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뛰어난 하모니카 연주가가 자신이 가르치는 재능 있는 학생들을 데리고 블루스 음악가이자 하모니카 연주자인 킴 윌슨의 연주를 보러 갔다고 한다. 킴 윌슨은 단순하고 쉬운 곡인 [리틀 월터]를 연주했다. 한 학생이 말했다. “저건 나도 연주할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말했다. “정말 그럴까?”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찍은 사람들과 풍경은 누구라도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을 찍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한다. 마이어는 탁월한 시선과 완벽한 기술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그녀는 롤라이플렉스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담았고, 평생 그 일에 몰두했다. 음악가의 수업을 빗대어 말하자면 이론상 우리도 마이어가 보았던 세상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서문」중에서
마이어의 수수께끼 같은 삶과 재발견된 사진들은 대중과 언론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삶과 작품은 이미지가 중심인 문화의 도래와 영향력, 예술가의 삶에 대한 진실과 고정 관념, 유명 인사와 시장의 관계, 페미니즘, 타자성, 강박 관념 등 도발적인 문제의식을 자극한다. 복잡한 이 여성의 삶과 잊을 수 없이 아름다운 사진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20세기 중반까지 무명으로 살다 사라진 이 사진가는 21세기 초 수많은 전시회의 주제로, TV 프로그램의 소재로, 다큐멘터리 영화 의 주인공으로 다뤄지며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작품의 깊이는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드라마 같은 삶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충분히 조명 받을 가치가 있다.
페이스북이며 플리커, 인스타그램 등을 이용해 세상 어디라도 찍은 사진들을 전송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토록 단호하게 사진들을 감추어둔 비비안 마이어의 복잡한 정서와 부인할 수 없이 뛰어난 재능에 호기심과 당혹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최근 사진이 재정의되면서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급증한 관심과 소셜 미디어를 이용한 문화적 움직임을 불쾌해 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인간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정의하고 있다. 마이어가 그러했듯이.
사진에 비해서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마이어가 유명해진 것은 특이한 일이다. 대중 의 관심을 자극한 그녀 삶의 모호한 부분들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마이어가 무엇을, 왜 했는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빈틈을 채워보려는 수많은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심지어 계보 전문가들과 아마추어 사진 탐정까지 동원했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투성이다. 일관성 없고 부정확한 인적 기록, 사생활과 작품 활동의 엄격한 경계, 그리고 그녀를 알고 지냈지만 진정으로 잘 알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지인들의 오래된 기억 등은 그녀의 삶을 더욱 알 수 없게 만든다.
평생을 미혼의 보모로 살았지만 몹시 지적이었던 마이어는 늘 특권, 젠더, 인종, 정치, 죽음 등의 주제에 민감했다. 그녀가 찍은 행인들과 삶이 망가진 사람들, 5번가와 바우어리 거리, 모더니스트가 지은 예술적인 건물들과 빈민가 공동 주택, 그리고 공원, 배, 지하철이 드리운 그림자 사진에는 한 여성의 기민한 정서와 쉴 새 없이 관찰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