열렸다고 하며, 이 자리에서는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에 연락하는 일, 미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일, 등화관제를 실시하는 일만 결정되었다고 한다. 대체로 경무대는 그 자식들 장나치다 그만두겠지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127)중요한 것은 이승만이 아무런 준비없이 전쟁을 맞았으며, 자기 목숨이 위태롭고 국가가 붕괴할 수도 있는 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128)국군과 국민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이승만과 각료들은 전쟁 발발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129)우선 여러자료를 종합해 보면 미국이 북한군의 전쟁 준비, 심지어 개전일까지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34)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던 당시 조건 속에서 이승만의 실각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135)이승만은 분명히 전쟁발발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으나, 5월 중순 이후 6주 동안 침묵하였고, 막상 전쟁 소식을 들은 25일 당일에는 그다지 허둥대지 않았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침략을 당하면 캘리포니아를 방어하듯이 한국을 지킬 것이다. 라는 맥아더의 약속, 전쟁발발 직전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당신들은 외롭지 않다라고 방위 약속을 했던 미국무부 고문 덜레스의 말을 철석같이 신뢰했다면, 또 우발적으로 소련과 북한의 무모한 시도로 한반도에서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을 북진통일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으며, 이러한 위기가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면 이승만으로서는 그 위기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국가는 위기에 처하더라도 5·30선거 이후 궁지에 몰린 이승만 개인에게는 전쟁 발발과 적과의 대결이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145)6·25가 발발했을 때 이들은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으며 오직 남북의 양 정권과 그 하수인들로부터 또다시 어떤 시달림을 받을 것인가 걱정할 따름이었다. 교육받지 못한 보통의 남한 주민들은 정세를 읽고 미국의 개입을 판단하기 보다는 조상들에게 배운 피난의 철학을 교훈 삼았다. 그리하여 전쟁이 발생하자 그들은 어떻게 숨을 것인가, 어떻게 징집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걱정하였다.

 

3. 위기 속의 국가와 국민

(148)이승만에게는 대한민국의 안보를 실질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미국만이 주요한 대화 상대였다.

(149)전쟁발발 직후 국가가 국민들에게 보인 대책 중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되는 것은 이승만의 수족이었다고 평가되는 국방부장관 신성모와 육군참모총장 채병덕의 낙관적인 보고와 27일 밤 10시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국민앞에 나선 이승만의 연설 방송, 그리고 28일 새벽 230분경 한강다리 폭파였다.

(151)사실 대한민국의 일부 지배층, 충성스러운 구성원과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를 배신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이승만 자신이었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전쟁이 발생하기 적전까지 이승만은 미국에 원조요청을 하거나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등 미국의 지원에 기대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어 준비도 하지 않았다.

(152)교량의 조기 폭파로 3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후송하지 못했으며, 국군 98,000명 중 한강을 건너온 장병은 24,000명뿐이었다. 육군본부의 후퇴작전은 국군을 온전히 인민군에게 바치려는 계획처럼 보였다.

(154)최창식 공병감의 미군 측 고문이었던 크로포드 육군소령은 당시 폭파를 지시한 사람은 미군장교 였고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하였다.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서 실질적으로 한국군을 지휘하였던 사람은 바로 하우스먼이었다.

(155)대한민국의 책임지들은 오직 미국이 온다. 맥아더가 있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알리면서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56)이미 한국의 상당수 지배층은 전쟁 직전에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는 방법으로 피란을 시켰고 이중 일부는 전쟁 중에도 유학을 보냈다.

(159)국가부재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인민군과 국군 가운데 어느 쪽에 징집되더라도 그것이 떳떳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저 도망가서 일신의 삶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160)1950.6.28. 서울 후퇴./1950.9.28. 서울수복

(163)6·25 직후의 ‘1차 피란은 분명 정치적·계급적성격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65)결국 피란을 갈 수 있었지만 서울에 잔류한 정치가나 군인 등 당시의 엘리트증은 주로 이승만 정권과 거리를 두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다수의 중도적 지식인들은 미처 피란할 시간이 없었기도 하지만 대체로 서울에 잔류하였다. 김성칠 교수, 김재준 목사, 이화여대 교수 김태길

(167)잔류한 사람들은 대체로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영업자, 중소기업가, 지식인 등 중간층에 속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68)그들의 잔류에는 이승만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국민 혹은 민중에 대한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등이 깔려 있었다.

