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3년 07월 30일 |
---|---|
쪽수, 무게, 크기 | 256쪽 | 553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75273797 |
ISBN10 | 8975273792 |
발행일 | 2003년 07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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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56쪽 | 553g | 크기확인중 |
ISBN13 | 9788975273797 |
ISBN10 | 8975273792 |
[작가 후기]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한 아이가 푸른 눈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푸른 눈을 한 그 아이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몹시 기분이 나빠졌다. 슬픔이 어린 그 아이의 목소리, 왠지 측은한 생각에 그 아이를 위로해주는 척했다. 하지만 사실 측은함보다는 ‘분노를 느꼈다.’
『가장 푸른 눈』은 그 일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쓴 작품이다. 왜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지, 또한 왜 그렇게 불가능한 일을 바라는지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그녀의 욕망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인종적 자기 혐오였다. 20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자기 혐오에 빠져드는지 궁금했다. 누가 그녀에게 이야기해준 걸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별종이 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녀가 부족하다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저울로 재면 무게가 조금 덜 나간다고 누가 말한 걸까? 이 소설은 그녀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에 의문을 제기한다.
[화자의 회고]
모두가 쉬쉬했지만,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피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금잔화가 피지 않은 것은 피콜라가 자기 아버지의 아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사해 보았더라면, 아니 조금만 덜 우울했더라면 우리 씨앗만 싹을 틔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해에는 호수 앞의 정원들에서도 금잔화가 피지 못했다. 하지만 피콜라의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라던 우리는 오로지 우리가 걸어놓은 마법에만 신경을 썼다. 우리가 씨앗을 심은 후 주문만 제대로 외웠다면 그 씨앗들은 꽃을 피울 것이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것이라 믿으며.
언니와 나는 한참 후에야 씨앗에서 초록색 싹이 나오지 않으리란 사실을 인정했다. 일단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되자, 우리는 잘못을 서로 미루며 싸웠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언니가 옳다고 생각했다. 그건 순전히 내 탓이었다. 내가 씨앗을 너무 깊이 심었던 것이다. 그 땅이 불모지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피콜라의 아버지가 그의 씨앗을 검은 피부의 자기 딸에게 뿌렸던 것처럼 우리도 검은 흙으로 덮인 작은 땅에 씨앗을 파종했다. 우리의 순수와 믿음은 피콜라의 아버지가 지녔던 욕정과 절망만큼이나 비생산적이었다. 지금 분명한 것이 있다면 희망, 두려움, 욕정, 사랑 그리고 슬픔, 그 모든 것 중에서 피콜라와 불모의 땅만 남았다는 것이다. 촐리 브리드러브는 죽었고 우리의 순수도 사라졌다. 그 씨앗들도 메말라 죽었고 피콜라의 아기도 죽었다.
‘왜’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왜’라는 말의 해답을 찾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어떻게’라는 말에서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자기 혐오]
브리드러브 가족은 공장의 인원감축으로 생활이 일시적으로 힘들어 상점 자리에서 산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한 흑인이기 때문에 거기 살았다. 자신들이 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곳에 머물렀다. 대대로 물려받는 가난이 망신스럽긴 해도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한 몰골은 그들만의 것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추하지 않다는 확신을 줄 수 없었다.
행실이 추한 아버지 촐리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브리드러브 부인, 새미 브리드러브 그리고 피콜라 브리드러브-은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도 자신들이 추하다고 굳게 믿었다. 그들의 눈, 그들의 작은 눈은 좁은 이마 밑에 붙어 있었다. 일자로 이어진 진한 눈썹과는 달리 이마 선은 모근들이 불규칙하게 자리잡아 울퉁불퉁했다. 그들의 코는 오뚝했지만 구부러졌고 콧구멍은 오만해 보였다.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귀는 약간 앞쪽으로 돌출해 있었다. 입은 보기 좋게 생겼지만 전체 얼굴에 가려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들이 왜 그렇게 추해 보이는지 자세히 살펴봐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문득 그들이 추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건네준, ‘추함’이라는 외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든 것과 같았다.
신은 말했다. “너희는 추한 족속이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 말을 받아칠 만한 것이 없다. 광고 게시판, 영화, 사람들의 시선은 신의 말을 뒷받침할 뿐이다. “맞아요. 당신이 옳아요.” 그 들은 말했다. 그들은 손에 추함을 받아들고, 망토처럼 그것을 걸치고 세상을 배회했다.
[촐리 브리드러브]
그녀는 자신이 만질 수 있고, 그렇기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그가 아주 싫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노와 발화되지 않은 욕망, 이 모두를 아내에게 쏟아부었다. 아내를 미워하면서도 자신은 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촐리는 어린 시골 소녀와 수풀 속에서 재미를 보려다, 두 명의 백인 남자에게 들켜 놀란 적이 있었다. 그들은 촐리의 엉덩이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촐리는 겁에 질려 하던 짓을 멈췄다. 그들은 낄낄거리며 말했다. 손전등 불빛은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 그 짓을 해, 깜둥아. 잘해봐, 깜둥이. 잘해보라고.”
