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잇는 독일 비판이론 2세대의 대표적 사상가
우리에게 위르겐 하버마스는 사회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를 잇는 독일 비판이론 2세대의 대표적 사상가로서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반계몽주의적’ 이성비판에 맞서 이성의 해방적 기능이 여전히 유효하며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회정의를 지향하는 ‘근대’라는 프로젝트는 오히려 미완(未完)이라서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저『의사소통행위이론』(1981)은 모든 영역에서 도구적 합리성이 무분별하게 관철됨으로써 ‘근대’라는 기획의 왜곡과 오류가 초래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중심으로 한 균형 잡힌 사회운영을 문제해결 방안으로 입론한 것이다. 이 이론은 법과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이론적 고찰인 그의 두 번째 대표작『사실성과 타당성』(1992)에서 토론정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법치국가론으로 발전되었다.
본래 철학을 전공한 하버마스가 이렇게 사회이론의 정립에 매진하게 된 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통해 인간해방에 기여하는 데 학문의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1968년 발간한 인식론적 저술(『인식과 관심』)에서 당시 대표적인 철학적 조류인 실증주의와 해석학을 공히 비판하면서 진정한 “인식비판은 사회이론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후 그는 이론철학적 문제들을 뒤로 밀어둔 채 ‘해방적 인식관심’의 구체적 실천으로서 비판적 사회이론의 정립에 매진하게 되고, 그 결과가 바로 의사소통행위이론이다.
자연주의 문제와 실재론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
이렇게 사회이론의 정립에 매진하던 그가 1996~1998년 사이에 일련의 순수 이론철학적 논문들을 쓰고, 이것을 한데 묶은 뒤 방대한 서론을 통해 체계적 성격을 부여한 저서가『진리와 정당화』이다. 물론 하버마스는 철학적 관심을 놓은 적이 없다. 오히려 꾸준히 철학적 저술을 발표하고 토론에 비판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국제 철학계의 한 축을 이끌어왔다는 것이 사실에 부합한다. 그러나 그가 순수 이론철학적 문제들이라고 부르는 자연주의 문제와 실재론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는 그의 말마따나 30여 년 전『인식과 관심』이후 이 책이 처음이다.
그가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외적 계기 중 하나는 물론 오랜 지기이자 토론상대였던 리처드 로티와 그의 제자 로버트 브랜덤의 저술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학문적 계기는 그가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정립하는 과정 중에 이룬 화용론적 전회에 따라 새로 추구하게 된 이론철학적 방향을 체계적으로 입론해보겠다는 야망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방향을 칸트적 실용주의라 칭한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이 ‘칸트적’인 이유는 인간의 인식이 미리 구조화되어 있다는 선험적 시각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어학적 전회를 경험한 하버마스의 경우, 칸트 철학에서의 선험적 인식구조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다. 모든 경험은 언어로 삼투되어 있어서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은 실재의 파악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언어의 선행적 규정성은 칸트 식의 선험적 인식구조와 같이 탈역사성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자연사적 학습과정의 산물, 즉 자연적 진화의 결과라는 것, 그리하여 경험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하버마스의 생각이다(이러한 자신의 입장을 하버마스는 “약한 자연주의”라 칭한다. 선험적 조건을 인간 두뇌의 진화에 따른 것으로 보는 자연과학적 환원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 탈선험화를 행하는 이론적 토대가 바로 실용주의이다. 실용주의는 인식과정을, 인간이 삶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해결하고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오류를 수정하며 반론에 대해 재반론하는 지적 과정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칸트적 실용주의는 인식을 ‘자연의 거울’로 보는 전통적인 재현주의적 인식모델도 비판하지만, 동시에 로티처럼 재현주의를 비판하면서 ‘진리’ 개념 자체까지 부인하는 맥락주의적 상대주의도 수용하지 않는다. 하버마스는 성공적인 정당화의 결과가 그 정당화를 수행하고 수용하는 특정 의사소통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객관적 타당성을 가질 수 있으며, 이러한 정당화에 “참”이라는 술어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특정 맥락을 초월하는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길은 적어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일정한 정당화가 처해 있는 맥락의 “특정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즉 각각의 의사소통 맥락을 초월하는 이상적 조건을 상정하고 이 조건 하에서 정당화가 가능한 명제의 “진리”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으로, 하버마스는『진리와 정당화』이전에 이러한 합의이론적 진리개념을 내세웠었다. 이른바 “이상적 발화상황의 조건 하에서의 ?당화가능성으로서의 진리” 개념이 그것이다. 이 개념은 많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이상적 조건의 상정이 진리 개념이 적용되어야 할 현실 속의 정당화 실천관행과 전적으로 유리된 비현실적 가정이며, 그래서 학문적 유용성을 결여하고 있다라는 비판이 결정적이었다.
실천 속에서의 성공 개념과 결부시키는 실용주의적인 비(非)인식적 진리개념
하버마스는『진리와 정당화』에서 여전히 인식론적 사고틀에 사로잡혀 있는 이러한 진리개념을 버리고 또 다른 하나의 진리개념을 제시한다. 진리 개념을 인식적 개념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의 성공 개념과 결부시키는 실용주의적인 비(非)인식적 진리개념이 그것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참이라고 간주한 것이 우리의 실제적 삶 속에서 객관세계의 무언가에 “걸려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것의 진리성을 의심하고 검증해보아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고, 그 결과 새로운 정당화 과정에 돌입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객관세계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적어도 아직까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우리의 인식에 대해 그 인식이 객관적 진리성을 가진다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인식도 언젠가는 객관세계의 이의 제기에 걸려 의심 받고 폐기될 가능성, 즉 오류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비(非)인식적 진리개념은 하버마스로 하여금 언어학적 전회, 특히 화용론적 전회가 동반하는 맥락주의와 회의론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국지적 맥락 속의 정당화를 넘어서는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견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다면 비판이론가 하버마스는 왜 이렇게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에 집착하는가?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부인한다고 해서 그가 옹호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인간해방의 가능성이 위협 받는가? 이론철학적 입론의 방향설정이 실천철학적 입장을 규정한다고 성급하게 결론내릴 수는 없겠지만, 하버마스는 객관적 진리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것이 도덕적 진리 내지 규범적 올바름 개념을 견지하는 데 불가결하다고 믿는다. 비인식적 진리개념을 배경으로 하여서만 규범적 올바름 개념의 구성적 성격이 뚜렷이 부각되고, 진리와 유사한 절대적 타당성을 갖는 보편윤리의 가능성의 조건을 창출해야 할 필요성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판이론의 선배 마르쿠제의 다음과 같은 말을 모토로 내세운다. “자유와 진리 간에는 본질적 연관성이 존재하며, 진리에 대한 그릇된 견해는 그것이 무엇이든 동시에 자유에 대한 그릇된 견해이다.”
“진리”와 “정당화”를 핵심 화두로 하고 있지만, 목차를 일별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훨씬 광범위하다. 철학사와 현대 영미와 유럽대륙의 철학적 논의를 꿰뚫고 있는 하버마스는 로티가 이 책을 논평하면서 말했듯이 “헤겔과 하만 그리고 하이데거만이 아니라 데이빗슨과 셀라스 그리고 더밋에도 정통한 그야말로 몇 안 되는 철학자 중 하나여서” 이 책 한 권으로 현재까지의 철학적 흐름과 작금의 세계 철학계의 주요 논의를 개괄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이론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철학자가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철학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피력한 저서를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너스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읽기 쉽지는 않으나 노력한 만큼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을 받는다. 들인 노력이 아깝지 않을 책이다. 일독이 아니라, 재독, 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