(170)우선 한국전쟁 전 시기에 걸쳐서 인민군의 남하를 피해 피란한 정치적 피란보다 미군의 폭격을 피해 피란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충북 영동의 노근리양민학살사건과 경북의 왜관교폭파사건

(171)이 경우의 피란은 전선이 이동함으로써 통치세력이 교체되자 그 상황에서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대안이었다.

(173)미국과 대한민국에 협력했던 북한 주민들이 중공군의 투입으로 미국이 패퇴하자 생존을 위해 월남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4. 정치적 책임과 한계

(177)이승만의 무책임성이 북한의 공격이 초반에 성공하여 수많은 목숨을 희생시킨 환경을 만들었다는 말이 된다.

(178)대한민국의 국가 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북한의 침략주의이며, 그것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미국의 지원 외에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178)‘국가를 지켜내는 것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사이의 괴리가 발생한다.

(179)이승만은 전면전 발발 후 정부가 성급하게 후퇴하고 한강다리를 폭파함으로써 이 아닌 국군과 무고한 피란민을 희생시킨 데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지지 않았으며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179)이승만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수반으로서 국민에게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상 전쟁’·‘국가안보라는 명분하에 법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현대판 군주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180)1951년 피란지 부산에서 발생한 정치파동은 사실 분단 이후 수도 없이 반복되어 온, 전쟁 상황과 국가안보를 빌미로 권력을 강화해 온 관행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다. 한편, ‘책임정치의 부재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희생양의 정치를 낳는다. 한강다리 조기 폭파에 대한 책임도 국방부장관이나 대통령이 진 것이 아니라 말단 집행자인 최창식 대령이 졌다.

(188)1948824일 이승만과 주한미군사령관인 하지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작전협정때문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이승만 정부는 사실상 국가의 가장 일차적인 기능인 안보와 국민의 안전 및 생존의 보장에 대해 책임질 수 없는 국가였다.

(191)결국 이승만은 미국의 개입에 대해서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승만은 전면전이 임박했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공개적으로 거론하기보다는 사실상 체념 반, 기대 반으로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193)이승만은 이미 해방 직후부터 미국의 절대적 지원이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데나 자신의 권력 장악에 가장 중요한 힘이라는 점을 알고서 그 방향으로 일관되게 매진하였다. 그는 양 강대국이 주도하는 냉전적 대립 상황에서 무형의 국민의 지지나 지원보다는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지원, 즉 미국의 핵심 권력층이 한국을 한 몸으로 생각하는지의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193)반공주의적 자유주의를 이념으로하는 국가 건설의 책임이 미국에 있으니 방위의 책임 역시 미국에 있다는 지극히 당연한 논리였다.

(195)그에게 중요한 것은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었고 국내 지지가 아니라 외교였다. 그는 전쟁 수행 과정에서 국민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고, 설사 고려했다 하더라도 미국의 지원을 얻어 내기 위한 시위 정도로만 국한시켰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러했지만 이승만에게 국민은 없었다.

 

5. 맺음말

(199)전자는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 냉전질서 속에서 한국전쟁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를 어느 정도 예상했기 때문인 데 반해, 후자는 북한과 인민군이 내려와도 자신의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토지개혁 등 북한에서 홀러온 소문대로 더 좋아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2)피란은 국가가 더 이상 보호자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민중들이 제 살길을 찾는 것이다. 이때 국가가 무책임한 모습을 보일 경우 제 살길을 찾기 위한 민중들의 이기주의적 행동은 더욱 억척스러워진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만연되면 피난사회가 되는 것이다.

 

 

 

3. 점령

1. 뒤집어진 세상

(205)전쟁 당사자인 남북한 모두 민족을 외세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민족주의 구호로 전쟁 수행과 점령을 정당화 하였다.

