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9년 05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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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8쪽 | 723g | 142*223*30mm |
ISBN13 | 9788901095714 |
ISBN10 | 8901095718 |
발행일 | 2009년 05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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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28쪽 | 723g | 142*223*30mm |
ISBN13 | 9788901095714 |
ISBN10 | 8901095718 |
책머리에 프롤로그: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위하여 서재1 걷어차야지만 자리에서 일어난다 -로쟈의 문학 노트 당신에게 클래식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도망, 즐거운 저항 : 책읽기에 대하여 아직도 러시아 문학인가 : ‘몰락 이후’의 러시아 문학 러시아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필요한가 문체 혹은 양파에 대하여 : 김훈, 김규항, 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 누가 희망을 말하는가 서재2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로쟈의 예술 리뷰 미용사 판타지에 대하여 생명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나쁜 피」의 한 장면에 대한 생각 로망스 대 포르노 :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 두 편 기적이란 무엇인가: 쿠스투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에 기대어 아버지의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 김기덕의 「사마리아」 읽기 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 김기덕의 「빈집」 읽기 고요한 삶과 최대한의 삶: 황혜선의 정원 이야기 서재3 아, 이 겸손한 느릅나무들 -로쟈의 철학 페이퍼 늙어가는 느릅나무들 : 아줌마 철학 vs. 이데아 철학 “여자의 해결책은 임신이다” : 니체와 여성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 법과 정의 사이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 잠자는 숲 속의 벤야민 철학적 로고스와 문학적 로고스 서재4 내 머리는 불타고 있어요 -로쟈의 지젝 읽기 내가 지젝을 읽는 이유 유럽은 무엇을 원하는가 : 지젝의 『이라크』 읽기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테러리즘 : ‘베슬란의 비극’에 부쳐 그리스도에서 레닌으로 지젝과 함께 한국 문학을 읽다 레닌주의와 대중 유토피아 서재5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 -로쟈의 번역비평 경연으로서의 번역 : 『햄릿』의 경우 오역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유명사의 오역에 대하여 번역 비평은 노예의 도덕인가: 원한에서 양심의 가책까지 “내 울부짖은들 누가 들어주랴!”: 릴케의「두이노의 비가」읽기 에필로그: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닫으며: 로쟈의 독서문답 발문: 로쟈와의 만남에 대하여 _천정환 |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읽었다. 예전에 오마이뉴스 특강 동영상을 본 적이 있었지만 마지막에 사르트르와 지젝과 레닌의 공부(공부일까? 학습일까?)에 대한 이야기 말곤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아 기분 좋은 낯섦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실은 격주로 일요일마다 하고 있는 독서모임에서 안톤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다뤄서 러시아문학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는 부분도 있었고,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모스필름 90주년 특집으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씨네토크 자리에서 이현우 선생님을 직접 뵙고, 질문도 드리면서 내 나름대로 인연을 본격적으로 튼 기념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을 꺼내든 것이었다(어느 누가 적은대로 그는 눈이 깊은 미남이었다).
니진스키로 시작해서 에밀 시오랑으로 끝난다고 말할 수도 있는 이 책은 문학, 영화, 미술, 인문학 전반을 넘나들며 사유의 고공비행보다 섹시한 저공비행을 보여줬다. 지젝도 지젝이었지만 데리다의 <법의 힘>에 대한 독후감이 압권이었다. 아감벤을 읽으면서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와 데리다의 법의 힘을 독서리스트에 올려놨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좀 더 읽고 읽은 다음에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어 묵혀 두었는데 로쟈의 친절한 패러프레이징 덕분에 읽었던 부분 또 읽는 버퍼링을 겪었지만 나름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 노트에 적은 구절을 나누고자 한다.
해체와 정의의 가능성. 법과 정의 사이. <법의 힘>
1부 <법에서 정의로>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
계산 가능한 것 : 법 - 계산 불가능한 것 : 정의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선다.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일 따름이다.
해체/와/정의/의/가능성 : 각각에 대해서는 기꺼이/충분히 말해볼 수 있지만 합쳐진 어구에 대해 말하는 건 곤란.
