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을 되감아 꾸는 시인의 꿈 _“어쩌면 나는 정말 개미인지도 몰라”
“불가능의 세계가 무한한 상상력에 의해 가능의 세계로 전환되는 과정, 닫힌 어른들의 세계가 균열과 붕괴를 통해 열린 아이들의 세계로 환원되는 과정, 고정관념으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고체의 세계가 자유롭고 물렁물렁한 반고체의 세계로 회귀하는 과정이 김개미 동시가 태어나는 지점이다.”
시인 함기석은 해설에서, 김개미 동시의 시작점에 대하여 이렇게 정리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설명 가능한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모든 경계를 지우고 최초의 눈, 최초의 손으로 돌아가 세계와 접촉하고 싶은 욕구가 시인을 끊임없이 탐험하는 ‘탐험개미’이게 한다는 것이다. 시인의 자기고백도 이와 다르지 않다. ‘책머리에’에서 마주하게 되는 시인의 첫마디는, 자신이 정말 개미일지 모르고, 지금의 삶이 “이끼 그늘에서 잠시” 쉬며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자백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편들을 하나씩 읽어 가며 독자들은 그것은 정말일지 모른다고 스리슬쩍 동조하게 된다.
* 고요하고 무한한 환상의 공간 _“다락방에도 다락방이 있어 밖을 내다보기 좋은 집”
아주아주 커다란
빵을 굽고 싶어
트럭만 한 빵,
매일 조금씩 뜯어 먹는 거야
빵에 구멍을 빵, 뚫는 거야
빵 속에 들어가 누우면
온통 빵 냄새가 나겠지
침대처럼 푹신하겠지
빵을 뜯어 먹는 거야
구멍이 점점 커져 방이 되겠지
창문도 여러 개 생기겠지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놀면서 집을 짓는 거야
빵을 뜯어 먹는 거야
벌레 인간이 되는 거야
_「커다란 빵 생각」 전문
표제작 「커다란 빵 생각」은 제목 그대로, 트럭만큼 커다란 빵을 구워 그 안에 온몸을 던져 넣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생생한 감각적 표현을 통해 그려낸 작품이다. 화자의 상상은 개미가 굴을 뚫는 모양처럼 이리저리 확장된다. 익숙한 사물에서 출발한 상상이 기에 누구나 쉽게 동승할 수 있고, 풍부한 후각, 촉각적 심상이 순식간에 독자를 감싸 부드러운 힘으로 시 안쪽으로 끌고 들어간다.
아이가 꿈꾸는 공간의 성격은 「내가 어른이 되면 지을 집」에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이에게는 “집 안에도 집이 있어/ 틀어박히기 좋은 집// 2층에도 지하실이 있어/ 장난감을 하나도 안 버려도 되는 집/ (…) / 문이 스케치북만 해서/ 어른들이 못 들어오는 방이 있는 집// 다락방에도 다락방이 있어/ 밖을 내다보기 좋은 집”이 필요하다. 다락방 안에 또 다락방이라니, 아이의 내면에 자리했을 감정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난쟁이들이 살던 어렸을 적 할아버지의 라디오(「삼촌 이야기」), 드러누워 할아버지 생각을 하던 야전침대(「난 다락방이 좋아」), 아무도 없는데, 개도 자는데, 작고 외로운 그림자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함께 거닐던 마당(「달밤」) 등 시 속 공간들은 고요하고 무한하다. 아이는 환상이라는 도구로 쉴 곳, 놀 곳,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공간을 스스로 짓는다.
* 모든 종류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는 시적 파장의 진폭 _“들리는가 오버 들리면 제발,”
평론가 이재복은 김개미의 시를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로 내려가 아이들 마음 높이보다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자리에서 아이들과 소통하며 얻은 언어”라고 평한 바 있다. 현실의 아이들에 가까이 밀착해 시의 그물로 끌어올린 언어들은 힘이 넘치는 지느러미로 읽는 이의 마음을 때린다.