(206)휴전 이후 이승만 정권이 위기에서 벗어난 것과 5·16쿠데타와 군사정권의 등장은 모두 전쟁 당시 북한통치 시설의 부정적 기억이 반사적으로 결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 혁명으로서의 전쟁

(217)북한의 민주개혁이 이미 근로인민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사회주의 지향성을 출발부터 명백히 견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219)도덕주의적인 정서, 인격화된 국가는 정치적 반대자와의 갈등을 더 치열하고 감정적으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적대세력 처벌과정에서의 잔인함으로 연결된다.

(221)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북한이 시작한 한국전쟁이 바로 북한식 민주개혁’, 그중에서도 토지개혁의 전면화를 위한 것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223)북한은 남한의 점령정책에서 고용농과 빈농을 혁명역량으로 하고 중농을 쟁취하여 동맹하였으며, 부통을 중립화시키고 지주를 철저히 청산하는정책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3. 신이 된 국가

(231)북한은 한국전쟁 이전에 그러하였듯이 점령 시에는 친일·친미·반공활동을 한 사람들을 으로 취급하였는데, 이것은 역으로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왜 그렇게 반공·반북 전선에 앞장서게 되었는가를 설명해 준다.

(239)김일성은 불순한 요소의 척결과 당의 순결성을 대단히 강조하였는데 순결성이라는 것은 반대파를 용납하지 못하는 태도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곧 종교적 근본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종교에서나 정치에서나 과도한 순수주의는 에 대한 폭력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241)서울이 수복되자 마자 정복자처럼 서울에 입성하여 서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국민이지 적과 내통한 자인지 심사하자는 적반하장의 자세를 취하였다. 결국 9·28서울 수복 후 서울에서는 북한에서 월남한 자와 피란을 간 자만이 공산주의에 반대했다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신분증명서를 갖는 셈이었다.

(242)·경과 청년단원들 및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사사로운 원한이나 감정으로 권력을 남용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243)이승만 정부는 마녀사냥식의 대대적인 부역자 색출 작업을 즐기고 있었다.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잔류파와 잔류 국민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244)이승만은 부산 정치파동에서 국회에 보복의 칼을 들이대었다.

(246)수복 후 무차별적인 처벌이 이승만 정권의 국제적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과 유엔한국위원단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249)전쟁은 국인을 지배자의 지위로 승격시키고 행정을 군대에 종속시킨다.

(251)CIA 측은 서울 학생의 절반 이상이 대거 북한군에 입대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된 측면이 있지만, 과거 이승만 정권이 얼마나 남한 민중들로부터 지지받지 못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255)6·25 발발 후 이승만 정권이 인적·물적 자원의 동원 과정에서 저지른 가장 큰 사건은 국민방위군사건이었다. 17세 이상 40세 미만의 장정을 국민방위군에 펀입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시점에 서울과 지방에서 국군이 후퇴작전을 펴자 각 지역에서 징집된 방위군도 자연히 후방으로 이송해야 했다. 그런데 이송 도중이나 후방 도착 시 장정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간부들이 많은 돈을 착복하여 방위군에 대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수많은 방위군이 질병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포로도 아닌 국군으로 징집 된 그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거의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죽어갔다.

(257)전쟁 시의 국가는 개인의 정신세계와 생명에 대한 애착까지 짓이기면서 자신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무서운 신이었다. 그것은 분노한 신이었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신이었다. 전쟁이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정복인가, 해방인가

(261)극심한 빈곤과 피비린내 나는 억압에 익숙하고 폭력으로 순종을 강요당해 온 민중들은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과는 조금 다르게 공산주의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264)전쟁 상황에서 인민의 지배는 실질적으로 공명심을 앞세우거나 생존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일을 불사하는 인간 등 인민을 가장한 불량배와 가장 악질적인 인간이 영웅이 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군 치하이건 인민군 치하이건 마찬가지다.

