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메뉴
주요메뉴


소득공제 오늘의책
미리보기 공유하기

아름다움의 구원

리뷰 총점8.8 리뷰 8건 | 판매지수 1,890
베스트
인문 top20 2주
정가
12,000
판매가
10,800 (10% 할인)
YES포인트
8월 얼리리더 주목신간 : 귀여운 방해꾼 배지 증정
8월 전사
쇼핑혜택
1 2 3 4 5

품목정보

품목정보
출간일 2016년 05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30쪽 | 166g | 125*200*20mm
ISBN13 9788932028699
ISBN10 8932028699

이 상품의 태그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오늘날 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 있다.
모든 부정성을 제거한 ‘매끄러움’의 미는
굳어져 죽은 것, 좀비가 된다!

소비 대상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미를 구출해내
진정한 아름다움을 되찾기 위한 날카로운 권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독창적 시각으로 읽고 분석한 책들을 꾸준히 펴내며 매번 화제를 불러일으킨 한병철 교수의 최신작 『아름다움의 구원』(이재영 옮김)이 출간되었다. 이번에는 ‘아름다움’을 화두로 현대 사회의 문제를 파헤친다. 한병철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되는 ‘아름다움’은 모든 부정성과 낯섦을 제거하고 긍정성과 자기 동일성만이 부유하는 ‘매끄러움’의 미에 지나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구원해내야 할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독일의 최고 권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한병철을 ‘문화 비판의 혁신자’라고 칭했듯, 이번 책에서도 그는 오늘날 미의 기준에 대한 관찰에서 신자유주의적 특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로 이어지는, 혁신적 문화 비평을 선보인다. 더욱이 이 책은 국내 소개되는 한병철의 첫번째 예술론이라는 점에서 궁금증을 자아낸다. 짧고 강렬한 문장에 깊은 사유를 응축해 담는 한병철 특유의 매력적인 문체가 빛을 발하는 것은 물론이다.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매끄러움
매끄러운 몸
매끄러움의 미학
디지털 미
은폐의 미학
상처의 미학
재앙의 미학
미의 이상
진리로서의 미
미의 정치
포르노그래피 연극
아름다움에 머무르기
회상으로서의 미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

미주
옮긴이 후기

저자 소개 (1명)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역자 : 이재영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성신여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창비 신인평론상과 시몬느 한독문학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이민자들』 『빌헬름 텔』 『토성의 고리』 『철학의 탄생』 『빛이 사라지는 시간』 등이 있다.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매끄러운 조형물들 앞에 서면 그것을 만지고 싶다는 “촉각 강박”이 생겨나고, 심지어 그것을 핥고 싶은 욕망까지 일어난다. 그의 예술에는 거리를 두게 하는 부정성이 빠져 있다. 오로지 매끄러움의 긍정성만이 촉각 강제를 불러일으킨다. 이 긍정성은 관찰자를 거리 없애기로, 터치로 이끈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관조적인 거리를 필요로 한다. 매끄러움의 예술은 이 거리를 없앤다. ---「매끄러움」중에서

내면의 공허를 덮기 위해 셀카의 주체는 자신을 생산하려고 헛되이 애쓴다. 셀카는 공허한 형태의 자아다. 셀카는 공허를 재생산한다. 나르시시즘적인 자기애나 허영심이 아니라 내면의 공허가 셀카 중독을 낳는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안정된 나르시시즘적 자아가 없다. 오히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 나르시시즘이다. ---「매끄러운 몸」중에서

미도 숭고도 주체의 타자가 아니다. 거꾸로 그것들은 주체의 내면성에 흡수된다. 자기애적인 주체성 바깥의 공간이 허용될 때만 다른 미가, 나아가 타자의 미가 다시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미 전체를 소비문화의 싹으로 보고 의심하거나, 포스트모던의 방식에 따라 숭고를 미와 대립시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못 된다. 미와 숭고는 근원이 같다. 그러므로 숭고를 미에 대립시키는 대신 해야 할 일은 내면화할 수 없는, 탈주체적인 숭고를 다시 미에 반환하고, 미와 숭고의 분리를 철회하는 것이다. ---「매끄러움의 미학」중에서

