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관련해 논쟁을 벌이던 두 해석자가 “내가 맞아. 내 《성경》 이해가 진리야. 실제로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야”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한바탕 소동과 드잡이로 이어질 것이다. …… 《성경》이 결국 또 다른 방식으로, 이어 또 다른 방식들로 이해될 수는 없을까?
---「1장 왜 다신론인가?」중에서
왜 다신론인가? 유일신론은 진리와 흡사하게 불가지론적 생각이며, 오직 끝까지 가는 투쟁이라는 맥락에서만 기능할 수 있습니다. 진리라는 생각과 흡사하게 견해들의 복수성, 그것들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필요성에서 태어났으며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동의라는 경우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유일하게 한 분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다른 견해들을 불법화하려는 의도를 입증합니다.
---「2장 이 종교는 어떻습니까? 종교에 그치지 않는 근본주의의 위협에 대해」중에서
젊었을 때 우리는 다소 다른 불꽃에 손가락을 태웠으며, 다소 다른 화상에 입김을 부는 데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신앙의 강요에, 저는 인간의 신격화에 말이죠. 우리는 겉으로는 적대적인 진영들에서 켜진 모닥불에 의해 화상을 입었습니다. 우리 중의 하나는 메시아 진영에 속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프로메테우스의 야영지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두 진영의 불꽃 모두 인간의 한계라는 동일한 이단을 위해 쌓아올려진 장작더미 위에 붙여졌습니다.
---「3장 지식인들」중에서
인간적으로 가능한 것이 실천될 수 있느냐는?또는 그와 정반대로 무시되고 간과되느냐는?오직 사람들에게만 의존합니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며, 하느님은 그렇게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신만 가질 수 있는 전지전능함을 갖고 장난을 치는 것은 피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신이 아니며, 단지 인간적인 힘만으로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 힘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을 소중하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드는 데 충분합니다.
---「4장 희망의 원천들」중에서
“인간의 삶의 실천과 경험들이 합쳐지고 함께 짜이기 위한 토대입니다. 이렇게 합쳐지고 함께 짜여 지는 것은 신뢰, 우정, 존경, 협력에의 욕망에 의해 촉진됩니다. 지평들의 융합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세상의 소동으로부터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 속에는 세계의 구원, 적어도 변형을 위한 모종의 열쇠가 들어 있지 않을까요?
---「5장 지평들의 융합」중에서
종교는 가장 위대한 보물, 문명의 가장 강력한 모터로 함양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양되어야 하는 것은 진정한 종교, 즉 죽은 텍스트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감정들과 유용한 행위들이다. 진정한 종교는 의지에는 힘을, 가슴에는 평화를, 지성에는 날개를 마련해준다. 이단 심문소 대신 그것은 관용을 대변한다. 분열 대신 공감을, 저주 대신 축복을 대변한다. 그것은 상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박해하지 않는다. 상이한 신조는 그저 한분의 하느님에게 이르기 위한 다양한 경로일 뿐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학과 논쟁을 벌이지 않는다. 조만간 과학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진리들을 확인해줄 것임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6장 새로운 전통 창조하기」중에서
레싱에게 논쟁의 종말은 인간성의 종말에 버금가는 것일 것입니다. 인간 존재에게서 창조적인?이것은 인간의 본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양도 불가능한 본성을 이룹니다?모든 것은 인간의 다양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것은 인간의 다양성 때문이 아닙니다. 다양성을 거부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고집이 그것을 불러옵니다. 인간들 사이의 평화, 연대, 호의적 협력의 예비 조건은 인간적일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데 동의하고 그러한 다수성이 요구하는 공존 모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7장 신인가 신들인가? 다신론의 부드러운 얼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