(265)붉은 완장을 찬 청년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으나 원시적인 보복심과 증오감만을 가진 불량배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266)전쟁에 대해 민중들은 중간층적 지식인과는 달리 체제의 이념과 정책에 대해 이성적으로 판단해 인식하지는 않았다. 즉 민중들에게는 어는 정권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줄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이들이 가장 고통을 느낀 것은 대한민국 혹은 인민공화국이라는 두 정권 그자체가 아니라, 전선이 이동하면서 세상이 완전히 바뀔 때마다 어떻게 적응해야 하느지 판단하고 또 그러기 위해 그때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가각 어느 편에 서는지를 식별해 내는 일이었다.

(268)해방 당시만 하더라도 생활수준이 상대적으로 비슷했고 내부의 계급갈등도 별로 크지 않았으며 기독교인과 엘리트등이 많았던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반대로 지주와 소작인 간의 갈등이 컸고 사회주의 성향도 상대적으로 강했던 남한 지역에 미군이 진주한 것이 갈등을 훨씬 증폭시키는 구조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69)점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유교적 기준, 즉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하며 앞뒤가 맞아야 하며 사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기준과 점령정책이 배치되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5. 맺음말

(271)한국전쟁 당시 남북한 양측에 의한 상호 점령은 전쟁의 산물이었지만,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분명 일제 잔재의 청산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변혁의 요구가 출발점이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72)김일성 정권 치하이건 이승만 정권 치하이건 사적인갈등과 증오가 법의 집행 혹은 공권력 행사를 압도하였다.

(274)조국해방과 통일을 달성하기 위한 북한의 호전성이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의 극우정권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역설적인 효과를 가져왔다는 의미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국가의 상대적 안정성과 정권의 불안정성의 공존은 여기서 출발한다.

 

4. 학살

1. 조직적 은폐, 강요된 망각

(280)국가는 이들을 세 번 죽인 셈이다. 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이 첫 번째이고, 19615,16쿠데타 후 진상규명 요구를 탄압한 거싱 두 번째이며, 유가족과 자식들을 모두 빨갱이로 취급하여 1980년까지 이들을 연좌제로 묶고 마치 상종 못할 문둥이 취급한 것이 세 번째이다.

(281)북한에 의한 전면전의 시작은 남북한 국가 간의 안정된 관계 속에서 돌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이미 1945815일 해방의 시점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정치갈등이 가장 치열하고 극적인 형태로 발발한 것이다.

(282)19506·25 이전 한반도의남북에서 이미 저질러지고 있던 좌·우익 간의 유혈 충돌이 이제는 공식적인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음울한 신호탄이었다.

(283)학살의 관점에서 보면 한국전쟁은 이미 1950625일 이전부터 시작되어 전쟁 발발을 계기로 극적으로 발전해 절정에 이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84)한국전쟁기 학살 사실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19604·19혁명과 1980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도 그와 유사한 민간인 학살이 반복되었다.

 

2. 학살의 실상

(287)대량학살이란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가권력 및 그와 연관된 권력체가 정치적 이유에 의해 자신과 적대하는 비무장 민간인 집단을 일방적이고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것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289)한국에서 1946년에서 1950년에 이르는 과정은 국가의 형성기, 무력기구의 중앙집중과 국가독점화과정이었다. 그것은 사설 폭력조직이 국가기관화되는 과정이었다.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 등 극우청년조직이 경찰과 군대의 일부가 되어, 그때부터 경찰과 군대가 유일하게 합법적인 폭력조직으로 변하였다.

(294)1948년 제주4·3사건,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 해안선에서 5km 이상 떨어진 지역을 무조건 적성지역으로 지정하여 초토화작전을 감행하였다. 토벌군은 게릴라들의 피난처와 물자공급원을 제거한다는 목적으로 100여곳의 중산간마을을 모두 불태웠으며, 노인에서 젖먹이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주민들을 살해했다. 학살당한 사람은 모두 3만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각처의 진압군은 정규 반란군뿐만 아니라 사실상 전체 시민을 진압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초토화작전을 감행했다. 전 읍면을 학교 또는 공공시설에 모아 놓고 집안배경, 외목, 혹은 우익 인사들의 지목에만 의존하여 심사하였고 의심스러운 자들을 그 자리에서 타살·총살하거나 군·경에 이첩시켰다.

