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어제는 몹시 술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 무슨 싹인가가 돋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설레는 싹 같은 것을 느껴버린 것입니다. 빠진 이가 돋는 것처럼 나는 고통스러웠습니다. 거부하고 싶었지요.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라고 해도 내게 사랑은 무모하지 않았다면 순진했었고, 빠져들어 가지 말아야 할 늪처럼 생각되어졌음을 고백합니다.
그래도 당신은 내게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그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키스도 침대도 빵을 나누는 것도,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라고. 다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것이 사랑이라고. 제게는 어려운 그 말들을 하시고야 마는군요. 그래요,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을 말입니다.
비가 그칩니다. 먼 산에 아직 다 비로 내리지 못한 흰 구름의 자취들이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하고 땅으로 내리지도 못한 채 걸려 있습니다. 더운 공기들이 부풀어 오릅니다. 덥군요, 많이 덥습니다.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사랑」중에서
대개 “왜 하필 나야?”라는 물음으로 우리의 고통은 그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냐구요, 말 좀 해보세요” 하고 저도 하늘을 향해 여러 번 외쳤습니다. 우주 전체, 이 천지간 고아가 된 듯한 괴로움은 제 고통이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었다는 자책이 되고, 타인에게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가장 위로받고 싶었던 그때, 어린 나비 날개처럼 마음이 여렸던 때 겪어야만 하는 손가락질은 이미 그 각오만으로도 긴긴 불면을 가져다줍니다. 삶이 내게 왜 이리 인색한지 모르겠고, 착하게 살고자 노력했으나 그것이 바보 같은 시도라는 것을 증명해줄 본보기로 내가 뽑힌 것 같은 그런 억울함, 분노 같은 것들이 밤새 샌드페이퍼처럼 제 마음을 갉아대곤 했습니다.
---「두 살배기의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그는 말했습니다」중에서
아무리 상식적이고 아무리 튼튼한 사람도 생의 어느 봄날한 번쯤 오뉴월의 훈풍에 아파서 울 때가 있는 것이니까요. 마치 혼자서만 세상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것같이 외로울 때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럴 때 너만 그러는 것은 아니야, 하고 다가가는 그런 존재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건 이 자본주의와 세계화와의 효율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
지만, 우리가 여전히 삶을 택하게 하고 인간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오스카 와일드의 말대로 우리는 모두 한 번쯤은 예수와 함께 엠마오로 걸어가야 하는데, 그럴 때 바로 오래도록 아픈 숙명을 유전자에 지니고 사는 예술가들이 그와 함께 그 길을 걸어준다는 것을.
---「고통의 핵심」중에서
내 삶은 한 신에서 다음 신으로 이어졌고 한 주제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내 삶은 살아 있는 삶이 아니라 꾸며진 각본이었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허상, 내 삶의 헛된 동력인 그 허상을 놓아버리고 나니, 끊는 게 아니고 그냥 놓아버리고 나니 무대가 사라졌습니다. 무대가 사라지니 의상도 역할도 필요가 없어져버렸지요. 나는 무대를 걸어 나와서 거리로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숲과 나무들과 하늘을 보고 각본에도 없는 난데없는 바람을 그저 느끼고 싶어졌습니다. 두서없는 말을 하고 음정 틀린 노래를 부르며 이도 닦지 않고 세수하기 싫으면 그냥 하지 않고 싶어진 것입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친구를 만나 향기로운 음식과 술을 마시고 즐기며 볕 좋은 날에는 낮잠을 자고 깨달을 게 있으면 깨달아 노트에 적어놓고 풀리지 않는 문제는 내 마음의 선반에 얹어놓으며 그냥 살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살겠다고 다시는 결심하고 싶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J, 저는 달력의 일정을 하나씩 지울 수 있을 때까지 지웠습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