손전등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까닭 모를 이유로 촐리는 그 백인들을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소녀를 증오하고 멸시했다.
[브리드러브 부인]
그녀는 가족 간의 애정이 깊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관대하기까지 한 부잣집에서 일했다. 그녀는 그들의 집을 보고 아마포 냄새를 맡고 실크 커튼을 만지며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의 분홍빛 잠옷, 수가 놓인 흰 베갯잇, 가장자리를 푸른 수레국화로 장식한 시트들. 그녀는 이상적인 가정부가 되었다. 가정부라는 역할을 통해서만 그녀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백색의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따뜻하고 깨끗한 물을 자기로 된 욕조에 받아 피셔 집안의 어린 딸을 목욕시켰다. 보풀 있는 수건으로 아이의 몸을 닦아주고 귀여운 잠옷을 입혀주었다. 그런 다음 노란 머리를 빗겨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의 감촉을 즐기면서, 아연으로 도금한 욕조도, 풍로에 데운 물도, 부엌 싱크대에서 빨아 먼지가 폴폴 나는 뒷마당에서 말린 얇고 뻣뻣한 수건들도, 거친 털실처럼 이리저리 얽혀 있는 덥수룩한 검은 머리카락도 없었다.
그녀는 곧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는 데 흥미를 잃었다. 그녀가 사는 물건은 오래가지 않았고, 아름답지도 멋있지도 않았으며, 상점을 개조한 누추한 건물에서 빛도 발하지 못했다. 점점 더 그녀는 자신의 집과 아이들 그리고 남편에게 소홀해졌다. 집과 가족은 잠들기 전에 잠시 떠오르는 잡념 같았고, 하루 중 자투리 시간인 새벽이나 늦은 밤 같았다. 그때는 피셔 가족들과 보낸 하루를 더 밝고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만드는 암울한 시간이었다. 피셔 씨의 집에서는 물건들을 정리하거나 닦을 수도 있었으며, 단정하게 줄을 맞출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푹신한 양탄자가 깔려 있어 편치 않은 한쪽 발의 터벅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름다움과 질서, 청결함과 칭찬을 발견했다.
그녀는 몇 주 동안, 심지어 몇 달 동안 손도 대지 않을 음식이 높이 쌓여 있는 찬장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상자째로 산 야채 통조림, 설탕 과자, 작은 은접시에 담긴 리본 모양의 사탕과자 위에 여왕처럼 군림했다.
자신의 일로 갔을 때는 모욕을 주었던 빚쟁이들과 상점 종업원들도 피셔 집안의 가정부로서 찾아가면 존경심을 보였고 심지어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색이 조금만 칙칙하거나 손질이 조금만 되어 있지 않아도 쇠고기를 사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샀을 법한, 악취가 조금 나는 생선도 생선 장수의 면전에 던져버렸다. 그 집에서는 권력과 칭찬,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새미 브리드러브]
새미는 욕설을 하고 집을 나가거나 싸움에 끼어들었다. 새미는 열네 살 무렵, 벌써 스물일곱 번이나 가출한 경험이 있었다. 한 번은 버팔로에서 석 달 동안이나 머물다 돌아왔다. 강제로 끌려왔는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돌아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새미는 뿌루퉁해 있었다.
[피콜라 브리드러브]
“애야, 뭘 도와줄까?”
그녀는 약간 튀어나온 듯한 배에 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아마, 아마 당신은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무슨 일?”
“저는 이제 학교에 못 가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에요.”
“어떻게 도와줄까? 말해봐, 겁먹지 말고.”
“제 눈을요.”
“네 눈이 어때서?”
“눈을 푸르게 해주세요”
(BOOK : 2022-001-0299)
소설의 효용성이란 측면에서 본다면 이 소설은 정말 많은 것들을 느끼고 깨닫게 한다. 1993년 미국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토니 모리슨. 그녀의 첫번쨰 작품인 '가장 푸른 눈'은 인종 차별과 그 속에서 철저하게 스러져가는 흑인 소녀 피콜라가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백인의 눈이었다.
'인종의 용광로'라는 미국에서 흑인 소녀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여태껏 단 한번도 곰곰이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에 봉착했다. 백인에 대한 흑인의 멸시, 흑인끼리의 차별(흑인과 검둥이), 흑인 남자의 흑인 여자에 대한 핍박, 흑인 어른의 흑인 소녀에 대한 폭력. 마치 견고한 불평등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흑인 소녀다.
