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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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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3년 07월 07일
쪽수, 무게, 크기 318쪽 | 493g | 153*226*30mm
ISBN13 9788932014289
ISBN10 893201428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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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 말을...... 당신께...... 꼭, 해야 하는가......? 몇 번이고 제 자신에게 되묻게 됩니다. 내 뱉고 말면 어쩌면 당신은 저를 증오할지도 모르겠어요.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지요. 당신이나 저나 그 두 감정이 서로 동시에 마음을 언덕삼아 맞대고 있지 않았나요? 다만 그 동안 우리는 아주 위태롭게 사랑 쪽을 지켜왔던 건 아닌가요? 어쩌면 제 이 말이 증오쪽으로 당신 마음을 돌려놓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 저를, 용서하세요.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제 말이 모두 당신에게 오리무중일 것만 같으니. 점촌 아주머니를 혼자 살게 한 점촌 아저씨의 그 여자, 그 중년 여인으로 하여금 울면서 에어로빅을 하게 만든 그 여자...... 언젠가, 우리 집...... 그래요, 우리집이죠...... 거기로 들어와 한때를 살다 간 아버지의 그 여자...... 용서하십시오...... 제가...... 바로, 그 여자들 아닌가요?
--- p.23
어제 당신과 제가 꼭 그랬습니다. 제 마음을 당신은 느닷없이 왜 그렇게 고고해졌느냐며 할퀴었고, 저는 당신 이외의 모든 감정을 모두 뭉개려만 드는 이기주의라고 당신을 물어뜯었습니다. 당신은 출국 날짜를 일러주고 가셨습니다. 그 날짜에 맞쳐 제가 돌아올 걸 믿는다고도 하시면서도 당신은 석연치 않은 얼굴로 새벽 기차를 타고 다시 도시로 가셨어요.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진 마루에 앉아 계셨습니다.

당신의 팔을 붙들고 황급히 도망치 듯 집을 나섰던 저를 보고 짐작하신 게 있으신지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말할 수 없이 일그러져계셨어요.무슨 말씀이든 다 들으려고 아버지 곁에 엉덩일 붙히고 앉았으나,얼마 후에야 아버진 그냥 방으로 들어가시며 힘없이 중얼거리시더군요. 그놈, 그 수송아지가 눈뜬 봉사여야,
--- p.20
당신과의 약속 시간은 이제 이 밤만 지나면 다가옵니다. 당신은 정말 떠나실 건가요? 그렇다면 저는 지금 무엇을 참고 있는 것일까요? 당신이 떠나버리면 제가 참고 있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오늘 하루는 종일 중얼중얼거렸어요. 당신에게 달려가려는 쪽으로 마음이 바뀌려 할 적마다. 저를 스쳐간당신과의 기억들이 모두 나쁜 것이었다고, 속삭이고 속삭였어요. 그래도 불쑥 열이 났고, 당신에게 가야지, 잠깐씩 가방을 챙기기도 했어요.

행여 당신이 저를 데리러 오지 않나. 여러 번 대문을 내다보기도 했어요. 어렵게 견뎌내고 찾아온 이 밤. 이미 당신에게로 가는 기차는 끊겼는데, 내일 새벽 첫차는 몇시던가. 저는 지금 그것 헤아려보고 있으니, 이 밤이 우섭습니다. 산버찌를 먹으면 눈물날 일이 생긴다고 제가 산에서 버찌를 따오면 어머니는 마당에 쏟아버리시곤 하셨죠.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눈물날 일이 이것인가요? 어머니 몰래 먹은 산버찌가 지금 저를 울리는 것이가요?

아버지는 그 여자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여자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오면 손크림을 발라주셨지요. 왜 그것만이 유난히 생각나는 지 모르겠어요. 저는 아버지의 손과 그 여자의 손이 전혀 스스럼없이 서로 엉키는 것이 꼭 꿈결인 것만 같았어요. 손크림을 통에서 찍어내 그 여자의 손에 골고루 펴 발라주실 때 아버지의 그 환한 모습을, 그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손. 그래요. 그 시정의 아버지와 그 여자는 손을, 둘이서 있을 땐 늘 손을 잡고 있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것이 손크림을 발라주는 한 컷으로 합쳐져서 생각나는 모양있니다. 손잡는 일이 뭐 대수겠습니까만, 저는 지금도 아버지 손을 꼭 잡아보지 못한걸요. 당신의 손. 저도 당신의 손을 참 좋아했습니다.
--- p.37-38
그 여자가 남겨놓은 이미지는 제게 꿈을 주었습니다. 제가 더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면 담임 선생님은 개인 신상 카드를 나눠주며 기록을 해오라 했습니다. 그 개인 신상 카드 어느 면에 장래 희망을 적어넣는 칸이 있었지요. 장래 희망, 저는 그 칸 앞에서 오빠 볼펜을 손에 쥐고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어요.

......그 여자처럼 되고 싶다...... 이것이 제 희망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우리집에 와서 심어놓고 간 일들을 구체적으로 간추려서 뭐라고 써야 하나? 이것이 고민스러워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던 것입니다. 끝끝내 그걸 간추릴 단어를 저는 그때 알고 있지 못했어요.그래서 다른 아이들처럼 어느 때는 은행원, 어느 때는 학교 선생님, 어느 때는 발레리나라고 써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표현되는 그때그때의 희망들은 모두 그 여자를 지칭하고 있었습니다.
--- pp. 23-24
그 다락은 경사진 좁은 계단을 몇 개 통과해야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저녁밥도 안 먹고 잠이 들어버렸어요. 다락에서 잠이 든 줄도 모르고 잠청을 하다가 밑으로 굴러 떨어져내렸지요. 제가 쿵, 떨어졌을 때 달려온 이는 그 여자, 그 여자였습니다. 그 여자는 제 엉덩이를 세게 때렸어요. 집을 나가버린 줄 알았잖니 이것아! 그 여자는 거의 울 듯했어요. 저 때문에 말이예요. 제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다른 식구들은 다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아버지까지도 주무시고계셨는데, 그 여자는 그때껏 마루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그때, 저는 그 여자는 악마다, 라고 했던 큰오빠의 말이 다 틀린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p.
강물은......강물은, 늘.....늘, 흐르지만, 그 흐름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어찌된 셈인지 제게는 그 강과 함께 흐르길 마음먹는 일이 제 심연의 물을 퍼주고야 생긴 일임을, 아니예요, 이런 소릴 하는 게 아니지요, 다만, 어떻게 하더라도 제게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이 남는다는 걸 알아주시.....아니예요,아닙니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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