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3년 07월 05일 |
---|---|
쪽수, 무게, 크기 | 640쪽 | 724g | 160*232*35mm |
ISBN13 | 9788937407147 |
ISBN10 | 8937407140 |
발행일 | 2003년 07월 0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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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40쪽 | 724g | 160*232*35mm |
ISBN13 | 9788937407147 |
ISBN10 | 8937407140 |
김수영의 시집을 읽었다.
고백하건데 생전 처음으로 본 시집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시인이 잠들어 있는 동네에 살고 있으니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무같은 것.
김수영은 드물게 현실 정치에 큰 관심을 두고 이를 열정적으로 작품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득 눈에 띄는 시 한 편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그 역시도 나같은 장삼이사들과 똑같은 고민과 번뇌와 자책을 안고 살았던가.
시인의 읊조리는 소리가 쉬이 걷히질 않는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緒)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스들과 스펀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1965, 11, 4>
그저 마음은 동할 뿐, 그 만큼 움직일 수 없는 나약함에 얽매인 나를 깨달은 순간,
나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인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 찾을 수 없는 순간,
그 무엇이라도 필요했다.
힘을 내어 걸음을 내딛으려하는데, 늪처럼 발을 잡아끄는 나에게
나는 그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다.
김수영의 이름을 다시 듣던 그 날!
가슴이 뛰었다.
교과서로 알았던 시인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어서 신선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의 고통스런 속내가, 치열한 고뇌가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뛰게 하기도 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시를 만나게 되면 도대체가 더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의 강인하면서도 서글프게 느껴졌고,
그래서 나도 위로 받고, 나도 시인을 위로하고 싶었다.
오며 가며 꺼내들어 읽고 있다.
어려우면 어려운데로, 반가우면 반가운데로, 그렇게 읽고 있다.
김수영의 산문집도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