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05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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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80쪽 | 1100g | 153*224*35mm |
ISBN13 | 9788936471880 |
ISBN10 | 8936471880 |
발행일 | 2010년 05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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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80쪽 | 1100g | 153*224*35mm |
ISBN13 | 9788936471880 |
ISBN10 | 8936471880 |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1장 일제강점기의 끝자락을 산 이야기 2장 국민학교 6학년 때 해방을 맞은 이야기 3장 중학교 5학년 때 6·25전쟁을 당한 이야기 4장 대학원생으로 4·19와 5·16을 겪은 이야기 5장 박정희 '유신'독재 아래 산 이야기 6장 박정희 살해사건 후 '서울의 봄'을 산 이야기 7장 전두환정권에 의해 해직교수가 된 이야기 8장 복직 후 학문 방향이 바뀐 이야기 9장 6·15 남북공동선언에 동참한 이야기 10장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이야기 11장 6·15선언 5주년 기념행사 이야기 12장 상지대학교 총장 시절 이야기 13장 그밖에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들 1 14정 그밖에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들 2 글쓰기를 마치면서 부록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일지 강만길 연보 저서목록 및 상훈경력 |
역사가의 시간은 우선 재미있다. 책을 잡으면 밥도 굶고 몰입하게 해주는 신비로운 중독성이 있다
특히나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중년이상 세대들에게는 특히 그럴 것이다
우리가 삼국사기를 정사라 하고 삼국유사를 야사라고 한다 그 표현은 잘못된 표현같다 진정한 역사는
삼국유사 아닐까?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삼국사기는 어느 모로 봐도 부족해보인다
역사가의 시간은 -말하자면-삼국유사에 해당되는 책이다 중고교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역사의 섬세한 면까지 다 터치해주는 매력이 있다
우리 역사의 숨겨진 진짜 이면을 보고 싶다면 역사가의 시간을 일독했으면 한다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96
살아온 나날과 살아갈 꿈
― 역사가의 시간
강만길 글
창비 펴냄, 2010.5.20.
역사는 무엇일까 하고 돌아보면, 두 가지가 떠오릅니다. 하나는 내가 살아온 발자국이랑 내 어버이가 살아온 발자국이랑 내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온 발자국이랑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발자국입니다.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친 시험지식입니다.
중학교에 들어설 무렵 비로소 ‘역사’라는 이름을 지식으로 맞이합니다.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도 ‘역사’나 ‘국사’나 ‘사회’라는 이름으로 여러 지식을 맞이했지만, 중학교에 들어서니, 하나라도 이름과 숫자를 잘못 외면 죽죽 그으면서 틀렸다는 말을 듣습니다. 학교에서 알려주는 역사는 오직 ‘시험을 치르면서 머릿속에 외워야 하는 통계와 숫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학교에서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치니 젊은이가 역사를 모른다고 하지만, 학교에서 교과서로 역사를 다루려 하기 때문에 젊은이가 역사를 도무지 모르는 머리나 마음이 된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교과서는 ‘정치집권자 이름과 발자국’을 그러모은 시험문제일 뿐입니다. 대학입시에 따라 엮은 어설픈 ‘시사상식’입니다.
대통령 이름이 역사일까요? 이것도 역사라면 역사일 테지만, 삶하고는 아주 동떨어진 역사입니다. 임진왜란이 터진 햇수가 역사일까요? 일제강점기가 언제인가 하는 숫자가 역사일까요? 매국노와 독립운동 같은 이름이 역사일까요? 새마을운동이 역사일까요? 자유무역협정이 역사일까요?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역사일까요?
