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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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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3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600쪽 | 686g | 128*188*35mm
ISBN13 9788954437219
ISBN10 895443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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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그 여자는 살아 있어.” 고바야시는 눈앞의 나라자키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푸르스름한 술집의 불빛이 나라자키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췄다. 마치 나라자키의 모습을 악의 빛으로 차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듯. 고바야시는 ‘이 녀석 얼굴이 이랬던가?’ 하고 생각했다. 삶에서 중요한 뭔가가 빠진 듯한 표정. 그런데 이상 하게도 쓸데없이 눈빛만 강렬했다. --- p.9

그녀는 겉모습도 기묘했다. 옷차림과 머리 모양에서 전혀 현대적인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까만 생머리는 너무 길었다. 옷도 멋을 전혀 부리지 않고, 단지 살을 가릴 목적으로만 걸친 것 같았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멋 내는 걸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 그것은 세상에서 격리된 인간의 모습이다. 옛날 신흥종교가 세상을 휘젓던 무렵, 뉴스에서 자주 보던 수수한 모습의 여자들. --- p.68~69

“이제 싫어졌어. 그저 그런 나도, 내 인생도 다 싫어졌어.”
“음.”
여자는 나라자키의 머리를 팔로 감쌌다. 나라자키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을 모욕하기 위해 여기에 왔어. ……다들 눈살을 찌푸리겠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단체에 들어갔다고. 내 인생과 번지르르한 위선으로 가득 찬 녀석들을 모두 모욕하기 위해…….” --- p.113

흰옷의 남자는 머리 위에서 어떤 시선 같은 것을 느꼈다. (……) 정말로 그들의 신이 있다면? 이 여자는 물론이고 교주까지 죽는 건 아닐까? 흰옷의 남자는 자문했다. 남자는 이전에 이 여자와 같은 컬트에 있었다. 지금의 교단으로 옮기고 모든 게 미망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몸속 어딘가에서 다 닦아내지 못한 감촉이 되살아났다. --- p.160

교주가 소파에 누워서 여자의 몸을 애무하고 있었다. 우울하게. 괴물 같은 자식, 하고 다카하라는 생각했다. 교주 속에는 지옥이 있다. 그는 지옥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부의 지옥에 빠져들어 천천히 흔들린다. 어째서 저토록 우울하게 여자를 안을 수 있을까. 저토록 암울한 눈빛으로. 그렇다면 그만두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교주는 습관처럼 손을 뻗는다. 감동 없이. 흔들리며 우울하게. 벌레가 수액을 핥는 것처럼. --- p.169

그 교단에서 여자들과 있었을 때 자신은 이성에서 벗어나 있었다. 논리적 사고의 바깥에 머물렀다. 이성이 태어나기 이전의 장소에. 자아를 잊은 장소에. 성과 성이 합쳐져 상승하면 그 끝에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어떤 한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편안했다. 그곳은 편안했다. 마치 누군가의 깨달음 속에 온몸을 담근 것처럼. 지혜의 열매를 먹기 전의 벌거벗은 남녀처럼. --- p.288

세상과 차단된 컬트 집단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세월이 길어질수록 현실의 상식에서 벗어나버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현실 속에 ‘비현실’로 등장한다. 당시엔 마치 픽션 같다고 생각했다. 만화처럼 왜곡된 픽션이 현실에, 그리고 일상에 갑자기 출현한 순간이었다. 뉴욕을 덮친 9·11 역시 누가 현실이라고 바로 인식할 수 있었을까? --- p.428

상대의 고통으로만 진정한 쾌락을 얻었던 나는 이 세계에서 배척당했다.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섹스에서 나의 존재는 멀어졌다. 인간의 가장 농밀한 소통이 섹스라고 한다면 상대의 거부로밖에 만족할 수 없는 나는 모든 것에서 배척당하고 있다. 신은 지금 내게 그걸 보여주려고 한 것일까? 나의 진실을 내 눈앞에 보여주기 위해서. --- p.519

암은 평범하게 진행되고 나는 평범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있다. 죽음은 이미 임박했지만 나의 최후는 파멸이어야만 했다. 신이 없다고 해도 오만한 나는 최후를 신과의 대치로 끝내고 싶었다. 신이 있든 없든 이젠 아무 상관없다. 내가 신을 만들면 된다. 나는 나를 초월한 존재 이외에는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내가 신을 만들면 된다. 내가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나의 파멸이 실현될 상황이 전개됐다. --- p.537

다카하라의 눈에 비친 건 삼십대 남자가 권총을 꺼내 뭔가를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재빠르게 눈앞에서 방아쇠를 당긴 영상이었다. (……) 몸이 무너져가는 감각 속에서 시야만 그 영상에 고정됐다. 의식이 있는지 스스로 생각했을 때 눈꺼풀이 닫히는 걸 깨달았다. 잠자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억지로 끝이 났다는 감각. 고정된 영상 앞으로 어떤 검은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p.57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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