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민아, 독하게 마음먹고 어미 말을 들어라. 백일도 안 된 아기가 대문 앞에 버려졌다. 형이 미국으로 가면서 아기를 해외 입양 시키려 하는데 그, 그래서는 안 되잖아, 그렇지? 너의 의견을 들으러 온 거야.”
멍한 시선이 된 태민의 눈길을 받고 있던 노인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고갯짓을 보였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겠다고, 얼굴도 못 본 아기를 버립니까? 제가 평생 혼자 살지언정 아기는 버릴 수 없습니다! 어머니, 제가 이곳에서 나갈 때까지만 아기를 지켜주세요. 어머니!…….”
--- p.12~13
새벽의 미명을 받으며 영원히 열리지 않을 듯했던 철문이 열렸다. 시원한 바람이 먼저 태민의 얼굴에 와 닿았다. 깊게 심호흡을 하고 철문을 나서는 태민의 눈가로 회한의 물줄기가 주룩, 흘렀다. 그 세월은 혼자만의 고통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했던 아픔의 세월이었다.
태민이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던 아이, 벽에다가 등을 붙인 채 낯선 태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들비야, 아빠야! 어서 가봐!”
조금 망설이던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와 태민이 벌리는 품속으로 들어가 안겼다.
“피는 못 속이는구나! 그렇게 낯가림이 심하던 애가 지 아비는 알아보는구나. 흑!…….”
어머니의 한숨 섞인 울음에 아이가 덩달아 울음을 토해냈다.
“울지 마, 울지 마라. 이제는 아빠가 너를 지켜주는 등댓불이 되어줄 거야.”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준 태민이 읊조리곤 입가로 미소를 지었다.
--- p.109
가녀린 팔에 수없이 멍들어버린 주삿바늘 자국이다. 새 것으로 바뀌었는지 가득 찬 혈액 주머니에서 핏물이 떨어진다. 바싹 말라버린 볼, 눈두덩 자체가 사라져버린 눈꺼풀. 툭 불거진 광대뼈만 보이고 살가죽이 뼈에 붙어버린 얼굴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다.
“들, 들비야!…….”
울컥 눈물이 쏟아져 차라리 자신의 가슴을 찢고 간을 뜯어내 아이에게 주고 싶다. 그렇게 아이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간을 뜯어서 주고 싶다. 아이가 살 수만 있다면…….
밭은 신음을 토해낸 아버지가 몸을 돌려 아크릴 창에 등을 붙인다.
--- p.246
“지금에 와서 찾아온 이유는?…….”
“아기를 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떳떳하지 못하지만, 흑!…….”
얼마나 정전된 시간이었을까? 납빛보다 더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휘어감은 적막이. 으스스 어깨를 떤 그녀가 힘에 부쳤던지 고개를 들었다.
“용서하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에요. 아기가 버려지고, 혼자서 이겨내고 버텨온 세월을 이해할 수는 없는지 알고 싶어요.”
“모든 것이 엎질러져 흙탕물이 된 지금에 와서 이해하고 용서할 게 뭐가 있겠어? 아기는 형이 미국으로 데리고 들어가 해외입양 시켰어. 우리 사이에 이제 아기는 영원히 없어.”
“안 돼요! 그럴 수는 없는 거예요! 어떻게 아기를…….”
그럴 수는 없다고, 어떻게 아기를……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한계였으리라. 결국 무너져 내린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추위에 떠는 가랑잎마냥 흔들렸다. 한시도 가슴에서 지워본 적이 없던 그녀의 여울목을 지워보려는 태민의 눈빛에서 고뇌가 진득하게 묻어났다.
그녀를 이해하고 용서는 할 수 있어도 그녀에게 마음을 열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말처럼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해도 버려진 아이가 밤마다 엄마의 품이 그리웠을 아픔이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59
회복실로 들어가 입술을 다물지 못하는 아버지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붉어진 눈망울에 물기가 가득하다.
“아버님, 오셨어요!”
여의사의 말에 아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다가 힘겹게 떠진다.
“아, 아, 빠!…….”
자신을 부르는 아이의 손등에 얼굴을 묻은 아버지의 오열이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잠시 아픈 꿈을 꾸다가 깨어난 거야. 아빠가 옆에서 지켜주니까 무서워하지 마. 사랑한다, 내 딸아!…….”
--- p.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