.. 조선청년들이 처음에는 지원병으로, 다음에는 징병으로 일본군대에 입대하게 되면, 그 집에는 며칠 전부터 높은 깃발이 세워지고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학교에서는 조선사람도 일본천황의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가르쳤다 … 초등학교 6학년생은 일본어 상용에 열중하면서 침략전쟁을 위한 노력동원에 끌려 다녔는가 하면 미군의 ‘대규모 폭격설’에 시달리기만 했다 …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35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혹독한 강제지배를 받고 해방된 이 땅에서 침략자 편에 섰던 군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는 역사를 겪어야 했으니, 그러고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사회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42, 50, 58쪽)
사람들이 역사를 모르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가를 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지구별 뿌리와 숨결을 도무지 안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역사를 거스르는 짓을 저지르는 까닭은 사람들 스스로 삶과 사랑과 꿈을 모두 잊거나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서 어린이로 자라 푸름이를 지나 젊은이가 되는 동안, 오늘날 한국에서 사람들은 어떤 나날을 누릴까요? 이동안 사람답게 살까요, 아니면 대학입시에 시달리는 시험노예가 될까요? 어릴 적에 제대로 신나게 마음껏 노는 어린이는 몇이나 되는가요? 아름다운 이야기가 깃든 책을 읽는 어린이보다 수학 문제집이나 영어 교재를 숙제처럼 풀어야 하는 어린이가 훨씬 많은 한국에서 삶이 있기는 있을까요? 대학생이 되면 삶이나 사랑이나 꿈이 있을까요? 연봉 1억쯤 받는 일자리를 얻으면 비로소 삶이나 사랑이나 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릴 적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삶다운 삶이 없는 채 지냈는데, 이렇게 쳇바퀴로 구른 줄조차 느끼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사람입니다. 그러니, 시험지식으로 역사 과목 점수를 잘 받았어도 역사를 알 턱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구별이 어떻게 태어났고, 해와 별과 달이 무엇인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시험지식이 아닌 삶과 넋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6·25전쟁을 침략전쟁으로 보면 전후 상당기간 그랬던 것처럼 남침이냐 북침이냐가 문제의 초점이 되고, 그 뒤에는 침략한 쪽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과 복수심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 6·25전쟁을 계속 침략전쟁이라 강조하면서 침략자를 가려내어 그에 대한 원한과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이 평화통일을 이루고 동아시아 및 세계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이 되겠는가 … 속없는 사람들이 흔히 “남자는 군대에 가 봐야 된다” 같은 말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방의무는 신성하다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인간사회가 미개해서 전쟁이 문제해결의 최고수단이던 시대나 약육강식의 제국주의가 활개치던 시대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114, 115, 133쪽)
강만길 님이 쓴 《역사가의 시간》(창비,2010)을 읽습니다. 강만길 님은 이녁이 살아온 나날을 더듬으면서 《역사가의 시간》을 씁니다.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나 시험문제로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녁이 몸으로 부대끼면서 누린 이야기를 씁니다.
역사란 이야기입니다. 살아서 숨쉬는 역사란 이야기입니다. 지식으로 알려주거나 논문으로 쓸 때에 역사가 아니라, 서로 도란도란 주고받을 이야기일 때에 역사입니다.
독도가 어느 나라 땅이냐 하고 묻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바다나 하늘은 어느 정치집단이 거머쥐는 물건이 아닙니다. 독도를 일본땅이라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한국땅이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살뜰히 아끼거나 돌보면서 가꾸려는 손길이 없다면, ‘내 땅’이라고 외치는 뜻이 없습니다.
4대강사업 따위를 하면서 냇물을 모두 망가뜨리는데, ‘내 땅’이란 무엇일까요. 4대강사업이 아니었어도 새만금이나 시화호를 밀어붙였는데, ‘내 땅’이란 있을까요. 골프장에서 농약을 엄청나게 뿌리고 땅속에서 샘물을 어마어마하게 뽑아내어 이 나라를 망가뜨리는 줄 뻔히 안다면서, 막상 골프장을 줄이거나 없애려는 몸짓은 없는데, 참말 ‘내 땅’이란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평화를 바란다면서 새로운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면서 새로운 군부대를 더 늘리려 하는 짓을 보면, 한국사람은 ‘한국땅’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고 할밖에 없습니다. 역사도 모르고 삶도 모르니 모두 바보짓을 하면서 쳇바퀴를 돕니다.
.. 식민지화의 주된 원인이야 물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있지만, 조선왕조 지배층의 아둔함과 무능·부패에도 책임이 있었다 … 당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패한 곳의 하나가 바로 군대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부패의 온상이던 군부의 쿠테타로 세워진 정부가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 운운하는 데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 민주주의가, 역사가 하룻밤 사이 총칼에 의해 감금당하는데도 역사학계는 아무 말도 못했다 …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의 영구집권계획이 진행되어 가는데도, 박 정권이 스페인의 프랑꼬 정권처럼 되어 가는데도, 경제성장이란 미몽에 빠져 국민 일반은 물론 지식인들까지도 대부분은 그것에 순종해 가고 있었다 .. (151, 161, 189. 191쪽)
교과서에 적어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역사가 아닙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대학입시로 몰아넣는 끔찍한 지옥이기 때문에, 교과서를 잘 엮는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란 없습니다. 더군다나, 교과서에 담을 수 있는 역사 지식은 아주 조그맣습니다.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은 교과서에 몇 줄로 담지 못합니다. 우리가 걸어갈 발걸음은 교과서에 몇 쪽으로 싣지 못합니다.
