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주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신들은 점차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기 시작합니다. 제우스가 너무 바람을 많이 피운 탓도 있을 테지만 (신화에서 제우스는 바람둥이의 원조라 할 만합니다) 숫자가 많아지면서 삶의 터전인 올림포스가 턱없이 좁다고 신들이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만큼 신이 관여할 분야, 사람들이 생각하는 분야가 자꾸만 늘어난 탓일 겁니다. 티탄족의 막내인 크로노스가 신권을 장악하면서 우주가 요동쳤듯이 크로노스의 막내인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최고 신, 우두머리가 되면서 세상에는 다시 변화의 물결이 크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권력 구도부터 바꾸어야겠죠? 제우스의 생각도 그랬답니다. --- p.21
다이달로스는 명장답게 있는 솜씨, 없는 재주를 다해 미궁을 완성합니다. 그렇게 고심해서 미궁을 만들고 보니 이런 곳은 자신조차 한번 들어갔다가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음을 직감합니다. 이거, 자신의 재주에 감탄해야 할지, 아니면 원망해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미궁이 완성되자 미노스는 자신의 자식 아닌 자식을 미궁에 가두어버립니다. 힘도 세고 포악하기까지 한 이 짐승 같은 자식을 그냥 놔두었다가는 사람을 해칠 뿐만 아니라 미노스의 죄악을 뿔 나팔 불며 광고하는 꼴이 되고 말 테니 미궁에 가두는 것은 여러모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냥 굶겨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내 백성을 희생시킬 수도 없으니 대신 아테네에서 잡혀온 사람을 먹이로 던져주면 될 일입니다. 이놈은 미궁 안에서 그렇게 살다가 죽겠죠. 제 손에 피를 묻힐 수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마무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 p.49
아무리 영웅이더라도 인간은 신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신과 인간은 차원이 다른 존재거든요. 인간에게 무시당할 만큼 우스운 신은 없다는 것을 명심할 일입니다. 헤파이스토스를 아무리 추남에, 다리 병신이라고 욕해도 인간이 그를 당할 수는 없죠. 또한 신들은 인간의 오만을 절대 용서하지도 묵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합심해서라도 신에게 대든 인간에게 무지막지한 징벌을 내립니다. 그런 판에 페가수스를 타고 천상에 오르려는 벨레로폰을 신이 귀엽다며 보고만 있을까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소리죠. 결국 제우스가 손톱으로 튕겨낸 등에 한 마리로 인해 그는 ‘방황의 들’이라는 알레시온에 추락하고 맙니다. 역할을 마친 페가수스는 제우스의 명으로 하늘에 올라가 별자리로 남고요. 알레시온에 떨어진 벨레로폰은 갈대에 찔려 눈까지 먼 채 다리를 절뚝이며 방황하다가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 p.78
신화에서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이아를 결코 대등한 인격체로 대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갈라테이아가 결혼을 거부하거나 조건을 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평화로운 삶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고 오히려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할 가능성도 대단히 크겠죠. 그러므로 그들이 행복하게 아주 잘 살았다면 이는 갈라테이아가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끊임없이 희생이나 헌신, 복종으로 남편과 가정을 돌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란 남자와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대등한 인격체가 아니라 남자가 얼마든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라는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 피그말리온 신화입니다. 사람은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어른이거나 어린아이이거나, 그리고 그가 부자이거나 가난한 사람이거나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지 결코 어느 누구의 소유물로 여겨져서는 안 될 고유한 존재입니다. 신화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 p.140
마침내 프시케가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리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 이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겠지?’ 그녀가 막 뛰어내리려 하자 다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리석은 인간, 프시케여! 무엇 때문에 그리 급히 죽음을 택해 지금까지 당신을 괴롭힌 신을 기쁘게 하고 당신을 돕고자 애쓴 신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려는 것이냐? 방법을 찾아보지도 않고 목숨을 버리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란다.” 그 말을 듣고 프시케가 벼랑에서 물러섭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소리의 주인공은 프시케가 어떻게 저승으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세심하게 알려줍니다. 그렇군요. 신의 도움을 받는 자가 신이 내미는 손길을 거부한다면 그 또한 엄청난 죄를 짓는 일이겠습니다.
이상기는 바람의 아들이다. 십 년이 넘도록 소식도 없다가 불쑥 나타나 한두 마디 하고 사라지곤 한다. 세련된 맛도 없고 앉을 자리인지 설 자리인지 가릴 눈치도 없으니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외국에서 이십 여 년을 살면서도 꾸준히 글밭을 일구며 지내왔으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역사며 문화, 종교와 정치 등 그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는지,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가 쏟아져 나올지는 가늠하지 못하지만 나는 또한 잘 안다. 이 촌놈에게서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과 열정이 앞으로도 끝없이 솟아나올 것임을. 그리고 이 책 『왜, 그리스 신화를 읽어야 하나요?』는 그 시작일뿐이라는 것을. --- 도종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