디지털 미는 비동일성의 모든 부정성을 추방한다. 그리고 오로지 소비하고 사용할 수 있는 차이들만을 허용한다. 비동일성은 잡다함으로 대체된다. 디지털화된 세계는 말하자면 인간이 자신의 망막으로 뒤덮은 세계다. 인간이 펼쳐놓은 막에 에워싸인 세계는 영구적인 자기 반사로 이끈다. 막이 더 촘촘해질수록 세계는 타자로부터, 바깥으로부터 더 철저하게 단절된다. ---「디지털 미」중에서

오늘날의 긍정사회는 갈수록 더욱더 상처의 부정성을 축소시킨다. 이는 사랑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초래할 수 있는 큰 도박은 전부 회피된다. 성적 충동의 에너지는 파산을 막기 위해 자본 투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분산 투자된다. 지각 또한 부정성을 점점 더 회피한다. 좋아요가 지각을 지배한다. [……] 상처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르게 볼 수도 없다. 본다는 것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동일한 것이 반복될 뿐이다. ---「상처의 미학」중에서

파괴적인 것을 증오하는 자는 삶 또한 증오해야 한다. 오로지 죽은 것만이 왜곡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의 비유다.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재앙의 미학」중에서

미는 어떠한 외적 목적에도, 어떠한 외적 사용관계에도 복종하지 않는다. 미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는 자신 안에 머무른다. 헤겔은 어떤 실용품도, 어떤 소비의 대상도, 어떤 상품도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들에는 미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내적 독립성과 자유가 없다. ---「진리로서의 미」중에서

오늘날의 미적 경험은 측면성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중심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리고 소비주의에 빠진다. 소비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파괴한다. 우리는 타자를 위해 옆으로 물러나거나 후퇴하지 않는다. 소비주의적인 태도는 타자의 타자성을, 비동일성을 파괴한다. ---「미의 정치」중에서

이제는 사회 전체가 휘발성을 지니게 되었다. 불변하고 지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근원적인 우연성에 직면하여 우리는 일상성을 넘어선 구속성을 향한 갈망을 느끼게 된다. 미는 만족의 대상으로, 좋아요의 대상으로, 임의적이고 편안한 것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는 미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이다.
---「아름다움 속에서의 산출」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제프 쿤스의 「풍선개」, 브라질리언 왁싱, 터치스크린, 포르노그래피……
오늘날 긍정사회의 아름다움은 매끄러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 균형 잡히고 조화롭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어떤 것, 현실의 부정성에서 벗어난 긍정적 유토피아, 이것이 오늘날 통용되는 아름다움이다. 오늘날의 긍정사회에서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고통을 주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진다. 페이스북의 ‘좋아요’ 버튼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병철은 제프 쿤스로 대표되는 현대 예술과 스마트폰, 브라질리언 왁싱, 위생 강박, 셀카 등을 하나의 현상으로 묶는다. 아름다움은 이제 일체의 부정성이 제거된 채 매끄럽게 다듬어져 나에게 만족을 주는 대상, 향락적인 향유 대상으로 축소되어버렸다. 이로써 미적인 것은 모조리 주체의 자기긍정에만 기여할 뿐, 주체를 진정 뒤흔들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것이 된다. 심지어 추함 또한 매끄러워진다. 악마적인 것, 섬뜩한 것, 끔찍한 것 역시 공포와 경악을 불러일으키는 부정성을 상실한 채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다듬어진다.

하지만 털을 제거한 몸이나 DS 자동차, 스마트폰의 터치스크린 등 매끄러운 표면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현대 미의 기준은 한병철의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다. 그는 진정 아름다운 것, 진정한 예술작품이란 폭로될 수 없는 비밀, 은폐된 것, 은유, 부정성을 내포한 것이라고 본다. 부정성을 가진 것이 아름답다는 한병철의 주장은 “미는 병이다”라는 데로까지 나아간다. 그래서 한병철은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 좀비”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모든 제작물들과 환경이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에 맞게 개조되어가는 ‘미의 통치’의 시대가 되었지만, 오로지 긍정성의 미학에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병철은 우리 시대를 오히려 ‘미가 철폐되어가는 시대’로 간주한다. 그는 블랑쇼, 보들레르, 릴케, 아도르노, 벤야민, 바르트 등을 ‘부정성의 미학’의 증인들로 소환한다. 또한 칸트와 헤겔의 미학에서 소비와 도구화에 대한 저항, 타자에 대한 존중 등의 요소를 찾아낸다. 이런 부정성의 미학에 기초하여 한병철은 나르시시즘적인 경향,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소비문화, 피상적인 긍정성에 집착하는 소통 양상 등 현대의 현상들을 두루 비판한다. 여러 사상가의 이론을 간명하게 짚어내 연결하는 이 책은 독자들을 흥미롭고도 깊은 사유로 점점 나아가게 해준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자본주의와 결코 화합할 수 없다!