내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살아온 나날만 해도 책 몇 권은커녕 수십 권으로 써도 모자랍니다. 내 이웃과 동무가 살아온 나날만 해도 책 수백 권에 이르도록 쓸 만합니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 한 권은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요. 고작 역사 교과서 한 권으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못 바꾸는 역사책입니다. 아무것도 못 짚는 역사책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알고 싶은 사람은 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책을 덮고 눈을 떠서 둘레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숲이 흘러온 역사를 책이나 도감으로 알려줄 수 없습니다. 책이나 도감은 나무 한 그루가 어떻게 씨앗에서 깨어나 수천 해를 살아내는지 적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람들은 수천 해를 살아내지 않거나 못하니까, 나무 한 그루 이야기조차 ‘기껏 쉰 해 남짓’ 살피면서 ‘다른 책을 넘기’면서 몇 줄 끄적일 뿐입니다.
고구려나 백제나 신라나 가야나 부여 적 이야기를 ‘몇 권 남은 역사책’을 훑으면서 살핀다 한들 얼마나 제대로 밝히거나 알 수 있을까요? 임금님이 먹던 밥이나 임금님이 흝은 말 몇 마디는 알는지 몰라도, 지난날 이 땅을 일구거나 가꾸면서 삶을 지은 사람들 이야기는 한 줄조차 없는 그런 역사책이 무슨 역사를 밝히거나 알릴까요?
하다못해, 궁궐을 어떻게 짓는가 하는 역사조차 책으로 없고 책으로 밝힐 수 없습니다. 궁궐에 어떤 나무를 썼고, 어떤 나무를 어떻게 베고 손질하고 다루어서 기둥을 세우고 도리를 엮는지 어떤 책으로도 못 밝혔고 안 밝힙니다. 궁궐 기둥으로 삼을 만한 나무는 몇 백 해를 자란 나무인지 누가 알까요. 궁궐 기둥을 받치는 돌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은 돌인지 누가 알까요.
.. 베트남파병이나 이라크파병이 국익을 위해서라 하면, 지난날 제국주의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파병이나 침략도 그들 국민들에게는 국익을 위해서라 말한 것과 다르지 않게 된다 … 행방을 모른다는데도 매일 불러내어 고문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야말로 사람 패는 일을 즐기는 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서슬이 퍼렇던, 그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문을 가하고 목숨까지 빼앗던 치안국 ‘대공분실’이 ‘인권보호센터’로 되고, 학살의 현장이 희생자의 기념관이 되고 마는 그 ‘이치’를 모르면 결코 역사를 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 (218, 254, 279쪽)
조각조각 따지는 시사상식이나 정보는 역사가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타고 흐르는 사건이나 사고 소식은 역사가 아닙니다. 신문이나 방송도 쌓이고 쌓이면 역사가 된다고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온 발자국을 엿본 눈길’ 가운데 몇 가지일 뿐입니다.
《역사가의 시간》이라는 책에도 나오는데, 강만길 님은 ‘아주 가볍게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강만길 님이 받은 고문은 아주 가볍습니다. 그나마 강만길 님은 이렇게 이녁 책에 몇 줄 적기라도 했지만, 군사독재정권이 춤추던 때에 끔찍하게 고문을 받다가 죽은 숱한 사람들 이야기는 아무 책에도 안 적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죽은 윤동주 시인 같은 사람이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 어떤 책에 적혔을까요? 일제강점기에 부역을 했던 사람들이 남몰래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 얼마나 역사로 적혔을까요?
