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SF문화의 배경에 숨은 퍼즐 한 조각
「별의 계승자」와 제임스 P. 호건
- 장대한 서사 창작의 귀재인 일본의 SF작가들이 탐독한 바로 그 작가 -
제임스 P. 호건은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웃 일본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SF문학상인 성운상(星雲賞)을 세 번이나 수상할 만큼 인기를 얻고 있다. 성운상은 일본 SF컨벤션 참가자들의 투표로 수상작을 정하며, 호건은 1981년에 본서 『별의 계승자』를 시작으로 1982년에는 『The Genesis Machine』, 그리고 1994년엔 『Entoverse』로 성운상 해외장편 부분을 수상했다. 이중 『별의 계승자』와 『Entoverse』는 공히 ‘Giants’라는 시리즈에 포함되는 작품이다.
호건은 1986년에 제25회 일본 SF대회(DAICON5)가 개최되었을 때는 해외 게스트로서 초청되기도 했다. 이런 인기 때문인지 그의 흔적은 일본의 여러 작품들에서 폭넓게 관찰된다. 예를 들어 SF애호가인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이상한 바다의 나디아」 마지막 회 제목이나 2005년 개봉된 극장판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Z건담」의 부제는 모두 본서의 일본어판 제목인 '별을 계승하는 자(星を繼ぐ者)'로 붙어 있다.
호건이 일본에서 인기를 끈 이유는 그의 첫 작품 『별의 계승자』에서 보여 준 치밀하고 꼼꼼한 논리 구조가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국민성과 잘 들어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별의 계승자』에서 암시하는 내용은 일찍이 미국의 임마뉴엘 벨리코프스키가 1950년에 낸 책 『충돌하는 세계 Worlds in Collision』에서 주장한 태양계 형성 이론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벨리코프스키의 이론은 황당무계한 사이비 과학이라는 비판을 들을 만큼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반면에 열렬한 추종자도 적잖게 낳았는데, 바로 호건의 『별의 계승자』에 이르러 스토리텔링의 감흥을 만족시켜 주는 논리적 시나리오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결말에서 비약에 가까운 결론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큰 무리 없이 받아들인 이유는 역시 과정의 흥미진진함에 있다고 여겨진다. 즉 스펙터클한 결론보다 거기까지 이르도록 한 단계 한 단계 밟아나가는 착실한 추론이 더 높은 점수를 얻은 셈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좀 진부하고 낡은 느낌이라고 해도, 역시 호건의 『별의 계승자』는 일본 SF문화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일정 부분 기여한 자양분이었음이 분명하다.
- 하드SF의 르네상스에 투신한 자유주의자 제임스 P. 호건 -
현대 과학소설의 흐름은 스페이스오페라 등으로 활기가 넘쳤던 1950년대를 지나 1960년대에는 '뉴웨이브(new wave)'라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바깥 우주(outer space)가 아닌 인간의 내면, 즉 안쪽 우주(inner space)를 다루면서 통속화된 과학소설 장르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를 통해 과학소설 장르의 범위가 더욱 풍부해진 반면 판타지나 주류문학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이 과정에서 과학과 기술이 과학소설의 중심자리에서 물러나는 듯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자 역시 과학소설의 주인공은 과학이어야 한다는 독자들의 갈망이 생겼고 이에 호응하는 작품과 작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도 바로 그런 작품 중 하나였다.
달에서 약 5만 년 전의 것으로 밝혀진 인간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본작은 상호 모순되는 사실들과 여러 의문점들을 놓고 과학자 집단들이 모여 그 해답을 풀어나가는 내용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소재로 삼은 것은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등 이미 다른 작품에서도 많이 다루고 있지만, 대개 그런 발견을 계기로 인류가 바깥 우주로 진출하게 된다거나 새로운 진화단계로 넘어가는 등 주제가 확장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별의 계승자』서는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미스터리를 푸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갈등관계와 그 해소라는 스토리텔링이 아닌, 증거와 논쟁점을 여러 개 나열하고 그걸 짜맞추어가며 도출되는 단일한 결론과 그 전개 과정에서의 논란 같은 과학적인 아이디어를 정면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과학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과학이라고 선언하듯이.
한편 호건의 소설에는 중앙 집중적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경향이 공통적으로 드러난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아나키즘, 혹은 자유주의 테마가 자주 눈에 띄며, 새로운 과학기술이 사회의 기존 관습이나 통념들을 근간부터 흔들게 된다는 설정도 드물지 않다.
호건은 근년 들어 몇 가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독특한 관점을 견지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이즈(AIDS)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약의 오남용으로 발병한다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고, 지구 온난화나 오존층 파괴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