(304)전향한 좌익으로 구성된 국민보도연맹은 일제 말기 사상범 및 전향자 관리를 위해 결성된 대화숙,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 수립 이후 반체제 사상범·전향자에 대한 선도 방안으로 오제도에 의해 고안되어 1949421일 결성되었다. 정권 주도로 이루어졌다. 대구·경북·경남 지역에서는 이미 1949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503~4월 무렵에도 처형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그것을 전면화·전국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306)상당수는 사상과 이념은 물론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반 민간인들이었다. 특히 전쟁 전에 좌익단체에 가담한 적이 없었던 사람들도 비료를 타기 위해 혹은 정부에 잘못 보이지 않기 위해 가입하였다.

(308)국민보도연맹사건은 한국전쟁 중 최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이었다.

(309)대한민국과 이승만은 국민들을 사실상 인민군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로 내몰았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인민군과 빨치산의 협력 요구 역시 이들 민간인들을 처벌로 내몰았다. 양국가와 그 대리자인 군과 경찰은 사실상 무섭고 보복적인 신이었다.

(309)이들에게 국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농사는 전쟁 와중에서도 민중들이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보여 주는 가장 좋은 예이다. 그들에게 정의와 도덕이란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이 강요하는 어떤 체제를 지지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채 그저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었다.

(312)결국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서 군이 치안과 재판을 담당하게 되자, 남북한 모두 군의 명령에 기초하여 잠재적 적을 집단처형한 것이다.

(319)서북청년단과 제주도민 간의 갈등 역시 계급도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들은 자신이 북한에서 좌익에게 당한 일을 분풀이하기 위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제주도민들에게 앙갚음한 것이다.

(319)한국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전쟁이기 이전에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내전이었고 전선이 남북한을 오가며 수없이 교차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념 혹은 공식 권력으로 통제되지 않은 사적인 보복을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3. 학살의 특징

(326)작전으로서의 학살과 처형으로서의 학살이 단연 압도적이나 그 잔인성에서는 보복으로서의 학살이 더욱 두드러진다. 곧 작전의 명분으로 시행되는 대규모 학살은 사실상 한국군과 유엔군, 즉 미국 측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국민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처형은 국가 위기를 틈타 내부의 적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히 개입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27)한국전쟁 당시의 학살은 미군과 한국군이 초토화작전을 구사했으며, 국가권력이 집단처형 등 사실상의 학살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고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은 정치투쟁과 계급갈등의 연장인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므로 대단히 감정적이고 잔인하였다.

(328)한국전쟁의 경우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코리언 모두가 학살에 참가한 것이 아니므로 학살의 책임 역시 주민이 아닌 남북한 양 정권에 있다.

(329)무엇보다도 한국전쟁기의 학살은 전쟁의 정치화라는 배경과 더불어 냉전 시기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그 광기가 주요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전쟁 전후의 학살은 인도네시아·베트남·캄보디아 등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정치적 학살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4. 학살의 정치 사회학

(334)권력의 본질은 사실상 폭력이며, 국가가 폭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쟁시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334)위험의 제거와 공포심 유발은 대량학살의 가장 중요한 동기다.

(335)일제강점기에 계속되었던 반제·반봉건 국가 건설 노선과 그에 저항하는 구친일파세력 사이의 대립, 나아가 사회주의적 국가 건설과 자유주의적 국가 건설의 노선대립이 중첩되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이었다.

(336)극심한 빈곤과 과중한 세금, 신분차별, 억압적인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농민들의 저항이 계속되는 조건에서, 어떤 형태로든지 급진적인 개혁 혹은 혁명은 불가피했다. 그러한 요구가 가장 광범위하게 폭발한 것이 1946년 대구10.1사건이었다. 당시는 일종의 권력공백의 상황, 국가 이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해와 사사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조정되고 통제되는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극히 원시적으로 표출되었다.

(337)문제는 미·소의 분할점령에 의해 남한에서의 민족세력과 친일세력의 갈등이 우익과 좌익의 갈등으로 연결되면서 양자의 적대감이 극대화되었다는 것이다.

(339)대구10·1사건은 정치갈등이 경찰과 민중 간의 무차별적인 폭력과 학살로 연결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자, 이후의 집단학살을 예고하는 부표가 되는 사건이었다.