'판단을 허락해주는 판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잠깐 나의 생각. 이 구절을 읽으면서 보르헤스를 읽으면서 어렴풋이 가졌던 질문이 다시 부상했다. 추상적으로 표현해보자면 언어와 정신의 미묘한 관계랄까. 인간들이 생각이라는 걸 하고, 거듭하고, 심지어 사유를 하고,(어머나) 사상 수준의 정신작용을 해버리는 바람에 생각을 판단하는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옳고 그름, 선과 악, 생각해놓고 자신도 알 듯 모를 듯한 헷갈려서 문자로 정리해 기록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대한 생각이 기록으로 남겨지고[성문법], 사람들은 생각에 대한 생각을 수용하기도 하고 대결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사고관을 만들어갔을 것이다. 불문법과 성문법. 책과 문자가 빈곤하던 시절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성장했을까? 어휘는 언제 어떻게 폭발적으로 증가했을까? 문명이 건설되면서부터였을까? 밥 먹고, 사냥하고, 채집-수렵에 쓰는 일상적 대화만 했다면 고차원적 생각을 하기 힘들었을까? 그러면 누가 언제 어떻게 왜 고차원적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또 고차원적 생각은 무엇인가? 개별적 현상이 아닌 보편적 원리를 구하는 생각? 형이상학적인 생각? 죽음과 신에 대한 생각 같은 것은 고차원적이라 분류해도 적당한가? 눈을 감고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몸이 차갑게 굳은 가시적, 경험적 생각에서 몸은 차갑게 굳고 몸 안에 있던 정신-영혼이 다른 어딘가로,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한 신의 품으로 갈 거란 생각은 고차원적인가? 그냥 단순한 헛소리일지도 모르는데도? 그 고차원적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정신과 삶이 한층 고양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렇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이 단순히 기계의 고장처럼 받아들여졌다면 죽음의 프리즘으로 삶의 의미를 반추하고 성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삶과 죽음의 중간에 위치시킴으로써 인간은 어떤 경계를 넘어갔을 것이다. 니체가 인간을 짐승과 신의 교량이라 표현한 것처럼 짐승의 경계를 넘어갔으나 신에 다다르지 못한, 그래서 항상 '긴장'이란 상태 속에서 실존을 추구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다시 본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생각에 대한 생각 혹은 고차원적 생각들 중에 몇몇은 후세에 남겨졌을 것이다. 그 생존의 기준이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권력자의 머리에서 나와서 그랬는지 몰라도 어떤 생각은 후세에 전해지고, 어떤 생각은 사라졌을 것이다. 좀 더 큰 범위에서 생각해본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에피소드처럼 힘 있는 문명이 다른 문명의 정신적 뿌리를 완전히 박멸하고 말살해 사상, 민족의 정신이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일제강점기가 더 길어졌다면 혹은 아직까지 끝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지구가 멸망한다면 성경도, 호머의 일리아드, 오뒷세이아도, 코란도, 불경도, 일반상대성이론도 모두 사라질 것이다. 멸망하기 전에 다른 곳에 저장해두거나 다른 지적 생명체에게 지식을 전수한다면 인간의 정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반대로 지금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지 물어보자. 고등학교 수학에서는 미적분을 가르치고, 한국 국어교육에서는 윤동주와 이상, 김수영을 읽고, 제1외국어로 영어를 배운다. 현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살고 있다고 답안지에 써도 오답은 아닐 테고, 미성년자를 성폭행해도 10년 이상의 형을 선고받았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없다. 4대 의무라고 해서 납세를 하면 4대강에 쏟아붓고, 국방의 의무라고 군대를 가면 집단적으로 폭행당하는데 군은 이 사실을 알아도 입을 다물고 있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고등학생으로 살면서 공부를 하지 않는 여동생 때문에 골머리가 앓는다.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다른 걸로 무의미하게 시간을 떼웠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여동생을 중독시킨 스마트폰의 최초 발명자라고 알려진 스티브 잡스에게 욕을 퍼붓는다. 그러다 잡스처럼 자식에게 스마트폰을 쓰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부모님의 탓으로 돌린다. 자식들을 위해 힘쓰지만 고등교육까지 받게 못 받은 부모님의 성실한 무지에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인류 역사 이후로 한 번도 노동자 혹은 노예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나쁜 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땅이 뒤집히고, 천지개벽 속에서도 한 번도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성실한 영혼에 대해.(부모님의 경우 내가 열심히 해서 나중에 효도하면 되는데, 아무리 대화를 시도해도 변화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동생의 경우 답답하다)
다시 <법의 힘>으로 돌아오자.
"분명 적용되지 않는 법들이 존재하지만, 그러나 적용가능성[집행]이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 (강제적인) '집행'이 없다면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법의 힘과 폭력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이렇듯 힘이 법에 내재적이며 본질적이라면, (정당한) '법의 힘'과 (부당한) '폭력'은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폭력 Gewalt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
적법한 권력/권위와 공적인 힘을 의미하기도 함.
