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05월 01일 |
---|---|
쪽수, 무게, 크기 | 416쪽 | 415g | 128*188*30mm |
ISBN13 | 9788901107790 |
ISBN10 | 8901107791 |
발행일 | 2010년 05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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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416쪽 | 415g | 128*188*30mm |
ISBN13 | 9788901107790 |
ISBN10 | 8901107791 |
작업실 나비의 나날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휘황찬란한 집 망상 태워줘서 고마워 하룻강아지 치유법 죽음 같은 시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그림엽서 붉은 드레스―1946 주일 오후 어떤 바닷가 여행 위트레흐트 평화조약 행복한 그림자의 춤 옮긴이의 말 옮긴이 주 |
어제는 늦게까지 책을 읽어도 멀쩡하고
오늘은 10시도 안 되어 졸리고,
내일은 어떠할까.
"메이는 다리를 포개고 앉아 이제는 어디든 마음 가는 대로 갈 수 있는 길과 편편해서 쉽게 갈 수 있는, 침묵으로 가득 찬 자기 앞에 펼쳐진 세상을 바라다보았다" - <어떤 바닷가 여행> 중에서 (p.340)
단편의 특성답게, 다양한 삶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 있는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은 읽는 동안 행복감에 젖기에 충분했다. 일상을 일상같지 않게,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들에 흠뻑 빠져들 때쯤에, 나는 이 책의 깊이를 놓치고 있었다. 그래서 옮긴이의 말을 살짝 빌려와 본다.
"이 책의 표제작이자 마지막 작품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예술, 곧 소설 세계에서 작가가 이루고자 하는 궁극의 뜻을 펼쳐 보인 작품으로 읽힌다. 삶의 가능성을 탐색할 기회의 문이 막히고 닫힌 세상에서 아이들은 물질만능사회에 물젖고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익숙해지면서 본연의 순수한 자기를 배반한다. 자신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보호를 받고 싶은 욕구, 숨고 싶은 욕구, 위장하고 싶은 욕구'에 휩싸이는 그 아이들은, 그러나 본디 선량하다. 그것이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든, 모두가 그 대세를 따르는 속세에서 멀찍이 벗어나 꿋꿋하게 자기 신념을 실천하며 피아노를 가르치는 할머니 선생님의 가치관이다. "당신이 어린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고 거기에서 착한 마음씨와 선한 것이면 무엇이든 다 좋아하는 천성을 간직한 보물고를 찾아낼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마살레스 할머니 선생님의 가치관이 앨리서 먼로가 예술로 승화한 결정체이다. - p.407
나의 어제는 선량했을까.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치열해지고 더욱 더 악독했을까. <행복한 그림자의 춤>처럼 본디는 선량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악독했을 것이고 그러나 본디는 선량했을 것이다. 다만, 거기서 나의 가치관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우왕좌왕했으며, 기회주의적이었으며, 바른 길을 가지 못했다. 어쩌면, 나의 마음속에서 어린이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엉뚱한 데서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고 억울해했고, 화를 냈을 것이다. 지금?
하루하루가 새롭게 다가온다. 무언가의 깊이에 도달한다는 것은 신선하고 기분좋은 일이다. 책 한 권에서 아무런 가치도 발견하지 못했고, 생각없이, 그리고 아무런 목표없이 읽기 자체에만 몰두했던 지난날. 그리고 결국은 책읽기는 내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며 책읽기를 그만두자며 주저앉았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림자가 행복할까. 그림자로 사는 것은 어떤 행복을 가져다줄까. 그래서 나와 같이 그림자가 춤춘다면. 책읽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내 삶이 새로워질 것을 믿는다. 책읽기의 작은 행복이 내게 소소한 기쁨을 주었던 것처럼.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을 일부러 찾아 읽는 것은 아니다.
다른 책을 사면서 노벨상 작가의 광고를 보면 그냥 궁금해진다.
살 생각 없었는데 어느새 배달이 되고 서둘러 읽으려 했던 것도 아닌데 다른 책보다 먼저 읽게 돼버리는 게 노벨상 작가들의 작품이다.
여태 노벨상 작가의 책에 실망했던 적은 없다. 심지어 아주 재밌다.
그런데도 일부러 찾지는 않는다니 뭔 생각인지 나도 모르겠다.
오르한 파묵의 경우엔 노벨상을 타기 전에 읽었다.
<눈>! 정말 소름 돋는 책이었다.
후에 그가 노벨상을 받고 <내 이름은 빨강>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는 어리둥절했다.
그의 소설은 노벨상 공식 중 하나인 심오한 주제를 잊을 만큼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다.
무겁고 권위 있는 노벨상보다 베스트셀러가 먼저 떠오른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 도 스릴러물 읽는 기분이었는데 알고 보니 노벨상 수상 작가였다.
아주 오래전에 읽었는데도 아직까지 세세한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꽤나 인상적이었다는 증거다.
영화 <오멘> 분위기였는데...