(340)‘광란과 유혈로 얼룩진 대구10·1사건은 좌익에서 조직적으로 준비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것이 대중적 폭력으로 발전된 것은 친일 경찰에 대한 도덕적 분노 때문이다.

(341)당시의 모든 기록은 민중의 분노가 대구 10·1사건의 도화선이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341)원인 제공의 측면에서 본다면 미군정의 진주로 인한 현상유지정책과 미군정의 적극적인 친일 경찰 기용이 남한에서 폭력을 불러일으킨 일차적인 배경이었다고 볼 수 있다.

(342)일제가 물러간 뒤 여러 정치세력이 국가의 주인이 되기 위해 각축하고 있던 1945815일 직후는 누적된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표출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343)반공만능주의 체제에서 어떤 형태의 좌익 처벌도 전쟁 수행의 대의 아래 용납될 수 있다는 믿음, 최고권력자인 이승만이 자신을 확실히 보호해 주리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한국전쟁 시 군인들이 그렇게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344)집단처형 결정의 가장 유력한 인물은 이승만의 최측근이었던 시경국장 김태선과 방첩대장 김창룡이다.

(344)1948824일 군정의 종료로 형식적인 군사적 주권을 획득했으나 한미군안전잠정협정 체결로 인해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기까지는 여전히 모든 작전권을 미군이 행사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 전쟁 발발 후 1950714일 이승만이 유엔군에게 작전권을 이양함으로써 군사작전에 관한 한 주권을 또다시 미국에게 양도하게 되었다.

(345)한국전쟁 발발 전후의 한국과 미국의 역학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한국군의 모든 작전이 미극동군사령부, 혹은 미군사고문단, 특히 방첩대의 지휘와 동의나 묵인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347)당시 이승만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이용했던 극우단체 회원의 상당수는 사실상 테러집단과 다를 바 없었다.

(349)슈미트가 미키아벨리적 독재자를 설명하며 말한 것처럼 이승만은 언제나 국가의 구성원이 될 인간 대중을 형성의 소재로 보고 물질시하는태도를 보였다.

(351)초토화작전이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적 또는 희생양들을 완전희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어 국가의 위엄을 과시하며, 이를 목격한 일반 민중들에게 국가권력에 대한 공포심과 무조건적인 복종심을 갖게 하려는 정지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51)우리는 한국 군인과 경찰의 억압적 군사주의적 문화 자체에서 이미 학살이 예비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353)보통의 코리언들에게 경찰은 억압적·관료적 지배를 상징했다.

(355)이승만은 일본식 훈련을 받은 군인이나 관리들의 군국주의적이고 기술관료적인 합리성을 존중하였다.

(355)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지배심리는 상하관계였다. 동아시아 유교문화 탓도 있을 것이지만, 인간관계를 협력과 분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매사 누가 높고 누가 낮으냐로 보았다. 그리하여 계급별, 학년별, 선후배별로 지배와 복종 관계가 철저히 관철되고 있었다.

(359)일제 강점기에도 그러하였지만 해방 후에도 말단 권력기관이자 지배의 첨병인 경찰과 군대는 주로 가난하고 야심많은 청년들의 출세를 위한 통로였다. 이승만도 이들의 열등감과 친일 군대·경찰 경력의 콤플렉스를 우익독재정권의 유지·강화에 적절히 활용하였다.

(365)김창룡은 이제 지하에서 일본군 헌병보였다. 전쟁 전후 상당수의 민간인 학살은 김종원과 김창룡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출세와 충성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의 친일 콤플렉스와 권력 물신주의는 자신의 권력을 극대화하는 데 활용하였다. 위기에 몰린 친일세력이 일제에서 배운대로 학살에 앞장섰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한국전쟁 시기의 대량학살은 바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직접적인 유산이라고도 볼 수 있다.

(367)남북한 양측이 이러한 당위를 내세우며, 상대방을 반민족 집단또는 괴뢰로 볼아붙이는 전쟁의 정서 및 담론구도가 양자 간의 정치적 갈등과 폭력을 훨씬 적대적으로 증폭시킨 문화적 배경이다.

