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툭 강렬하고 유쾌하게, 때로는 숙연하게 스며드는
세상의 귀한 ‘다정 씨’들에 대한 스케치
‘다정하다’는 말을 새삼 들추어 보면, 정이 많다, 정분이 두텁다는 뜻을 갖추고 있다. 살갑고 자상함을 뜻하기도, 테가 나지는 않지만 스미듯 전해 오는 정을 이르기도 한다.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그 모든 의미를 담는 ‘다정多情’을 바탕으로 하여, 한편으로는 윤석남이 삶 속에서 만나온 사람을, 나아가 평범함 속에서도 귀하게 반짝이는 돌봄과 보살핌의 정서를 이야기한다.
한때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서웠던 작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스물일곱부터 함께하며 백만 번은 전쟁한 것 같은 남편과 스물일곱에 결혼은 차차 하겠다고 선언한 딸, 그리고 홀몸으로 자식 여섯을 키우면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았던 어머니 원정숙 여사, 어느 날 마주친 남부터미널 할머니, 약수터에 와서 한참을 재잘거리다 정작 약수통은 두고 간 꼬부랑 할머니, 쉰 살이 되어서야 밥그릇 열두 개로는 마술사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아줌마와 우리 외할머니는 슈퍼우먼이라고 자랑하는 손자까지. 사실은 서로 돌보고 보살핌을 주고받는 다정한 사람들의 삶의 단상이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숙연하게 담겼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 마흔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동기는 ‘어머니’였고 윤석남은 가장 그리고 싶은 존재였던 어머니를 그리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에서도 이어진다. 결혼은 차차 하겠다고, 어머니와는 다른 길을 선택한 딸에게 두 손 번쩍 들어 환영해 주는 천진한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햇볕 가득한 적막한 운동장을 성큼성큼 가로지르던 청청한 어머니가 있고, “얘야, 에미야, 그 많던 걱정근심 다 내려놔서 그렇니라” 하며 딸을 안심시키는 초로의 어머니가 있다. 따듯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어머니들의 모습은
그림 하나하나에서 ‘모성’을 담고 있으며, 그 모습 그대로 돌봄과 보살핌의 정서로 이어진다.
그림책 안으로 들어온 오리지널 드로잉
현대미술작가와 그림책작가의 콜라보레이션
곁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피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사실은 가장 필요한 것이 돌봄의 정서, 어머니의 그것처럼 다정한 보살핌이 아닐까. 윤석남의 오리지널 드로잉에서 그런 다정함을 발견하고 그림책 안으로 가져온 이가 한성옥이다.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윤석남과 한성옥이 함께 작업한 결과물로서, 윤석남은 글과 그림을, 한성옥은 책의 구성과 전체적인 아트디렉팅을 담당했다. 한성옥은 『시인과 여우』, 『나의 사직동』과 같은 작품으로 이미 어린이 책 쪽에서는 널리 알려진 그림책 작가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전시장에서 관람의 형태로 소비되는 오리지널 드로잉이라는 예술품이 그림책이라는 무대로 건너올 때 갖추어야 할 연속성과 새로운 예술성에 대하여 깊이 고민했다. 그의 이런 고민 덕에,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다정 씨’라는 키워드로 하나로 묶이고, 드로잉의 오리지널리티를 가져가면서도 그것과는 또 다른 독특한 색깔을 갖추게 되었다.
가느다란 줄 하나의 그림으로 시작하여, 다음 장을 넘기면 줄은 둘이 되고, 또 다음 장을 넘기면 비로소 그 두 줄에 매달린 그네에 아주 작은 집이 올라타 있다. 그 작은 집의 작은 방에서부터 ‘겨울 숲 속에서 만난, 푸른 하늘이 창문에 머무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店. 내 방’이라는 윤석남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세상이 두렵고 무서워서 자기 안으로 꽁꽁 들어가 있던 ‘나’의 이야기부터 멀고도 가까운, 끊어지지 않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 비로소 나를 세상으로 이끌어 내주던 주변의 귀한 생명들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범위는 책장을 넘길수록 점점 확장되며 여린 수채와 색연필, 담담한 연필로 그려진 드로잉들은 책이라는 공간에서 오리지널과는 다른 새로운 여백을 갖추고 섬세하지만 단단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책을 뜯어보기를 즐기는 독자들을 위한 숨은 재미와 장치도 곁들여 놓았다. 책의 뒤표지까지 연결되는 숨은 재미이니, 한번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운 독서법.
고급스러운 사양과 장정으로
소장본으로서의 가치를 높인 아름다운 책
요즈음은 특히나 윤석남의 조각과 설치작품들에서 나아가, 드로잉이 주목받고 있다. 현대미술이 주는 어렵고 불편한 기색이 없이, 마치 일기처럼 솔직하고 담백하게 적은 글과 젊은 감각의 그림들이 보는 이를 편하게 해 주기 때문이 아닐까. 『다정해서 다정한 다정 씨』는 이러한 오리지널 드로잉의 매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하여, 오리지널에 가깝게 색 하나하나를 살리고, 고급스러운 종이와 장정에 담아냈다. 전시장에서 관람하는 즐거움만큼이나 소장하고 싶은 욕구도 귀할 터. 이 그림책이 어느 독자의 책장에서 하나의 미술관으로 기능할 수 있기를, 더불어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다정한 마음을 만나고 싶을 때, 그 마음을 위안하고 어루만지는 책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