데리다는 영어에서 '법=힘', 독일어에서 '힘=폭력' 등식을 끌어온다. 고로 법=폭력?!
force
gewalt macht
해체야말로 법과 정의의 문제와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다.
"해체적인 질문하기는 노모스와 퓌지스, 테시스와 퓌지스의 대립, 곧 한편으로 법, 관습, 제도와 다른 한편으로 자연의 대립뿐만 아니라 이것들이 조건 짓는 모든 대립, 예컨대 실정법과 자연법의 대립을 동요시키면서 복잡하게 만들면서 출발하며 "이러한 해체적 질문하기는 전적으로 법과 정의에 대한 질문하기, 법과 도덕, 정치의 토대들에 대한 질문하기"이기 때문이다.
정의의 문제야말로 해체의 시작과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다!
[팡세] 정의, 힘 - 정당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정당하며, 가장 강한 것이 지속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 없는 힘은 전제적이다.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 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어떤 이는 정의의 본질은 입법가의 권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주권자의 편의라고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재의 관습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말이 가장 사실에 가깝다. (...)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귄위를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
개념이 '닳아빠진 은유'인 것처럼 성문법이란 '닳아빠진 관습법'에 다름 아니다.
몽네뉴=파스칼에 따르면, 법적 권위의 토대는 관습이며, 법이 법인 한에서 그것은 정의와 무관하다.
정의와 법의 돌발 자체, 법의 설립과 정초, 정당화의 순간은 수행적 힘, 곧 항상 해석적인 힘과 믿음에 대한 호소를 함축하고 있다. (...)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역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해석적인 폭력. 어떤 법의 최초 정초의 순간. 그 법의 적법성/불법성은 판정 불가능하다. 그 법의 적법성/정당성을 보증해줄 수 있는 메타언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gewalt'이다. '정초적 폭력'(르네 지라르)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그러한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적 권위)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이것이 데리다가 기술하고 있는 (본질적으로 해체 가능한) '법의 구조'다.
'해체는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과 법의 해체 가능성을 분리시키는 간극에서 발생한다.
address 무엇인가를 목적지/대상에 '정확하게' 전달하다
편지/문자 letter는 목적지에 전달하지 않는다 - 해체주의의 표어
'길-없음'이란 의미에서 아포리아는 '도단'을 뜻하는 바, 해체의 지배적 관점은 언어(로고스)의 궁지, '언어도단'에 대한 관심이며, 이에 대한 관심은 해체의 장기이자 책임이고 윤리이기도 하다.
"하나의 전달/주소는 항상 독특하고 특유한 반면, 법으로서의 정의는 항상 어떤 규칙이나 규범 또는 보편적 명령의 일반성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합법성과 정당성은 상호배제적이지 않은가?
"타자에게 타자의 언어로 자신을 전달하는 것은 모든 가능한 정의의 조건처럼 보인다"
"서양에서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에 대한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중심적 공리계 전체를 재고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우리가 정의라는 이름 아래 하나 이상의 언어에서 물려받은 거소가 관련하여 역사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과제는 해체의 중심에 놓여 있다. (...) 해체는 무한한 정의의 요구에 이미 서약하고 있으며, 그에 참여하고 있다.
(2) "기억 앞에서의 이러한 책임은 우리의 행동 및 이론적이고 실천적이며 윤리/정치적인 우리의 결정들의 정의와 정확성을 규제하는 책임의 개념 자체 앞에서의 책임이다. (...) 결국 해체는 규정된 맥락에서의 정의, 정의의 가능성이라고 불리는 것에 대한 기존의 규정들을 넘어서 있는, 항상 충족되지 않는 이러한 호소에서만 자신의 힘과 운동, 자신의 동기를 발견"한다.
만약 정의와 법의 이러한 구분이 진정한 구분, (-)이라면, 문제는 아주 간단할 것이다. 하지만 법은 정의의 이름으로 실행된다고 주장하고, 정의는 작동되어야(구성되고 적용되어야, 곧 힘에 의해 '강제되어야')하는 법 안에 자기 자신을 설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해체는 항상 이 양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 이 사이에서 자신을 전위시킨다.
