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가녀린 촛불 아래에서 영혼의 불꽃이 일고 우정의 날개가 털갈이를 하지 않는 한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로즈 와인으로 영혼이 성숙하고 지금이 우리 삶에서 최고의 행복이 최소인 순간이기만 하다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 p.2
대체로 양심은 탄력적이고 신축성이 뛰어나서 그것을 늘어뜨려 다양한 상황에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신중하게 겉옷을 벗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걸쳤다가 편의에 따라 벗어 던지는 사람도 있다. 후자가 요즘 유행하는 가장 멋지고 편리한 처신법이다. --- p.6
어째서 우리는 육체적인 이별보다 정신적인 이별을 더 잘 참아내는 것일까? 어째서 헤어질 용기는 있으면서 작별을 고할 용기는 없는 것일까? --- p.15
아침의 상쾌함, 새들의 지저귐, 흔들리는 풀잎의 아름다움, 짙푸른 잎사귀, 들꽃들, 그리고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과 소리―다수의 우리에게 깊은 즐거움을 안겨 주지만 우리 삶의 대부분은 우물에 빠진 양동이처럼 도시에서 고독하게 살아가거나 군중 속에 있다―가 가슴을 파고들어 그들을 즐겁게 했다. --- p.15
꿈속에서는 밀랍인형인지 퀼프인지 모를 무언가가 등장하더니 그것은 다시 잘리 부인이었다가 다시 밀랍인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퀼프가 되었다가 다시 잘리 부인이 되었다가 다시 밀랍인형이 되었다가 마침내는 그것들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 손풍금이 되었고, 종래에는 그 형체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넬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기쁨의 무의식에 빠져들었다. --- p.27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금빛으로 불타던 저무는 태양이 검은 장막을 뚫고 사방으로 뻗어 나와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태양이 행복했던 하루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휑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어서 먹구름의 행렬이 천둥과 번개를 몰고 왔다. 마침내 먹구름이 굵은 빗방울을 뿌리며 지나간 뒤 또 다른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었다.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천둥소리에 이어 번개가 치더니 세상은 순식간에 짙은 어둠에 잠겨버렸다. --- p.29
그녀의 외모는 오빠인 샘슨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는데, 어찌나 닮았던지 샐리가 친구들 모임에서 오빠인 샘슨의 옷을 입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있으면 두 사람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조차 누가 누군지 구분하지 못했고, 특히 샐리의 불그스름한 윗입술은 복장에 따라 콧수염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들은 타고난 무례함과는 동떨어진 그녀의 눈에 속눈썹이 잘못 붙은 것에 불가할 개연성이 아주 높다. --- p.33
아, 휴가여! 어째서 우리에게 항상 아쉬움을 남기는가! 어째서 휴가의 기억을 우리의 마음이 내킬 때 1, 2주 동안 담담하게 웃으며 떠올릴 수 없단 말인가! 어째서 휴가는 어제 마신 와인처럼 우리에게 두통과 나른함을 안겨 주고, 세상에 끝없이 펼쳐진 미래에 대한 좋은 의도처럼 저녁 무렵까지 그것에 시달리게 한단 말인가! --- p.40
“불은 내게 책과 같단다.” 그가 말했다. “읽는 법을 배운 유일한 책. 불은 내게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지. 또 그것은 음악이기도 하단다. 나는 어떤 소음 속에서도 불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어. 타오르는 불은 자신의 함성 속에 또 다른 목소리를 지녔지. 불은 자신의 초상화도 지녔단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석탄에 얼마나 많은 낯선 얼굴과 다양한 모습들이 존재하는지 너는 모를 거다. 불은 나의 추억이기도 하단다. 불은 내 인생 전체를 보여 주거든.” --- p.44
아! 쏟아지는 빛의 찬란함이여. 사방으로 뻗어 나가 맑디맑은 푸른 하늘과 만나는 들과 숲,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떼들, 푸른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것 같은 나무들 사이에서 나는 연기, 여전히 아름답고 행복한 모습으로 무덤가에서 노는 아이들. 이것은 마치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온 것 같았고, 천국에 한층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었다. --- p.53
인간의 마음―이상하고, 상황에 따라 변하는 줄―에는 오직 우연에 의해서만 울리는 심금이란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가장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호소를 위해 말없이 무감각한 상태를 유지하다 아주 사소하고 우연한 기회에 답을 한다. 종종 예술이나 기술적인 도움으로 약간의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가장 무의식적이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일 때 위대한 진리처럼 스스로 드러나며, 그때 당사자는 가장 솔직하고 순수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 p.55
슬픔에 찬 사람들이 초록의 무덤 위에서 흘리는 모든 눈물은 약간의 선을 낳고 약간의 온화한 성품을 부른다. 파괴자의 발밑에서 그 힘에 도전하는 밝은 창조물이 생겨나며 그의 어두운 길은 천국으로 가는 한 줄기 빛이 된다.
--- p.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