남북한 모두가 사용한 민족의 개념은 우리의 가족공동체를 모델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68)한국의 전통사회에서 가족 내의 개인은 독립적인 인격체가 아니다. 아버지의 일은 아들의 일이고 남편의 일은 아내의 일이다. 연좌제는 여기서 나온 것이다.

(368)이승만은 전쟁 발발 이전인 제주 4·3사건이나 여순사건 당시부터 정치적 반대세력 혹은 좌파세력에게 왕조시대 혹은 파시즘 상황에서나 주로 사용되는 개념인 반역이나 부역이라는 담론을 사용하였다.

 

5. 맺음말

 

5. 국가주의를 넘어서

 

1. 상처받은 반쪽 국가의 탄생

2.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피해자인 전쟁

3. 정치의 연장으로서의 전쟁

4. 전쟁의 연장, 분단의 정치

(401)한국전쟁기에 나타났던 학살은 이후 4·19혁명에서, 베트남전쟁에서, 5·18광주민주화운동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무수한 의문사·공권력의 폭력·인권 침해 등의 상황에서 반복되었다.

 

5. 21세기에 바라보는 한국전쟁

(406)문제는 남북한의 민중들에게 외세 배격·통일을 명분으로 한 지배집단의 정치적 야망을 제압할 힘이 없었다는 것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한반도 전후처리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정치 과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전쟁은 일제 식민지배의 직접적인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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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 전쟁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스타블로거 : 블루스타 서향 | 2010.06.21 | 추천5 | 댓글0 리뷰제목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올해로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지난 60년동안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는 수 많은 변화속에 흘러왔다. 처음 출발당시 주권국가라는 흐릿한 개념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국가개념도 변화했고 그 국가 구성원들의 가치관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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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전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올해로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듯이 지난 60년동안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는 수 많은 변화속에 흘러왔다. 처음 출발당시 주권국가라는 흐릿한 개념속에서 출발한 대한민국의 국가개념도 변화했고 그 국가 구성원들의 가치관 역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6월 25일을 전후한 몇일정도만 한국전쟁을 그나만 흐릿하게 기억할려고 할 뿐이다. 당시 전쟁참여자나 피참여자에게는 결례되는 말이 될지 몰라도 현실은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지만 오랜세월속에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과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의 담론들일 것이다.

그 담론은 바로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담론이자 또한 그렇게 강요되었던 담론들의 확대 재생산판이었다. 구 소련의 몰락으로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 대립시대를 지난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우리는 탈냉전의 시대가 아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한국전쟁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현주소이다. 좀더 나아가 그동안 말 많았던 최초공격자에 대한 해답이 구소련의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일단된 정도이고 노근리나 거창학살사건등의 공개로 인해 전쟁의 참화와 그 패해에 대해서 잠시 거론될 뿐 여전히 반공주의에 기초한 담론에 반기를 들 수 없는 분위기이자 확정된 담론이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세기가 훌쩍 지난 시점에서 전쟁당사자중 미국과 소련, 중국등에서는 잊혀진 전쟁으로 치부되더라도 남북한 양측의 입장에서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 전쟁이자 잊어서는 안되는 전쟁이기에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정치학적 담론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시각과 해석이 있어야 할 때이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다름아닌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정치적인 담론을 걷어내고 전쟁이 사회전반에 미친 영향과 가장 큰 피해자인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바라보았던 전쟁의 실상에 대해서 날카로운 해석과 그동안 정치적 해석에 묻혀있었거나 봉인받았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공론화의 장으로 이끌고 있다. 특히 전쟁중 작전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된 남북측과 미군의 학살행위를 통해서 국가와 국가구성원간의 관계 그리고 이러한 학살이 발발하게 된 역사적 동기와 그 이면에 자리잡고 있었던 정치적 행위, 그리고 휴전이후 냉전체제속에서 묻혀버리길 강요받았던 원인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고 이러한 해석은 그동안 알고 있었고 알기 강요받았던 우리 대부분의 기억들과 상당하게 상반되는 해석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이제 우리사회도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주목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마련 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새로운 해석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아닌 전쟁에 참여를 강요당했던 민족구성원 대다수가 가장 큰 피해자로 남았기 때문이다. 일부 보수층에서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는 맥아더는 1954년 한 세미나에서 "한국이 우리를 구해 주었다"라고 밝혔고 커밍스는 뉴딜이 금세기 미국의 제1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면 한국전쟁은 제2차 국가부흥의 계기였다고 지적했다. 더불어 일본의 전 수상 요시다 시케루 역시 한국전쟁을 두고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하였을 정도로 한국전쟁은 남측의 국민이나 북측의 인민과는 전혀 무관한 그들만의 축제의 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축제의 장에서 가장 큰 해택을 누린 이들은 북측의 김일성과 그 정권지지자들 그리고 남측의 이승만을 비롯한 친일세력들이었고 이들 양측의 지배층은 한국전쟁을 기화로 자신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다졌다. 이는 휴전이후 북측이 김일성 일인독재체제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남측역시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반공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을 보면 확연히 들어난다. 사실 1950년 5월 선거에서 치명타를 받은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가장 적절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자신의 권력창출에 이용했던 인물이기도 하면서 이후 반공 멸공의 선봉장 역활을 화려하게 해내게 된다.