(1) "어떤 결정이 정당하고 책임감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고유한 순간에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매 경우마다 법을 재발명하고 재-정당화하기 위해,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중지적이어야 한다." [규칙의 판단중지]
(2) "딱 잘라 판단을 내리는 단절의 결정 없이는 어떤 정의도 실행될 수 없고, 어떤 정의도 발휘되지 못하며, 어떤 정의도 실현되지 못할 뿐더러 법의 형태로 규정될 수도 없다."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
"결정 불가능한 것은 적어도 하나의 유령, 하지만 본질적인 유령으로서, 모든 결정, 모든 결정의 사건에 포함되고 깃들어 있다. 이것이 유령성을 결정의 정당성, 모든 확실성, 모든 현전의 안정성 또는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한다.
(3)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정의는 기다리지 앟는다.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항상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최대한 빠르게 요구된다.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
"결정의 순간은 키르케고르가 말하듯 하나의 광기다. 시간을 잘라내야 하고 변증법들에 저항해야 하는 정당한 결정의 순간에 대해서는 특히 그렇다. 과잉 능동적이면서 수동적,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
1. 결정/판결을 내리는 건 불가능하다 [불가능성]
2. 하지만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내려야 한다[불가피성]
3. 그러한 불가능한 결정/판결을 그것도 최대한 빨리 내려야만 한다[긴급성]
"절대적 타자성의 경험으로서의 정의는 현전 불가능하지만, 이는 사건의 기회이며 역사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릴케의 <비가>에 대한 로쟈의 애정, 자작시, 레오 까락스의 <나쁜 피>, 에밀 쿠스트리차의 <인생은 기적처럼>, '아줌마 철학'이라 재치 있게 명명한 니체에 대한 글, 김기덕의 <빈 집>과 <사마리아>에 대한 비평, 문학적 로고스와 철학적 로고스에 대한 글이 흥미로웠다. 아, 김훈은 에세이스트지 소설을 쓴 적이 없다는 평도 김훈 소설을 읽어본 적 없는 내게도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내가 말한 걸 반대로 말해도 말이 되는 걸 아는 허무주의자.(21세기문학 가을호에 실린 이소연 비평가의 글에서 본 김훈 소설가의 글이 좋아서 빨리 단행본으로 묶여 출간되길 기다리고 있다. 강산무진 읽어봐야지...)
마지막으로 독서모임에서 '앙코르' 반응까지 이끌어낸 에밀 시오랑의 글로 채워진 에필로그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대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책에 따라 살기> 북콘서트에서 만난 김수환 선생님도 '도스토예스프키" 얘기를 많이 해주셨다. 이번 겨울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 Cogito ergo Boom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근대 철학의 개시를 선언한 것이었다면, 시오랑이 미덥잖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 코기토의 불철저성이다. "철학의 잘못은 너무 참을만하다는 것이다"(독설의 팡세- 고뇌의 삼단논법) 사유를 철저하게 극단에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자연스레 '존재'를 통과하여 의당 '폭발'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시오랑의 아포리즘들은 어떤 사유의 응집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폭발의 잔재로서 읽혀야 한다.
'눈물의 일반이론' : "나는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나의 눈물들은 생각들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들은 눈물과 마찬가지로 쓰라지지 않을까?"
"나는 철학이 어려움에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철학은 인간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결국은 인간을 각자의 운명 속으로 내팽개치고 마는 것이다."
가끔 TV를 통해 지은이를 보았는데 주로 책 소개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인터넷 공간에서 이미 유명한 그의 책을 처음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그가 읽거나 접했던 책이나 영화, 번역물 등 지은이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몇 편을 발췌하여 책으로 엮은 것이다. 러시아문학 박사라는 타이틀을 넘어 그가 보여주고 짚어내는 인문학적 수준은 실로 놀랍기만 하다. 그럼에도 현학적이라 느껴지지 않는 것은 책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인문학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이 밑바탕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조금은 어려울 수 있지만 대중을 위한 인문학 입문서로도 흠잡을 데 없는 책이라 생각된다.
정리하면,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페나크 Daniel Pennac에 따르면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30~31쪽 중에서)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 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 행위다. (131쪽 중에서)
“책읽기는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다.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것인지, 저항하면서 도망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한없이 도망치고 한없이 저항한다. 아니, 도망치기 위해서, 저항하기 위해서 책을 읽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책읽기의 의의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즐거워야 한다는 것, 만약에 당신이 책을 읽으면서 즐겁지 않았다면, 당신은 제대로 도망가지도 못하고, 저항하지도 못한 것이 된다. 그건 당신이 변변찮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은 무조건, 절대적으로, 악착같이 즐겁게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애초에 그럴 만한 책을 고르는 안목이 중요하다.”