'모두가 쉬쉬했지만, 1941년 가을에는 금잔화가 피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금잔화가 피지 않은 것은 피콜라가 자기 아버지의 아기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 작가 후기에도 등장하지만, 1941년은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이 결정된 해였고, 흑인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차별은 극에 이르렀다. 클라우디아란 10살난 소녀의 눈으로 바라본 흑인 소녀 피콜라와 그 주변의 이야기가 가을,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이란 계절을 타고 흐른다.
소설 도입부가 흥미롭다. 마치 '철수야 안녕, 영희야 안녕, 바둑이도 멍멍'과 같은 지극히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할 것은 무미건조한 이야기가 흐른다. 이 부분은 각 섹션마다 일부 발췌되어 백인들의 단순한 삶(집, 가족, 친구, 고양이, 개 등)이 피콜라에겐 얼마나 실현불가능한 것인지를 뼈아프게 그려내고 있다. 백인 중심적이고 인종 차별적인 환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피콜라는 아버지에 의해 강간을 당하고, 임신을 하게 된다. 유산되고 말았지만, 피콜라는 끝내 미친 채로 거리를 헤매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 촐리는 어떤 상흔을 간직한 걸까? 어린 시절, 한 소녀와 섹스를 하던 도중 백인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갖은 모멸감을 안게 된다. 백인의 흑인에 대한 탄압과 멸시는 고스란히 대물림되고, 흑인끼리도 진짜 흑인이냐, 깜둥이냐를 놓고 반목하게 된다.
소설의 시점은 어린 클라우디아의 시점과 전지적 작가시점, 어른이 된 클라우디아의 시점으로 옮겨간다. 그리하여 중간 중간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마치 퍼즐을 풀어가듯 독자에게 내맡긴다. 실로 정독에 가깝게 읽기에 집중했고, 등장 인물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며 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미욱한 소설 독법을 가진 나로서는 온전히 이 소설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면 그리 어렵지 않으나, 소설의 이면에 담고 있는 도저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제대로 짚어낼 수 없었다.
이 소설만큼 작가 후기가 긴요한 적이 없었다. '피콜라에게 경의를...'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토니 모리슨의 이야기는,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떤 의도로 구성했으며, 어떠한 사회적 의의를 가지는지, 어떤 메시지를 세상에 던지는지를 직설적으로 풀어놓고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가장 푸른 눈'에서 주목한 것은 흑인성의 회복이라 했다. 또한 비밀의 폭로라고 했고, 그것을 온전히 여성적인 언어로 바꾸고자 고민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역자의 말에 등장하는 흑인 음악 '블루스'가 떠올랐다. 어린 클라우디아가 바라본 백인 중심의 사회, 그 처절한 핍박 속에서 아버지에 의해 상처받고, 끝내 미쳐버리고 만 어린 소녀 피콜라. 그런 피콜라를 아프게 바라보는 클라우디아의 핏빛 블루스.
말하지 않아도 인종 차별은 그 뿌리가 깊다. 버락 오바마의 대통령 당선으로 그 뿌리의 일부가 빙산의 일각처럼 잘려나간 듯 보이지만, 이국의 평범한 국민이 바라보는 미국은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러면서 되짚어본다. 소위 단일 민족,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우리나라는 얼마나 더 심할까?라는. 아버지가 계신 시골만 하더라도 3집 건너 1집이 베트남, 중국, 필리핀 등 다문화가족이다. 하지만 진정 다문화란 없다. 우리나라가 울타리 친 그 속으로 편입하느냐 안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들의 문화를 이 땅에 뿌리내리는 걸 두려워하는 편협한 인종 차별주의가 우리네 땅에서도 자행되고 있다.
흑인 음악인 블루스는 백인들에 의해 대중화되고, 상품화되었다고 말하는 토니 모리슨. 그녀는 이제 소설이 블루스를 대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끝없는 문제 제기와 투쟁, 화합을 통해 진정 '인간'다움이 실현되는 세상을 꿈꾼다. '한 인종 전체를 귀신들리게 하는 무엇인가가 사회의 가장 여린 구성원인 어린이, 그 가운데서도 가장 상처받기 쉬운 소녀에게 어떻게 뿌리내리는가에 초점을 맞췄던' 그녀는 흑인임에도 비교적 안온한 삶을 살고 있는 클라우디아 가정을 보여주며 작게나마 희망의 메시지를 던진다.
피콜라가 미쳐가면서 거울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다시 떠오른다. '푸른 눈'은 더이상 누군가의 전유물이 아닌, 그냥 다른 인종의 그것일 뿐이다. 아마도 토니 모리슨이 말하는 '가장 푸른 눈'은 피콜라와 같은 중층적인 핍박과 아픔이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는 따뜻한 눈일 것이다.
그녀에게 퓰리처상을 안겼던 1988년작 '빌러비드(Beloved)'를 주문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받지 못한 자들을 사랑받은 이들이라 부르리라.'라고 시작하는 로마서 9장 25절이 가슴에 와 박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