오늘날의 미에서는 아주 많은 자극들이 생산된다. 바로 이러한 자극과 흥분의 홍수 속에서 미가 사라진다. 대상에 대한 관조적 거리가 불가능해지고, 대상은 소비에 내맡겨진다. 미용산업은 몸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소비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몸을 착취한다. 소비문화는 미를 점점 더 자극과 흥분의 도식에 종속시킨다. 훌륭한 예술작품의 기준도 우리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것이 되고 그 판매 가격이 그 작품의 가치로 환산된다. 그러나 진정한 미는 소비될 수 없는 것이다. “소비와 미는 서로를 배척한다. 미는 향유하라고, 소유하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는 관조적인 머무르기로 초대한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자본주의와 결코 화합할 수 없다는 것이 한병철이 우리에게 주는 강력한 메시지다.

소비사회 혹은 디지털 시대의 미학에 관한 사유
타자를 복원하고 우리를 열린 성찰로 이끄는 아름다움의 힘


“지금은 대화 능력, 타자를 향하는 능력, 나아가 경청하는 능력이 모든 차원에서 사라지고 있다. 오늘날의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는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만 지각한다. 그는 타자를 볼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한병철이 말하는 아름다움의 구원이란 무엇인가? 저자는 근대 미학에서 분리된 미와 숭고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것, 인식적인 것까지 아름다움 속에 재통합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움에는 감각적 만족을 넘어서서 우리를 대상과 자아에 대한, 결말을 알 수 없는 열린 성찰로 이끄는 힘이 있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관찰자를 타격하여 쓰러뜨리는 것’ ‘나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너는 네 삶을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대상을 자기확인과 만족, 향유의 도구로 삼기를 그만두고, 자신에게 충격과 전율과 불안과 고통을 안겨주며 상처를 입히는 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주체는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고 타자를 향해 자신을 열어놓을 수 있게 된다. 결국 한병철이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의 구원’은 곧 ‘타자의 구원’이다. 한병철의 글은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조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우리 시대의 문제를 적확하게 짚어내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아름다운’ 한병철의 책은 많은 독자들에게 또 한 번 성찰의 기회를 안겨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한병철 교수의 책들은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터키, 그리스 등 15개국 이상에 소개된 데 이어, 최근 스페인 등지에서 이례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2015년에는 그의 에세이 「무리 속에서」가 프랑스 브리스톨 데 뤼미에르 상(외국 에세이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독일 주요 언론 매체의 서평

과감한 주장들을 하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는 이 책은 우리의 미적 시각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 구원해낸다. 열정적이며 진정한 성공작! 『디 타게스포스트』

왜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이토록 이상하게 낯선 것이 되어버렸는지 [……]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책. 『슈피겔』

한병철의 최신작인 이 책은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권장할 가치가 있다. 이 책은 미가 드높은 경배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소비를 위한 생산물로 전락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미의 세속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노이에 취리허 차이퉁』

한병철의 『아름다움의 구원』은 이제는 잊힌, 비학문적이라고 잘못 알려진 전통을 되살린다. 새로운 것을 사유하는 데 백 페이지도 요구하지 않는 전통 말이다. 『필로조피셰 마가친』

