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는 허다한 실패가 있다. 실패가 허다하다기보다는 잘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저 실패로 그치는 실패는 아니다. 영원한 실패라는 것은 없다. 몇 번을 잘못하더라도 역사가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기 위하여 늘 다시 힘쓸 의무가 남아 있다. 다시 함이 삶이요, 역사요, 뜻이다. 열번 넘어지면 넘어지는 순간 열한번째로 일어나야 하는 책임이 이미 짊어지워진 것이다. ...중략 삼국시대의 역사는 분명히 실패의 역사다. 민족통일을 하자던 것이 부서지고 말았고, 문화 발달을 했어야 할 것이 그만 시들어 죽고 말았고, 자기를 여무지게 길렀어야 할 것을 그만 잃고 말았으니 실패 아닌가? 여왕이 나온다던 것이 가엾은 한 계집종이 나오고 말았고, 위대한 혼을 기다렸던 것이 보기 싫은 산송장을 만나고 말았다. 숨길 수 없는 실패다.
그러나 한민족을 길이 길이 아주 장사지내는 실패일 수는 없다. 모든 뜻 있는 역사행위에서 이 사람들을 아주 자격 없는 놈으로 몰아낸 것은 아니다. 중요한 민족 단련에서 실패한 탓에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자포자기한 가운데 멸망의 길을 입 닫고 걸어가라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자기를 고치고, 문화를 다시 일으키고, 민족을 새로 통일할 의무를 더 무겁게 지게 되었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출간 이후 숱한 독자의 사랑을 받으며 아직도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읽히는 우리시대의 명저다. 20세기 한국에서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명저가 씌어진 것은 산더미 같은 자료와 깊은 학술적 훈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라와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려는 사랑의 뜻 하나로 이루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함석헌 선생의 글월은 마치 큰 강물처럼 유장하게 흐르며 리듬을 찬다. 하지만 오래 전에 씌어진 탓에 요즘의 감각으로 미처 파악되지 않는 대목들이 더러 있었던게 사실이지만, 이번에 새로 펴내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젊은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어려운 용어와 인용된 한자문장을 쉽게 풀이해서 이해를 돕고 있다.
1930년대 초반, 청년 함석헌은 자기모멸과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식민지 치하의 백성에게 희망을 복돋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지,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인 오지이지,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보통 돌아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가지고 나는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하면서 30대의 햇병아리 역사교사가 써놓은 책이 변화무쌍한 시대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뜻'을 밝혀 다음 세대까지 읽힐 명저가 되었다는 것은 청년 함석헌의 정신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치열했는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