이럴 바에는 올해의 노벨상 수상 작가부터는 관심을 기울여 일부러 찾아 읽어야겠다.
2014년 노벨상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파트릭 모디아노였고, 그 전 해인 2013년은 캐나다 노작가 앨리스 먼로였다.
오랜만에 여성 작가, 게다가 특이하게도 단편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
단편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싶었는데 이 단편집의 첫 소설 <작업실>부터 아리송했다.
뭐지? 뭐 이런 일상 소재의 단편이 노벨상이지?
이런 의문은 마지막 소설을 읽은 후까지 계속되었다.
굳이 우리나라 작가와 비교하자면 박완서 선생의 소설이 노벨상?
이 책을 읽을 당시에 나는 마음먹고 매일 독서일기를 쓰다가 책을 다 읽은 후에 독후감을 쓰곤 했었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해서는 도무지 판단이 안 서 독후감을 미루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이 책을 간단하게나마 분석(?)했는데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에 대해 ‘시카고트리뷰’는 “먼로는 하나의 단편에 세계 전체를 담아내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경탄하게 한다.”고 했는데 그 말에 수긍했다.
다만 ‘하나의 단편’이 아닌 책 한 권에 있는 모든 단편들의 하모니가 ‘세계 전체’를 담고 있었다.
이 놀라운 발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노벨문학상 작가이다.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는 심오한 주제도, 거창한 소재도, 장엄한 문체도, 번득이는 구성도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보단 뭔가 짠한 것이 있다. 눈물을 글썽거리게 하는, 하지만 결코 감정을 쥐어짜지 않는 잔잔한 감동이 있다.
지난 세월에 두고 온 잊혀진 기억을 툭 건드리지만 결코 아프지 않은, 오히려 미소를 띄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특히 마지막 소설로 이 단편집의 표제이기도 한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그랬다.
읽으면서도 읽고 나서도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하다 책을 덮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마살레스 선생님’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애잔한 그리움에 뭉클해지며 언제까지나 응원하고 싶은 박수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졌다.
이런 게 좋은 소설이다.
앨리스 먼로의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는 일상의 한 컷이 담담하고 경쾌하게 그려져 있다.
열다섯 편의 소설에는 우리 인생이 골고루 녹아 있다.
사회, 사람, 예술... 그야말로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 꼼꼼한 필체로 펼쳐져 있다.
우선 이 책은 삶의 일대기와 삶에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적의 관문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분석해 보면 성장기 소설은 다음과 같다.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 성 정체성
<망상>- 어른 세계에 대한 모호함
<나비의 나날> - 친구
<하룻강아지 치료법> - 청소년기의 고민, 호기심
< 붉은 드레스-1946> - 사춘기의 이성
'나'는 엄마의 세계보다 아빠의 세계가 더 즐겁고 관심 있지만 자신은 결국 여자 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사내아이와 계집아이>) 한편으론 어른의 은밀한 세계를 은밀히 안 것 같은 혼란(<망상>)에 빠지게 된다.
아직 어려서 인간관계에 서툴고 이기심에서 벗어나기 어렵지만(<나비의 나날>) 조금씩 자라면서 어른의 불합리성과 모순을 발견하고 기존 세대에 반항하고 싶지만 어설픈 항거로 끝날 수밖에 없는 성장기 소녀의 이야기(<하룻강아지 치료법>)가 각각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면서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유년시절을 거쳐 이십대 초입의 삶(<태워줘서 고마워>)으로 들어가 처녀 시절(<주말 오후>)을 통과한다.
결혼하면 주부(<작업실>)나 아버지(<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로서 살아야 하고 그러면서 '나'는 노인이 된다.
노인의 삶은 소외된 채 젊은 사람들의 이해를 얻을 수 없지만 '나'는 자기 터전을 지키고(<휘황찬란한 집>), 자기 모습대로 살며(<어떤 바닷가의 여행>),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고(<행복한 그림자의 춤>) 살아간다.
그런 인생이기에 삶은 아름답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타인에게 유린당하기도 하고(<태워줘서 고마워>, <주말 오후>, <그림 엽서>), 하고 싶은 일(<작업실>)과 옛 추억에 빠질 수조차 없게 만들지만(<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그래도 의무와 책임을 다 해야 하는 엄마 혹은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이다.
이처럼 앨리스 먼로는 삶의 여정을 넉넉한 미소로 화답해 주듯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었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한편으론 사회 문제도 짚고 넘어간다.
앨리스 먼로가 살았던 시대는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개인의 삶이 핍진했을 때였다.
이런 시대상에 대해 앨리스 먼로는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구시대와 신시대의 갈등(<휘황찬란한 집>), 가난과 무지(<태원줘서 고마워>, <주말 오후>,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고통을 표출할 수 있는지, 진정한 고통은 무엇인지도 <죽음 같은 시간>에서 말하고 있다.
이 모든 문제들, 인간 삶에 놓인 통과의례적인 일들을 피해 갈 수 있는 인생은 없다.