회원리뷰 (8건) 리뷰 총점8.8

혜택 및 유의사항?
구매 아름다움의 구원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이**국 | 2021.09.10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한병철 작가님의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작품입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알게 된 작품인데 친구들과 우연히 얘기하다보니 친구녀석들도 벌써 아는 책이더군요 나름 유명한 작품인가봅니다ㅡ아님 제가 그동안 독서를 너무 안했기도 했구요 반성합니다 올해는 한달에 힌권이상은 읽기로 다짐했는데 역시나 지켜내기 어려운 목표였나봐요 ㅎㅎ 시작이 반이니 다시 도전해보려구요;
리뷰제목
한병철 작가님의 아름다움의 구원이라는 작품입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알게 된 작품인데 친구들과 우연히 얘기하다보니 친구녀석들도 벌써 아는 책이더군요 나름 유명한 작품인가봅니다ㅡ아님 제가 그동안 독서를 너무 안했기도 했구요 반성합니다 올해는 한달에 힌권이상은 읽기로 다짐했는데 역시나 지켜내기 어려운 목표였나봐요 ㅎㅎ 시작이 반이니 다시 도전해보려구요
댓글 0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구매 파워문화리뷰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오***스 | 2019.05.07 | 추천4 | 댓글0 리뷰제목
자본의 명령을 거부하는 ‘구원’의 미학-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은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에 ‘매끄러움’의 속성을 붙인다. 맑은 피부에 집착하는 현대인을 생각해 보자.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날라치면 사람들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길까 염려를 한다. 여드름은 매끄러움과는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울퉁불퉁하게 하는 여드;
리뷰제목

자본의 명령을 거부하는 구원의 미학

-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은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는 미에 매끄러움의 속성을 붙인다. 맑은 피부에 집착하는 현대인을 생각해 보자.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날라치면 사람들은 얼굴에 흉터라도 생길까 염려를 한다. 여드름은 매끄러움과는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다. 얼굴을 울퉁불퉁하게 하는 여드름은 심하면 얼굴에 흔적으로 남는다. 매끄러워야 할 피부에 흔적이 남다니! 외모가 사회적 경쟁력이 되는 사회에서 얼굴에 남은 흔적은 그만큼 경쟁력 없는 외모를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 지은이는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9~10)고 말한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반대자를 애초부터 제거함으로써 매끄러움은 오로지 매끄러움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

 

매끄러움은 표면을 중시한다. 매끄러움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얼굴 피부가 맑으면 경쟁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경쟁력이 없는 사람이다. 단순명료한 자본의 논리. 지은이는 매끄러움의 세계를 미식(美食)의 세계로 규정한다. 제프 쿤스의 조각상인  풍선 비너스 에서 지은이는 매끄러움이 성화(聖化)가 되는 순간을 목격한다. 비너스가 출산하는 것은 가시관을 쓰고 온몸이 상처로 뒤덮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2003년산 동 페리뇽 로제 빈티지 와인 한 병을 출산한다. 상처가 전혀 없는 매끈한 병은 신자유주의가 지향하는 긍정세계의 전형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부정적인 것을 이면에 감추고 긍정적인 것만 표면으로 올린다. 신자유주의가 열망하는 소비사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비를 부정하는 모든 것들은 바깥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소비사회는 매끄러운 것을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제공한다. 매끄러움을 소비시키기 위해 신자유주의 권력은 미학의 중심에 매끄러움을 배치하고 있는 셈이다.

 

정보사회를 구성하는 정보는 한없이 투명하다. 지은이는 정보를 지식의 포르노그래피적인 형태(23)로 규정한다. 포르노그래피는 표면으로 이면을 대치한다. 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 정보를 적나라하게 표현함으로써 포르노그래피는 정보가 직접 현전(現前)하는 사회를 만들어낸다. 투명사회는 정보가 점과 점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회이다. 점과 점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보이는 점이 모든 것이다. 점과 점이 모여 어떤 형체를 이루지만, 그 형체에는 어떤 의미도 달라붙지 않는다. 보이는 게 전부인 사회는 윤리적일까, 아니면 비윤리적일까? 보이는 게 전부인 사회에는 오로지 동일한 것들만 존재한다. 동일한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반대자가 없는 사회는 과연 윤리적일까? 동일한 것들만이 반응하는 사회에는 그에 저항하는 타자가 부재하다. 타자는 동일한 것들의 소통을 방해한다. 타자가 많을수록 투명한 소통은 그만큼 느려지는 것. 동일한 것들의 반복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타자를 부정하는 까닭은 이로써 명확해진다고 하겠다.

