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6년 0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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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68쪽 | 246g | 128*205*20mm |
ISBN13 | 9788932029085 |
ISBN10 | 8932029083 |
포함 도서 1만 5천원↑구매 시, 블랙 보틀머그 증정 (택1/포인트 차감, 한정수량)
발행일 | 2016년 0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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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68쪽 | 246g | 128*205*20mm |
ISBN13 | 9788932029085 |
ISBN10 | 8932029083 |
1부 농담 한 송이 그 그림 속에서 이 가을의 무늬 이국의 호텔 베낀 포도나무를 태우며 네 잠의 눈썹 병풍 2부 딸기 레몬 포도 수박 자두 오렌지 호두 오이 포도메기 목련 라일락 3부 동백 여관 연필 한 자루 우연한 감염 문득, 너무 일찍 온 저녁 죽음의 관광객 내 손을 잡아줄래요? 나비그늘 라디오 온몸 도장 아침식사 됩니다 돌이킬 수 없었다 아사(餓死) 나의 가버린 헌 창문에게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4부 수육 한 점 사진 속의 달 발이 부은 가을 저녁 방향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루마니아어로 욕 얻어먹는 날에 매캐함 자욱함 운수 좋은 여름 섬이 되어 보내는 편지 유령들 빙하기의 역 가을 저녁과 밤 사이 너, 없이 희망과 함께 지구는 고아원 푸른 들판에서 살고 있는 푸른 작은 벌레 겨울 병원 5부 눈 엄마와 나의 간격 네 말 속 지하철 입구에서 가짓빛 추억, 고아 설탕길 카프카 날씨 1 언제나 그러했듯 잠 속에서 카프카 날씨 2 카프카 날씨 3 밥빛 나는 춤추는 중 해설 | 저 오래된 시간을 무엇이라 부를까 | 이광호(문학평론가) |
이 리뷰는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에 관한 리뷰이며,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라는 시집의 제목을 보자마자 가슴 한 켠이 먹먹한 기분이었다. 이 시집은 읽기 시작하자마자 한번에 다 읽어내리기에는 아직 내가 많이 부족하다. 버터 풍미 가득한 식빵을 조금씩 뜯어 먹으며 음미하듯이, 천천히 뜯어 읽어내리고픈 그런 시집이다.
'기차역'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누군가와의 만남 그리고 어딘가로의 떠남이다. 이 시집의 제목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는, 이 시집에 실려있는 '빙하기의 역'이라는 시에 있는 문장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 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슴 절절한 만남과 떠남을 느끼게 해주는 시집이었다.
고인이 된 시인은 어느 별에 하차했을까.
영원히 도착하지 않을 것 같던 기차를 기다리며 역에 서 있던 시인은
결국 도착한 기차를 타고 역을 떠났다.
시인이 도착했을 곳은 이 세상에서 상상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어떤 짐작과 상상력도 오랜 시간을 관통한 애증의 기차보다 더 간절할 수 없다.
#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레몬 中
*** 시인이 존재하던 시간과 공간은 후각을 자극하는 상큼한 레몬 향기가,
마음을 고백하고 실컷 울어버릴 시간도 모자른 여름 밤을 더욱 끈적하게 엉켜놓는다.
#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中
***안고 싶거나 울고 싶은 꿈과 마음의 욕망은 감히 지도에 표현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도 찾아갈 수 없고, 계절 안에 존재하거나 머물 수도 없어서,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어서 아쉬움마저 아득하게 미안해진다.
#
무엇이었어요, 당신?
아마도 내가 이 세상을 떠날 적 가장 마지막까지 반짝거릴 삶의 신호를 보다가
꺼져가는 걸 보다가 미소 짓다가 이건 무엇이었을까 나였을까 당신이었을까
아니면 꽃이었을까 고여드는 어둠과 갑자기 하나가 될 때
...
생각해보니 우리 셋은 연인이라는 자연의 고아였던 거예요. 울지 못하는
눈동자에 갇힌 눈물이었던 거예요.
-그 그림 속에서 中
***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연스럽게 고아가 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슬프거나 그리운 눈동자 안에 갖히고 만다.
#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우리는 만났다
얼어붙은 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빙하기의 역에서
무언가, 언젠가, 있었던 자리의 얼음 위에서
우리는 오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처럼
아이의 시간 속에서만 살고 싶은 것처럼 어린 낙과처럼
그리고 눈보라 속에서 믿을 수 없는 악수를 나누었다.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내 속의 신생아가 물었다, 언제 다시 만나?
네 속의 노인이 답했다, 꽃다발을 든 네 입술이
어떤 사랑에 정직해질 때면
내 속의 태아는 답했다, 잘 가
-빙하기의 역 中
*** 생을 시작하는 신생아가 되어, 세상을 떠나는 소감을 물어보지만,
다시 만나길 바라는 욕망은 정직한 답을 알려준다.
"잘 가."
***
당신이 타고 간 기차는 지금 어디에 도착했나요?
도착한 곳은 자두가 익어가는 끈적한 여름인가요, 낙엽으로 도배된 가을인가요,
아니면 모든 게 빙하처럼 꽁꽁 얼어붙는 겨울인가요.
태양이 작열하는 한 낮인가요, 은은한 달빛이 내려오는 캄캄한 밤인가요.
당신이 남긴 목소리가 차곡차곡 담긴 행간들처럼 또 다른 기차역들엔,
무수한 사연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과 마음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새로운 기차를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