맹랑하고 당돌한 모습으로 늘어놓던 허풍은 이번 동시집에서, 「멜빵바지의 경고」「이상한 엄마」「동생 떼어 내기」 등을 통해 더욱 장대한 스케일로 전개된다. 「짝의 일기」「리코더 중주」「꿈속 거북이」 등에서 일상의 벌어진 틈으로 언뜻 보이는 작은 존재의 불안과 외로움은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똥 누다 울어요」「별에 무전을 친다」 등에 나타난 깊고 처절한 그리움은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펄떡이는 시어, 다양한 시적 상황의 모색으로 인해 감정의 진폭이 확장되어, 웃음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울음 또한 깊어졌다.
경비실 앞에
지렁이가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102호 아이가
장난감 물뿌리개로
물을 뿌려 주고 있었다
깃동잠자리가 그애 등에 앉아
자고 있었다
_「토요일 오후」 전문
“102호에 다섯 살짜리 동생이 살고 있거든/ 오늘 아침 귀엽다고 말해 줬더니 /자기는 귀엽지 않다는 거야/ 자기는 아주 멋지다는 거야” “자전거 가르쳐 줄까 물어봤더니/ 자기는 필요 없다는 거야/ 자기는 세발자전거를 나보다 더 잘 탄다는 거야”
「어이없는 놈」의 맹랑하던 ‘102호 아이’를 다시 만난다. 아이는 동그마니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말라 죽은 지렁이의 몸에 물을 뿌려 주고 있다. 토요일 오후다.
엉뚱하고 유쾌한 매력으로 무장한 채 함부로 자신을 귀여워하는 상대방에게 통쾌한 일침을 날려 주던 그 아이는 이제 쨍한 햇살에 모두가 들떠 있는 휴일 한낮 풍경 속에서 길바닥에 붙은 외롭고 가여운 존재와 눈을 맞춘다. 소음은 멈추고, 시간은 흐르고, 시인은 그애 등에 앉은 깃동잠자리처럼 가만히 지켜봐 준다.
* 치유와 성장을 위한 안전한 고치 _“가끔은 완벽한 밤이 필요해요”
시인 함기석은 해설에서, “익살스러운 말과 장난으로 고정관념을 뒤집는” 전복적 힘과 “어른의 허위에 대한 풍자”,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발견 욕구” 등을 김개미 동시의 주된 특징으로 꼽고 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지점으로 초현실의 세계가 수행하는 치유와 성장의 고치로서의 역할을 말한다.
“주변 환경과 자아가 대립하며 갈등할 때 아이들은 자기만의 밀폐 공간으로 숨는 경향이 많다. 외톨이가 된 아이에게는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것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숨구멍이기 때문에 그것은 비현실적인 세계가 아니라 어떤 현실적인 세계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 김개미 동시의 환상이 이런 토대 위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걸 간과하면 동시의 껍데기만 읽는 것이다. 그의 동시에서 환상은 환상의 잉여로 귀착되지 않고 현실의 결여와 긴밀하게 연계된다. 이것이 김개미 동시에 구현된 환상의 심각성이다. (…) 아이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울 수 있는 혼자만의 방을 그리워하는 것도 이런 결핍과 상처 때문일 것이다. 이 방은 아이에게 없어서는 안 될 꿈의 밀실이자 치유의 방이고 재생의 공간이다.”
동시집 『커다란 빵 생각』의 역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다양한 에너지를 품은 시들은 독자로 하여금 웃고 공감하며 시적 화자의 감정에 이입하다 마침내 자기 스스로에게 오롯이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체험하게 한다. 내면의 억압된 욕구와 결핍을 찬찬히 살펴보는 계기로서의 문학적 체험은 상처를 치유하고 진실한 의미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고치와 다름없다. ‘커다란 빵’처럼 촉촉하고 폭신하고 고소한 고치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