 

그동안 북괴가 내려왔고 유엔군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전했고, 압록강 근처까지 올라가 통일을 앞둔 시점에서 애석하게도 중공군이 내려와 후퇴를 하게 되고 결국 38선보다 조금 위로 올라간 곳에 휴전선이 만들어졌다는 판에 박힌 듯한 기존의 공식화된 한국전쟁의 해석에서 부터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해석을 가해야 할 때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정치적인 논리와 상황으로 모든 공식적인 기억을 봉인해 왔던 기존의 담론에서 부터 탈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 양측의 국민과 인민의 대다수는 사실 전쟁과 무관했다고 봐야 한다. 신생해방국에서 주권의 개념이 자리잡기전의 구성원들에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수용키 바란다는 것 자체가 넌세스이자 억측이었던 것이다. 전쟁발발과 동시에 몇차례에 걸쳐 남북을 왔다갔다했던 통치지역에서 일반 민중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살아남는 것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그네들에게 무의미했던가를 보여주는 단편일 것이다. 대다수의 민족구성원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정치적인 해석보다 몸소 겪었던 전쟁의 참화만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인민군에 의한 학살, 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 그리고 관변단체들의 보복성 학살 그야말로 동족간에 강요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발생했던 피비린내 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현실이외에는 그 어떠한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노근리사건이나 거창양민학살사건등 이제야 정치적인 해석에 벋어나는 새로운 해석들이 하나둘 들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봉인받기를 강요당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국가라는 거대한 틈바구니안에서 묻혀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당시의 비참한 기억을 새롭게 떠올리는 것 자체가 고역이겠지만 이제 새로운 해석들을 통해서 정치적인 측면이 아닌 순수한 사회적 그리고 민족구성원들 대다수의 기억들을 봉인의 틀에서 끄집어 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그러지 않고서는 또다시 정치적인 해석으로 인해 묻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4.19항쟁이나 5.18항쟁을 통해서 여실히 느끼지 않았던가. 그동안 내재되었던 기억들이 묻여가면서 똑 같은 일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듯이 이제라도 한국전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해석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인 것이다.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미국과 중국, 일본 그리고 남북한의 지배집단이었고, 최대의 피해자는 참전했다가 죽고 다친 군인과 그 가족들, 이산가족, 피학살 민간인, 미군범죄의 피해자, 기아선상의 북한 주민,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인해 응당 누려야 할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대다수 남북한 민중들인 것이다. 기존의 냉전적 국가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적이면서 인간적인 시각에서 민족구성원의 차별과 고통 그리고 희생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억울하게 스러져 간 남북한의 모든 이름 없는 그리고 기억되기를 거부당한 영령들 앞에 그나마 작은 위안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살아있는 모든 이들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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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평점4점
한국전쟁에대해알고싶어서구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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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57102 | 2017.09.05
구매 평점5점
역사에 대해 알고자 역사관련책을 보게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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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2749 |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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