웹사이트 두어 곳에 리뷰를 올리고 이곳저곳 돌아보던 중, 로쟈란 이름을 보게 되었다. ‘저공비행’이란 블로그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로쟈의 서재에서 몇 글을 읽던 중, ‘내공이 상당한데..’라고 느꼈고, 가끔씩 들리곤 했다. 그 로쟈가 블로그에 담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저자에겐 첫 번째 책이다. 출판사 편집부에서 ‘에세이’성격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펴내자는 제안에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손 안대고 코푸는 심정’으로 적극 동의했단다. 사실 이만한 양의 글을 (420쪽) 단숨에 써내려가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러 해를 두고 꾸준히 올린 글들 중에서 모아 모아 책 한 권이 만들어졌다. 본인은 그의 전공(러시아 문학)외 분야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곁다리 인문학자’라고 겸손한 표현을 했지만, 아니다. 내가 보기엔 제대로 된 다리다. 그 분야에 종사한다고 해서 모두 전문가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본인의 전문분야는 물론 타 분야까지도 통섭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고 싶다.
저자의 관심 분야는 경계가 없다. 시, 소설, 철학, 영화, 회화, 조각, 번역 등 장르를 떠난 독특한 그의 시각과 글쓰기로 문외한들의 눈과 생각을 열어주고 있다.
“법은 계산 가능하지만, 정의는 계산 불가능하다. 산술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유한과 무한이다. 따라서 ‘정의의 권리’ 혹은 ‘정의의 법’ (프랑스어의 ‘droit'는 ‘법’과 ‘권리’를 모두 뜻하므로)이란 말은 ‘무한의 유한’이라는 말로 번안될 수 있으며, 이것은 무한/정의에 대한 법적 침해다. 법이 정의에 부합하는지 심판 받을 수는 있지만, 정의가 법정으로 소환 될 수는 없다. 정의는 법/권리를 넘어서기 때문이다(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소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권리를 부여받거나 양도 받을 수 없으며(법에 따라)권리를 행사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산 불가능성으로서의 정의는 다만 요구/요청될 따름이다.” 저자가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을 논하면서 쓴 글이다. 페이퍼 형식의 글이지만, 거의 논문 수준에 걸맞게 분석적이다. 저자의 이런 열정과 지식이 부럽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그 책의 저자에게 필이 꽂히면 뿌리를 뽑는 스타일이다. 이런 독서습관은 나도 진작부터 시도해보려 했던 부분인데, 사실 그렇게 하지는 못했었다.
책 말미에 로쟈의 독서문답이 실려 있다. 2006년 여름에 북 매거진 《텍스트》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와 다른 기회에 끼적거린 몇 차례의 독서문답을 짜깁기해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Q.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A. 마지막 질문은 의외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저자의 블로그 방제인 ‘저공비행’을 생각하며 한마디 하고 싶어진다.
저공비행 이라함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랜딩할 곳을 찾을 때와 보다 더 세밀한 정찰을 위해서일 것이다. 무엇을 찾느냐는 저자의 몫이지만, 저공비행은 장시간 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양력을 잃기 전에 가끔은 구름을 박차고 올라가야만 하리. 그래야 다시 저공으로 내려와도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밑에서 손 흔들어준다고 우쭐대지 말일이다. 초심을 잃지 말고, 깊고도 냉철한 의식이 유지되기를 바랄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대공 포화’는 조심했으면 한다.
간혹 나는 북 리뷰를 쓰면서, 나는 왜 이 일에 이렇게 몰두하지? 라고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그냥 막연히 나는 좋아서~ 라고 답했는데, 저자가 이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을 적어줬다.
“우리가 어떤 책을 진정으로 읽게 되는 것은, 그러니까 그 책에 대한 읽기를 완성하는 것은 그에 대한 글을 (혹은 책을) 씀으로써 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독자가 읽어내는 텍스트(readerly text)와 독자가 써나가는 텍스트(writerly text)사이의 바르트식 구별은 사소하다. 모든 텍스트는 씌어지는 텍스트여야하며, 그 씌어짐을 통해서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리뷰를 쓰는 건 책읽기를 통해 얻은 걸 베푸는 것이다. 그리고 책읽기를 완성해나가는 건 그러한 베풂이다. 그러한 쓰기/베풂의 여정은 끝이 없는가? 그렇다. 그것은 무한이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