역사를 모르면 잘못된 일이 되풀이된다고들 말합니다. 틀리지 않는 말입니다. 다만, ‘역사를 모르’면 잘못이 되풀이된다기보다 ‘삶을 모르’면 잘못을 되풀이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삶을 지어 아름답게 사랑하는 꿈을 가꾸지 않을 적에 잘못을 자꾸 되풀이합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시키는 짓을 고스란히 따르니, 잘못을 자꾸 되풀이합니다. 인문 지식을 머릿속에 넣는다고 해서 잘못된 역사를 멈추지 않습니다. 인문 지식은 하나도 없어도 스스로 삶을 지을 줄 알 때에 잘못된 역사를 끊습니다. 책 한 권 안 읽었어도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꿈을 보듬을 적에 잘못된 역사를 멈추게 합니다.
머릿속에 인문 지식을 담으면 무엇을 할까요? 이녁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입시지옥 쳇바퀴를 밟도록 몰아넣기만 하는걸요. 머릿속에 진보나 개혁이나 평등이나 평화 같은 지식을 잔뜩 넣으면 무엇을 할까요? 막상 이녁이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은 뒤에 입시학원에 넣고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 졸업장’을 따도록 부추길 뿐인걸요.
.. 역사의 진행은 모든 부분이 고루 나아갈 때 비로소 그 옳은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결코 산업화의 주력이 따로 있고 민주화의 주역이 따로 있고 평화통일의 주역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대학총장 한 임기를 겪으면서 절실히 느낀 점은 모든 대학은 총장의 업무추진비를 비롯해서 재정 일체를 세목까지 철저히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 뒤돌아보면 일제강점기 민족사회 전체가 제국주의 일본의 강제지배 아래 있을 때도 우리 역사학은 그같은 민족사적 현실에 관심을 갖고 그런 상태에 빠지게 된 원인이나 대응책 같은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 김영삼 정부 때는 말할 것 없고 김대중 정부 때까지도 행정부에는 민주세력이 많이 진출했다 해도 국회는 군사독재정권과 유착되었던 반민주세력이 그대로 점령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과거청산특별법 같은 것이 제안될 수도 통과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 (364, 444, 503, 512쪽)
섣부른 지식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습니다. 섣부른 지식은 오히려 엉터리 정치권력한테 힘을 보태어 줍니다. 인문 지식만 쌓는 일은 되레 바보스러운 정치권력이 더 힘을 내도록 부추깁니다.
정치권력이 꾀하는 바보짓에 휘둘리지 않도록 쳇바퀴질을 멈출 때에 역사를 알아챕니다. 역사를 알아채는 사람은 이녁 아이를 의무교육 수렁에 집어던지지 않습니다. 역사를 깨달은 사람은 아이와 함께 삶을 새롭게 배워서 스스로 짓는 길을 걷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왜 자꾸 멍청한 짓을 하는지 꿰뚫어보아야 합니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머리통만 무거울 뿐, 몸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지식을 많이 머릿속에 집어넣는다고 하더라도, 인문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집회에 자주 나가서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짓는 삶이 없으면 모든 일은 정치권력자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입니다.
옛날부터 ‘나라를 버틴 힘’은 군대나 임금님이나 학자가 아닙니다. 책이나 글을 하나도 모르는 채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짓고 아이를 돌보면서 이야기와 말과 사랑을 물려준 수수한 어버이입니다. 수수한 어버이가 수수한 삶을 가꾸면서 수수한 사랑으로 모든 이야기를 짓고, 이 땅을 알뜰살뜰 일구었습니다.
숲이 없으면 지구별은 무너집니다. 도시를 키우고 공장을 세워 경제발전 따위를 아무리 들먹거려도 숲이 없으면 지구별은 죽음입니다. 석유를 아무리 많이 뽑아낸들 석유를 먹지 못합니다. 석유로 돈을 버는 나라마다 사막에 숲을 가꾸려고 엄청나게 돈을 써대는 까닭을 읽지 못하면서, 이 조그마한 한국땅에 고속도로와 온갖 공장과 발전소와 아파트 따위만 자꾸 짓는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한국 역사는 늘 뒷걸음을 칠밖에 없습니다.
