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아로와 검정 봉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어. 아로에게 깜장봉지라는 별명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야. 3학년이 되고 반이 바뀌었지만, 깜장봉지란 별명은 껌딱지처럼 아로를 따라다녔지.
아로는 갑자기 과다 호흡이 시작될까 봐 맘껏 뛰지도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도 못 질러. 큰 소리로 노래도 못 부르지. 하지만 아로는 자기 병을 겁내지 않았어. 아로가 아플 때마다 엄마가 홍길동과 슈퍼맨 이야기를 들려주었거든. 엄마의 이야기는 언제나 이렇게 끝났어.
“너도 나중에 위대하고 멋진 사람이 되려고 이렇게 힘들게 크는 거야.”
엄마 말을 들으면 힘이 솟았어. 지금은 다른 친구들처럼 뛰지도 못하고 검정 봉지 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지만, 언젠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쏘다니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테니까 말이야. ---pp.16~17
기태가 심술이 디룩디룩한 얼굴로 아로를 노려보았어. 그러더니 잽싸게 흙을 한 줌 주워서는 아로에게 확 뿌렸어. 아로가 눈을 비비며 캑캑거렸어. 눈에도 콧구멍에도 입에도 온통 흙이었어.
어느새 기태는 저만치 물러서서 킬킬 웃고 있었어.
“야! 중간똥!”
진짜 결투가 시작된 거야.
아로는 흙먼지가 들어간 눈을 끔뻑이며 신발주머니를 붕붕 돌렸어.
‘초능력아, 솟아라!’
마음속으로 외치며 신발주머니를 던졌어. 신발주머니는 기태 얼굴에 퍽! 하고 떨어졌어. 그건 초능력이 분명했어. 팔매질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아로가 그렇게 정확하게 기태 얼굴에 명중시키다니!
“깜장봉지 너, 죽었어! 어유, 어유, 재수 똥!” ---pp.91~93
“벤지 요원, 벤지 요원, 응답하라. 벤지 요원.”
아로는 공연을 보다 말고 벌떡 일어섰어. 그건 아로가 그토록 찾아다닌 엑스의 목소리였어. [중략] 벤지가 대답하지 않자 엑스가 다시 말했어.
“여기 있다는 거 알고 있다, 벤지 요원. 응답하라.”
그 뒤로도 엑스는 아로가 이미 알고 있는 말을 했어. 전에 엑스가 창고에서 아로에게 들려준 얘기들 말이야.
신비한 빛이 벤지를 비추고, 벤지는 초능력 슈퍼 영웅이 되었지.
“내 정체가 궁금한가? 나는 이 행성을 도우러 온 엑스라네.”
마지막 말까지 똑같았어.
아로는 이제야 모든 걸 알게 되었어. 엑스는 봉지 요원이 아니라 벤지 요원을 찾아왔던 거야. 무대 저편에서 울리던 엑스의 목소리는 다은이의 목소리였어.
결국 초능력은 없었어. 슈퍼 깜장봉지도 없었던 거야.
다은이는 그날 창고에 연기 연습을 하러 왔던 거야. 아로는 다은이의 목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뛰고 정신이 번쩍 들던 이유를 알 것 같았어. 엑스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그랬던 거야. ---pp.114~116
아로는 친구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 그걸 알아 가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한지도 알지. 그걸 깨달은 건 슈퍼 깜장봉지가 해낸 일일까, 그냥 깜장봉지가 해낸 일일까?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로는 수학 책을 꺼냈어. 그러고는 분수 단원을 폈어. 언젠가 책 귀퉁이에 써 두었던 이름들이 그대로 있었어. 아로는 지우개로 영웅들의 이름을 박박 지웠어. 깜장봉지 네 글자만 남기고서 말이야.
홍길동, 전우치, 박씨 부인,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헐크, 원더우먼, 파워레인저, 슈퍼 깜장봉지
아로는 조그맣게 뇌었어.
“그냥 깜장봉지여도 괜찮아.”
---pp.126~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