 

아름다움의 미학은 근대의 독특한 현상이다. 근대 미학에서야 미와 숭고가 분리된다. 미는 그 순수한 긍정성 속에 갇힌다. 강력해지는 근대의 자아는 미를 만족의 대상으로 긍정화한다. 이 과정에서 미는 숭고에 대립하게 된다. 숭고는 그 부정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직접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미와 구별되는 숭고의 부정성은 숭고가 인간의 이성으로 환원되는 순간 다시 긍정성으로 바뀐다. 이로써 숭고는 이제 바깥, 전적인 타자가 아니라 주체의 내면적 표현 형식이 된다. (29)

 

미학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근대미학은 주체와 대상을 구분한다. 근대미학의 주체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 인식하는 주체는 인식 대상보다 우위에 있다. 주체를 만족시키는 대상만이 미적으로 가치가 있다. 미가 긍정성을 차지하면서 부정성을 지닌 숭고는 미와 구분된다. 미가 대상을 통해 직접적 만족을 준다면, 숭고는 부정성을 이성으로 환원하여 다시 긍정성으로 바뀌는 과정을 거친다. 숭고는 원래 인간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연의 거대한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전적인 타자를 나타내는 숭고를 근대주체는 내면적 표현 형식으로 갈무리한다. 지은이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을 물자체로 돌린 칸트 미학을 이야기하며, 미 앞에서도 숭고 앞에서도 (근대)주체는 자신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자기 안에 영구적으로 머무는 주체는 끔찍하고 기괴하고 파멸적인 것을 바깥으로 내몰아버린다.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묘사되는 타자들을 떠올려 보라. 바깥에 있는 괴물은 어떤 경우에도 근대주체의 이성을 침범하지 못한다.

 

가속이 붙은 근대의 시간은 영화처럼 머무름이 없는 영상을 우리에게 강제한다. 잠깐이라도 눈을 감으면 우리는 쉬지 않고 이어지는 이미지를 놓쳐버린다. 지은이는 롤랑 바르트가 제안한 스투디움풍크툼을 바탕으로 풍크툼이 사라진 현대사회를 그려낸다. 스투디움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것이다. 스투디움의 영역에 있는 관찰자는 사물을 눈요기로 생각한다. 유물을 스쳐 지나가는 여행객을 생각하면 된다. 여행객에게 유물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눈요기 대상일 뿐이다. 풍크툼은 관찰자에게 상처를, 상해를 입히고 전율을 낳는다. 풍크툼은 나를 노려보는, 내 눈의 주권성을 의심하게 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맹수의 시선으로 자신을 알린다. 그것은 눈요기로서의 사진을 온통 꿰뚫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57) 돌려 말하면, 풍크툼은 타자가 있는 자리를 의미한다. 타자의 시선이 관찰자를 휘감을 때, 사물에 담긴 의미는 한없이 증폭된다. 한밤중 시퍼렇게 불을 발하는 호랑이 눈과 마주친 주체를 상상해 보라.

 

호랑이 눈은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두려운 대상으로 근대주체를 압도한다. 신자유주의는 호랑이 눈과 같은 충격적인 타자를 어떻게든 사회 밖으로 내쫓으려고 한다. 그것은 지금 이 사회를 부정하는 눈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것들이 모여 이루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이렇게 타자가 완전히 제거된 동일자의 세계를 꿈꾼다. 타자로서 이 사회에 살려면 어떤 저항의지도 드러내면 안 된다. 갑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을은 조용히 갑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신자유주의가 정작 개인의 자유를 근본부터 침해하는 사회가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긍정하는 주체만을 인정한다. ‘자기계발이라는 말로 전해지는 긍정사회의 미학은 성공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사회를 만들어낸다. 국가와 사회는 더 이상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다. 개인이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부익부 빈익빈이 그 어느 때보다 심화되는 사회현상의 이면에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우는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재앙의 미학은 주체가 자신을 향유하는 만족의 미학에 대립한다. 재앙의 미학은 사건의 미학이다. 사소한 사건도, 빗물 한 방울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휘날리는 하얀 티끌 하나나 여명 속에서 고요하게 내리는 눈, 여름의 뙤약볕 속에서 풍기는 암석의 향기도, 자아를 비우고, 탈내면화하고, 탈주체화하고, 그럼으로써 행복을 주는 공허의 사건도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런 사건들은 자아를 몰수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재앙은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자기애적인 주체의 죽음을 의미한다. (65~66)

