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정각 6시에 식은 저녁을 먹는다. 밤새도록 앉아서 켄트를 기다리는 데 인이 박여서 그의 몫을 냉장고에 넣으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 있는 냉장고에는 작은 술병들이 가득 들어 있다. 그녀는 그녀의 것이 아닌 침대에 앉으며 넷째 손가락을 문지른다. 불안할 때 나타나는 습관이다. 며칠 전에는 과탄산소다로 매트리스를 유난히 꼼꼼하게 청소한 다음 침대에 앉아 결혼반지를 돌렸다. 그런데 지금은 반지를 꼈던 자리에 남은 하얀 자국을 문지르고 있다. 이 건물에는 주소가 있지만 여기는 그녀가 사는 곳도 아니고 집도 아니다. 바닥에 발코니 화분을 담은 직사각형 모양의 플라스틱 상자가 두 개 놓여 있지만 호텔 객실에는 발코니가 없다. 브릿마리에게는 밤새도록 앉아서 기다릴 사람이 없다. 그래도 그녀는 앉아 있다. --- p.22~23
화분에는 흙만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밑에서 꽃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겨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며 물을 주어야 한다. 브릿마리는 자신의 마음속에도 그런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그러길 바라는 마음뿐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둘 다 없는지도 모른다. --- p.69~70
모든 열정은 어린애 같다. 진부하고 순수하다. 후천적으로 터득하는 게 아니라 본능적인 것이기에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를 뒤집어놓는다. 우리를 휩쓸고 간다. 다른 모든 감정은 이 땅의 소산이지만 열정은 우주에 거한다. 열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게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요구하느냐, 그것이 관건이다. 인간으로서의 품위. 곤혹스러워하는 사람들의 표정과 잘난 척 고개를 젓는 그들의 반응. 벤이 골을 넣자 브릿마리는 고함을 지른다. 그녀의 발바닥이 스포츠 센터 바닥에서 솟구친다. 1월에 그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우주에서 그런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축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 p.383~384
인간이라면 누구나 눈을 감으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린 결정을 모두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게 모두 남을 위한 결정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 p.468~469
아침이 보르그에 찾아오지만 태양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선택할 시간, 난생처음으로 그녀를 위한 길을 선택할 시간을 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자제하며 지평선 위에서 공손하게 기다린다. 마침내 햇살이 지붕 위로 쏟아지자 파란 문이 달린 하얀 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녀는 멈출지 모른다. 어쩌면 다른 문을 한 번 더 두드릴지 모른다. 아니면 그냥 달릴지 모른다. 알다시피 브릿마리에게는 연료가 넉넉하지 않은가. --- p.470~471
사실 따지고 보면 배크만의 작품에서 아무 이유 없이 까칠한 사람은 없었다. 오베가 그렇게 까칠했던 이유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고, 엘사가 그렇게 까칠했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고, 브릿마리가 그렇게 까칠했던 이유는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어쩌면 배크만은 지금껏 나이가 너무 많아서 또는 너무 적어서 그것도 아니면 너무 특이해서 발언권 없이 함구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던 이 세상의 주변인들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 세상과의 소통에 서툴러서 온갖 오해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대변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