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0월 말부터 한 달 동안 영국 BBC 방송은 영국인 100만 명을 대상으로 전화 및 인터넷 설문조사를 하여 ‘위대한 영국인 Great Britons’ 100명을 선정했다. 그 결과, 대문호 셰익스피어, 엘리자베스 1세, 근대과학의 아버지 뉴턴 등으로 대표되는 영국 역사상 유수한 인물들을 제치고 윈스턴 처칠이 전체의 28.1%, 즉 456,498표를 얻어 당당히 ‘가장 위대한 영국인’의 자리에 올랐다.
BBC가 제시한 다섯 가지 항목, 즉 Legacy(후세에 미친 영향력), Genius(천재성), Leadership(리더십), Bravery(용기), Compassion(동정심)에 대해서는, 처칠의 가장 뛰어난 점으로 Leadership을 1위로 뽑았으며 그 다음에는 Bravery와 Legacy를, 그 다음에는 Genius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Compassion을 꼽았다.
영웅 처칠은 2차 대전 때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가 비록 유서깊은 명문가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는 하나, 투철한 의지로 자신의 결점을 하나하나 고쳐가려는 젊은 시절의 노력이 없었다면 훗날 위대한 영국인으로 추앙받지 못했을 것이다. 처칠은 뛰어난 지도력 이외에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다운 필력과 명문장, 명연설, 순간순간 기지를 발휘하는 재치와 유머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젊은날 그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같은 역사·철학서를 탐독하여 연설의 격조 높은 어법을 익혔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처칠〉편) 뿐만 아니라 군인으로 인도에서 복무하는 동안 정치학·경제학의 고전을 늘 가까이 하는 등 공부를 열심히 했고, 말할 때 혀가 꼬부라지는 경향이 있어서 말수가 적었으나 이 결점을 교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즉석에서 말하는 것이 서툴렀던 까닭에 그는 연설 전에 원고를 미리 써서 암기했고, 그의 명연설들은 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위와 같음)
이런 노력과 철저한 자기관리 덕분에 그는 후세 사람들이 전범으로 삼을 만한 연설과 행적을 남겼다. 재작년 9·11 테러 당시 부시 대통령의 측근들이 부시 대통령에게 부지런히 익히게 한 것도 바로 처칠의 명연설이었다고 한다. 전국적인 위기상황에서 강한 투쟁의지를 불태워 국민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용기를 일깨워준 처칠의 연설을 부시가 배울 필요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맡은 처칠이 연단에 올라가 뭔가 근사한 축사를 기대하고 있는 관중을 향해서 “포기하지 말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단 두 마디를 하고 연단을 내려왔다는 ‘전설’도 처칠 정도의 내공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기행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재치에 관해서도 많은 일화가 전한다. 술 담배를 일체 하지 않던 몽고메리 원수가 자기는 술 담배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건강을 100퍼센트 유지한다고 은근히 비꼬자, 처칠은 즉각 “나는 술을 무척 즐기고 담배도 아주 좋아하지. 그래서 항상 200퍼센트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네” 하고 응수했다는 일화, 처칠이 몹시 못마땅해하던 사위가 2차 대전 때 가장 위대한 정치가가 누구였냐고 물으니까 “그야 당연히 뭇솔리니지. 그자는 사위에게 총을 쏠 정도로 배짱이 있었던 사람이니까” 했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며 우리를 즐겁게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2차 대전 당시 처칠은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러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의회의 압력으로 중립을 선언한 터라 무척 난감한 상태였다. 호텔방에서 기분좋게 샤워를 하고 몸에 타올만 두르고 있던 처칠은 갑자기 문을 밀고 들어오는 루즈벨트를 보고는 깜짝 놀라 일어서는 바람에 타올이 벗겨져 그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 말았다. 서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루즈벨트가 얼른 방을 나가려고 하자, 처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각하, 저는 숨길 게 없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알몸처럼 모든 게 투명하고 솔직하지요. 벗겨내려도 벗길 의혹이나 검증이 필요없습니다. 가면 없는 알몸으로 도움을 청하려 합니다.” 그리고는 확고한 의지와 소신을 밝히자 이에 감동한 루즈벨트는 처칠의 요구에 응했고, 결국 양국 정상의 알몸대면이 대서양회담으로 이어져 연합군의 승리를 가져왔다고 한다.
《폭풍의 한가운데》에는 처칠의 이런 인간적인 매력이 듬뿍 담겨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고비고비에서 전체를 통찰하는 안목으로 온갖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야전군사령관의 지혜, 포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조크를 건네는 거인의 여유, 과학문명의 발달을 예측하고 인류가 갈 길을 제시한 지도자의 혜안,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어떻게 삶을 즐길 수 있는가를 아낌없이 가르쳐주는 친구 같은 편안함까지, 그야말로 폭풍의 시대를 살아간 한 거인의 풍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