결국은 맞닥뜨리고 통과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평한 삶이기에 호들갑 떨 필요없이 묵묵하고 고요히 하지만 결코 무거움에 함몰되지 않고 오히려 경쾌하게, 우리는 각자 주어진 삶을 살아야겠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처럼.
우리 인생이 빛날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이 소설도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을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장식한 데에는 이런 연유가 있는 것 같다.
한 인간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이 책은 앨리스 먼로라는 작가, 개인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앨리스 먼로는 <행복한 그림자의 춤>의 ‘마살레스 선생님’처럼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 한다.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399쪽)’로 이 책은 끝을 맺는다.
예술가는 ‘저쪽 나라’에 살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감동을 전달하는 예술가의 ‘코뮈니케’, 예술가는 작품으로 자기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앨리스 먼로의 노벨상 수상에 일말의 이의도 없다.
감동적이다. 퍼펙트하다.
∵ 코뮈니케: 문서에 의한 국가의 의사 표시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외교상의 공문서, 정부의 공식 성명서 따위를 이른다.
해외문학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더라면 순순히 찾아서 읽었을까? 이름도 태생도 생소한 작가이기에 더 그러했고 어떤 계기가 되었든 저자의 작품을 읽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이 책에 실린 첫 단편을 읽는 순간부터 저자의 작품을 좋아하게 될 거란 예감이 들었고 좀 오랫동안 읽은 셈이지만 조금 새로운 저자의 단편들에 빠져들었다. 장편도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들어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삶에 밀착되어 있는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면 재미를 느끼고 있다. 예전에는 뚝뚝 끊기는 느낌도 싫고, 결말이 대부분 모호하게 끝나, 단편을 읽는 게 영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조정래 작가 선집을 통해 단편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었고 그 뒤로 종종 단편을 읽어왔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단편의 매력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이다.
나에게 소설을 왜 읽냐는 질문을 종종 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망설임 없이 현실 도피를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과 같은 내용을 만나기 싫어 고전을 찾아 읽으면서 철저히 현대소설은 외면했었던 것 같다. 우울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 조금씩 외면을 철회했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마주하면서 오히려 위로를 얻었다. 완전히 현대문학에 대한 마음이 열린 것은 아니지만 소설 속의 삶이 도피성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내가 피하고 싶었던 현실의 삶과 많이 닮아 있음에서 오는 위로였다.
이 책은 저자가 1950년대부터 15년 동안 써 온 글을 모아 처음 낸 단편집이라고 했는데 몇몇 시대적 배경을 제외하고는 지금 읽어도 손색이 없다. 오히려 나에게 생소한 캐나다 작가의 작품에다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더 매력 있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뭔가 특별할 것 같은 일들도 있지만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내는 묘사가 좋았다. 그런 이야기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어느새 내가 피하고자 했던 삶에 더 한 발짝 다가간 느낌이 들었고 지난하게만 생각했던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라는 문구를 이 소설들을 통해 이제야 이해한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일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 그러니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거요. 헬렌 혼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도요.「그림엽서」중
내가, 혹은 우리가 함께 살아내고 있는 삶에는 ‘언제나 끊임없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어쩌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살아가는 것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삶에 동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35년을 살아오면서 늘 서투르기만 했던 짧은 내 삶을 되돌아보면 자양분을 쌓지 않은 채 시간이 흐르면 내가 뭔가가 되어 있거나 좀 더 나아진 환경 속에서 살아갈 거라 착각해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러한 결과물을 내는 것 역시 ‘나’의 한 요소였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자신만의 명확한 고집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종종 단편집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저자의 이 작품 역시 뭔가 결론이 시원하게 드러나거나 희망을 그려낸다거나 나도 저렇게 살아봐야지 하는 되돌아봄은 거의 없었다. 있는 그대로 삶의 단편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옮겼을 뿐이다. 그래서 때론 당황하기도 하고 무엇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있는 그대로 그네들의 삶을 받아들이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의 문체와 세밀함이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지만 번역임에도 꼼꼼하면서도 독특한 표현들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읽으면서 ‘우리말에 이런 표현도 있었나? 역자는 어떻게 이렇게 번역할 생각을 했을까?’란 생각부터 심지어 원문이 궁금해지기도 했다(비교해 봤자 분간해 낼 능력은 내게 없지만!^^). 그만큼 신선한 표현력과 애정이 담긴 번역 덕분인지 읽는 내내 다채로운 느낌을 받았다.
단편집의 느낌을 남긴다는 건 장편소설보다 더 어렵다. 그렇기에 두루뭉술하게 이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을 주절이주절이 떠들긴 했으나 이 책과 함께 구입한 저자의 다른 작품도 곧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 대한, 단편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바꾸고 더 알아가고 싶게 만드는 이런 기분. 소설을 읽는 또 다른 매력을 느끼며 그런 즐거움을 주는 소설이란 문학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