 

건강함과 매끄러움을 절대화하는 오늘날의 미의 통치kalokratie가 바로 미를 철폐한다. 그리고 오늘날 히스테리적인 살아남기의 모습을 띠게 된 단순하고 건강한 삶은 죽은 것으로, 좀비로 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살기에는 너무 죽어 있고, 죽기에는 너무 살아 있다. (70)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사회는 재앙을 그 무엇보다 싫어한다. 재앙은 매끄러운 사회를 침범하는 울퉁불퉁한 괴물과 같은 것이다. 자기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는 주체는 재앙이 불러오는 죽음과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한다. 2014년에 벌어진 세월호문제만 봐도 그렇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극우보수는 어떻게든 이 문제를 사회 바깥으로 내몰려고 한다. 그들은 행복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세월호와 같은 재앙은 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거에 매이면 행복한 미래는 올 수 없다는 논리. 그러면서 그들은 그 재앙이 일어난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재앙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고 외칠 뿐이다. 재앙은 사회에 퍼진 전염병과 같다. 그대로 놔두면 모든 사람들은 병에 전염되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이들의 논리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재앙을 고쳐야 할 암으로 보는 논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건강한 사람과 병에 걸린 사람으로 나누는 논리로 이어진다. ‘세월호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몸에 암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논리. 암에 걸린 사람은 치료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재앙을 떨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만이 재앙을 붙들고 지금 이 사회를 비판하는 데 열을 올린다. 신자유주의 사회를 휘감고 도는 건강의 미학에는 무엇보다 매끄러운 게 아름다운 거라는 자본의 논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자본은 이익이 되는 모든 사물들을 자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건강만큼 이익이 되는 게 어디에 있는가? 병원은 이제 자본을 낳는 거대한 화수분이 되었다. 병원은 돈의 유무로 생사를 결정한다.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는다. 생명보다 우위에 있는 자본은 그래서 한없이 냉혹하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돈이 많은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비가 곧 미덕인 사회는 돈이 곧 미덕이 되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소비할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소비자로서 왕 대접을 받을 수 있다.

 

소비자가 왕으로 대접받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미는 언제나 강제를 낳는다. 지은이는 보톡스와 신경성 과식증, 성형수술과 같은 문명 도구(현상)들에서 미의 통치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테러를 발견한다. 보톡스는 늙음을 자연스러운 미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주름이 많은 늙은 얼굴은 매끄럽지 않다. 얼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보톡스를 맞는다. 보톡스는 매끄러움(젊음이 아니다!)을 잃은 얼굴에 매끄러움을 돌려준다. 성형수술도 다르지 않다. 자본의 지배 아래 들어간 몸은 자본이 부여한 명령을 따라 아름다운 몸으로 개조된다. 자본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워지라고 명령한다. 아름다워져야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선전한다. 거식증과 같은 먹을거리 장애가 왜 나타나겠는가. 아름다워지라는 지상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한다. ‘아름다움에 이르려면(성공하려면!) 거듭해서 자기를 단련시켜야 한다. 누구를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라고 외치지만, 그들이 외치는 자기에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명령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신자유주의는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타자만을 신자유주의는 인정한다. 돌려 말하면 신자유주의에서 타자는 오로지 소비자만이 될 수 있다. 소비자가 타자라고? 소비자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을 의심 없이 따르는 존재라는 점에서 타자가 될 수 없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사회에는 타자라는 이름만 있을 뿐이다. 타자가 없는 사회는 동일자들로만 넘쳐난다. 동일자들이 넘쳐나는 사회를 우리는 좀비들이 들끓는 사회로 규정할 수 있다. 좀비에 물린 사람들(타자)은 좀비가 된다. 좀비는 좀비 외에는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좀비는 그래서 냉혹하다. 좀비는 같은 좀비에게는 무관심하고, 자신과 다른 존재는 어떻게든 좀비로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폭력적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살아남으려면 좀비가 되라고!’ 좀비는 부정성이 내포된 미를 모른다. 부정성은 타자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타자가 사라진 사회는 부정성은 사라지고 긍정성만 넘쳐난다. 동일한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이제 동일한 것을 긍정하는 존재만이 남는다.

