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말이에요, 소설가에겐 만년이 되어서도 다음 작품엔, 이번에야말로, 하는 마음이 있는 건가요?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써온 모든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한 것들의 퇴적이라는 생각도 있는 건가요?”
“지금까지의 작품이 전부 무의미하다고 여기지는 않아. 하지만 그동안 해온 일의 총량이 자신이고, 지금 만년필을 쥐고 있는 자신은 껍데기뿐이며, 죽지 못해 사는 거라고도 생각 안 하지. 역시 살아 있어서 ‘또 하나’의 일을 하고 있는 자신, 이라는 것이 재미있잖아.” - 250쪽, 8장 로뱅송 소설
9?11이 뉴욕에서 일어난 후에 도쿄에서 그에 버금갈 큰 승부가 꾀해질 리는 없다, 그런 일은 벌어질 수 없다고 마음놓고 있는 지식인으로서 자네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단 말이지? 그런 큰 승부를 생각하고 있는 놈들이 실제로 있다네. 이런 녀석들에 관해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는, 그 정도 레벨까지, 고기이, 자네의 상상력은 쪼그라든 건가? 어젯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네는,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 블라디미르나 싱싱을 쫓아오려고 하는 기특한 노인으로 보였었는데! --- p.160, 4장 비디오카메라에 도발되어 중에서
그리고 조코 씨의 초기 소설이 들어가 있는 책이 있으면 그것도 좀 보여주세요. 시게 씨는, 처녀작에서부터 2년 정도까지의 작품은 좋았는데, 하더라구요. 그런데 무스미 씨가 장정까지 해주었던 『Norte Epoque』로 망쳤다. 그걸로 조코 고기토도 끝장인가 싶었는데 아카리 씨가 태어남으로써 회복되었다고도 하더군요. 시게 씨는 그때 비로소 조코 씨와 다시 사귀어볼 마음이 들어 ‘조그만 노인’의 집을 만들었대요. --- p.236, 7장 개와 늑대의 시간 중에서
“시게의 대승부에 내가 한 가지 역할을 하려는 것은 그것만이 많은 수의 사망자를 내지 않을 수 있는 수단일 것 같아서야.”
“당신은 시게 씨가 하는 말을 믿고 계시는군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참에……. 시게 씨와 조코 씨는 정말 이상한 노인 2인조예요!” --- p.275, 9장 난데없는 용두사미1 중에서
딱 하나, 기억 나는 꿈이 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은 내가 죽는다는 걸 알고 있는 날 아침이었죠. 신문을 구석구석 읽으면서 핵 폐기의 낌새는 없구나, 단념하면서 엉엉 우는, 그런 꿈이었죠. 거두나 울고 있는 나는, 죽음을 향해 가는 육체적인 고통과 마찬가지인, 심리적 고통으로서의 실망감 또한 몇 시간 지나면 죽음으로 인해 소멸한다는 걸 알고 있었죠. 차라리 그런 안심 속에서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어요. --- p.351, ‘파괴하는’ 교육 중에서
싱싱, 나와 고기이는 분명히 로뱅송과 바르다뮈 식의 ‘이상한 2인조’야. 서로가 완전히 다른 인간이면서 쌍둥이 같은 구석이 있거든. 나는 지금 다케시와 다케 같은 작은 단위가 전 세계로 퍼질 수도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어. (중략) 그것은 곧, 내가 죽기 전 남은 몇 년 동안 미국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단념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세계를 뒤덮은 핵 상황이 자신이 죽을 때까지 어떻게도 변치 않는다고 생각하면 고기이 역시 이판사판으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를 수도 있는 노인이라는 거지. --- p.357, ‘파괴하는' 교육 중에서
어젯밤, 2층의 조코 씨가 주무시는 방이 어두워지고 나서 다케가 다케시에게 말했대요.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좀 더 결행시각을 앞당겨서 자고 있는 조코 씨까지, 함께 폭파해버리지 않을래? 우리의 폭파엔, 비폭력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앞뒤가 맞는 일이지. --- p.423, 14장 ‘이상한 2인조’의 합작 중에서
‘징후’ 칸은 열서너 살 아이라도 거기 놓인 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것을 읽을 수 있는 높이로 해두었지. 그들이야말로 내가 기대하는 독자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가 ‘징후’를 쓰는 방식은 말야, 거기 기록한 모든 파멸의 ‘표시’를 뒤집는 발상, 그것을 그들에게 불러일으키려는 거라네. 이 숲 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가, ‘숲의 집’에 찾아와서 …… 상자 속의 ‘징후’ 중에서 흥미로워 보이는 것부터 읽기 시작하는, 그런 아이들을 나는 생각하고 있어. 다시 말하자면 그들이 이제부터 나의 독자가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한 아이가 온 힘을 다해 ‘징후’로 읽어낸 모든 것에 저항하여, 계속 생각하고 살아나갔던 것을 한 권의 책으로 쓰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 소년이 쓰겠다고 마음먹고, 쓰는 기술을 연마하는 일에 온 생애를 바친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다, 이런 일 말야! 그리고 그 책이 현실적인 결과를 불러오지 않을까?
--- p.452, 종장 징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