 

좀비는 오로지 현재만 산다. 기억해야 할 과거도 없고, 만들어가야 할 현재도 없다. 좀비는 그저 흐느적거리며 좀비가 아닌 타자들을 좀비로 만드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좀비가 타자의 흔적으로 새겨진 예술미를 알 리가 없다. 지은이는 세계를 은유화하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라고 선언한다. ‘은유화는 이면으로 들어가는 힘을 가리킨다. 매끄러운 표면만 중시하는 사회를 향해 작가는 매끄러운 표면 뒤에 감추어진 울퉁불퉁한 것들을 보여준다. 울퉁불퉁한 것을 상처라고 해도 좋고, ()라고 해도 좋다. 얼굴에 난 상처는 매끄러운 얼굴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한다. 똥과 같은 추한(?) 사물을 보면 우리는 이내 얼굴을 돌린다. 타자로서 사물에는 사회논리에 깊이 침윤된 우리를 사회 바깥으로 이끌어내는 힘이 내장되어 있다. 지은이는 모든 것이 휘발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를 구속하는 타자의 힘을 강조한다. 매끄러워지고 아름다워지라는 자본의 명령과 맞싸우는 힘은 무엇보다 이러한 타자를 통해서 나온다. 미의 구원은 구속성의 구원(117)이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맥락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댓글 0 4명이 이 리뷰를 추천합니다. 공감 4
[13/60] 아름다움의 본질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하**기 | 2017.05.13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아마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저 눈으로 봐서 '보기좋음'이라기보다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영혼을 흔드는 그 어떤 경험일 것입니다. 한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대상을 보고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교감이 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예술, 모든 아름다움은 즉시적으로 보여지고 소비되는 감정이 아닌, 우리로 하여금 인지하고 발견하고;
리뷰제목

아마도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저 눈으로 봐서 '보기좋음'이라기보다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영혼을 흔드는 그 어떤 경험일 것입니다. 한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름다운 대상을 보고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만 교감이 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예술, 모든 아름다움은 즉시적으로 보여지고 소비되는 감정이 아닌, 우리로 하여금 인지하고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그런 능력에 대한 요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 그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해 낼 수 없는 법이니 말입니다. 포르노가 예술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감추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냄과 영혼은 커녕 사고에조차 이르지 않고 바로 감정을 자극하는 즉시성에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포르노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소비해야만 생명력을 갖는 '자본주의'와 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뭘 그렇게 생각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내가 바로 널 흥분시켜 줄게' 라고 말하는 포르노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걸 소비해' 라고 말하는 자본주의는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니, 이 체제에서는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시간도, 그걸 음미하고 영혼과 교감할 수 있는 그 시간도 모두 의미없다고 말합니다. 빨리 빨리, 지금 당장 우리가 가진 시간이라는 상품을 허비하지 말고, 그 시간 모두를 소비에 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름다움을 되찾은 길은, 자본이 시간에 뒤집어 씌운 '상품'이라는 보자기를 걷어내는 일이 먼저일 것이란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그들이 허비하지 말라고 하는 그 시간이라는 상품을, 아주 많이 허비하면서, 그들이 보기에 무의미하고 가치없는 그 무엇들을 하면서 말입니다. 삶의 속도를 줄이는 일, 삶을 천천히 살아내는 일 또한 우리가 아름다움을 다시 보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댓글 0 이 리뷰가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한줄평 (27건) 한줄평 총점 9.6

혜택 및 유의사항 ?
구매 평점5점
매끄러움의 역겨움을 들추어내다
이 한줄평이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YES마니아 : 로얄 비*씨 | 2022.06.17
구매 평점5점
추천합니다 볼만해요
이 한줄평이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이**국 | 2021.09.10
구매 평점5점
자본주의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 해부, 성찰 연작중 하나. 저자의 일관된 시선이 인상적.
이 한줄평이 도움이 되었나요? 공감 0
YES마니아 : 로얄 a********9 | 2019.12.18

이 책이 담긴 명사의 서재

  •  쿠폰은 결제 시 적용해 주세요.
1   10,800
뒤로 앞으로 맨위로 aniAla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