아파트를 장만할 돈이 있으면 시골에 땅을 장만해서 숲집을 가꾸어야지요. 스스로 삶을 지어야지요. 정치권력자와 경제권력자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멍청한 역사는 또 되풀이합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베푸는 정책을 기다리지 말고, 어떤 정부지원 없이 즐겁게 삶을 지어서 일구는 길로 걸어야 바보스러운 역사를 끊습니다. 군사독재정권이 시골을 무너뜨리고 도시를 키우는 까닭을 제대로 읽어야 합니다. 군사독재정권이 끝난 뒤에도 다른 정치권력이 똑같이 도시를 키우고 시골을 짓누르는 까닭을 올바로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도시에만 몰려들어 돈만 벌면서 ‘삶짓기’를 안 하면, 정치권력자와 경제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쳇바퀴를 돌 수밖에 없는 줄 똑똑히 읽어야 합니다. 4347.12.2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역사학(歷史學) 대가(大家)가 들려주는 뚜렷한 한국현대사 이야기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진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활용방법에 따라 질(質)이 달라짐은 부연설명을 거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은 25시간, 한 걸음 더 나아가 26시간을 사용한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 그렇지 못한 사람은 20시간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을 지금껏 살아오면서 많이 보고 듣고 읽은 기억이 난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고자 하는 인물에게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한 인물의 삶의 궤적을 보고 인생여정을 통해서 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 어울리는 표현이다. 이 인물은 ‘역사’를 가르치고 알리는 것을 업(業)으로 삼고 있으며 대한민국 역사학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분이다.
여기 YES24 희망의 인문학캠페인 ‘역사’부분에서 추천하고 있는 책인 《20세기 우리역사》의 저자가 바로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강만길교수께서 쓰신 책이다. 이외에도 많은 책들을 저술했는데 기존 학계 풍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현실 안주형의 천편일률적인 역사바라보기에 머무르지 않고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이를 뛰어넘어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보아도 손색이 없는 활동을 하셨다. 위에 언급한 《20세기 우리역사》를 비롯하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고쳐쓴 한국근대사》, 《고쳐쓴 한국현대사》 등의 책들을 손꼽을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성공한 부류에 속하는 분으로 인식되는 저자는 ‘양지’만을 탐했던 부류들과는 엄연히 다른 길을 걸었음을 볼 수 있다. 이를 소개하자면 대학 중에 대한민국에서 많은 이들이 선호하여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대학의 교수도 하셨고 여러 자신의 재능을 통해 사회활동들, 예를들면 상지대학교 총장,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親日反民族行爲眞相糾明委員會)위원장을 역임하며 본인에게 부여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분단시대’라는 말을 통해 금기시되고 불경시되었던 북녘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확보하게 하는 역할을 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진영의 탁월한 학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분단극복사학에 대한 조광교수의 글을 참조하면 도움을 받을 것이다.(내일을 여는 역사23호를 참고할 것) 이를 살짝만 인용해보면 “분단사학에 기생하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항하는 역사이론을 창안하였고 실증주의라는 명목으로 역사학을 형해화하려던 시도에 대한 반격으로 시도되었다.”라고 저자를 평가하고 있다.
이 책 저자 강만길교수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이후 줄곧 한길만을 선택해서 달려온 분이다. 선택을 한 것인지 선택을 당한 것인지는 책을 읽는내내 내 머릿속의 수수께끼처럼 다가왔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시기적절하게 이루어진 여러 만남(이재호선생님, 고3담임 성낙준선생님 ,신석호선생님)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인생방향과 자리매김이 혹여나 계획되어 있는것인가에 대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상황을 ‘운명’으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저자가 어디에선가 쓰임받을 만큼 준비하고 준비한 노력의 흔적들을 책 곳곳에서 들여다 볼 수 있다. 혹자들은 인생을 살면서 몇 번의 기회는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언제나 기회의 창이 열려 있는 게 아니어서 제한된 상황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만이 잠시동안 열려있는 ‘기회의 창’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고 보는데 이런 모습을 저자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저자에 대해 ‘절제’함을 엿볼 수 있다. 아무리 ‘기회의 창’을 통해 기회를 잡고 일을 한다 하더라도 고도의 ‘절제’와 ‘관리’가 없으면 이는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되는 유형의 사람도 많다. 이유는 어떤 한분야에 재능이 있게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선(善)한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다. 이런 선(善)한욕심들이 인류역사의 발전과 진보에 대단히 큰 영향을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위대한 정치인, 위대한 학자는 바로 선한 양심적 동기에서 비롯되었음은 쉽게 인식할 수 있듯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적인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우리는 여러 매스컴을 통해서도 보아왔다. '조국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식의 수사(修辭)적 표현들로 겉모양을 포장한 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보는 이들을 매혹시킨다. 여기까지는 별부담없이 바라볼 수 있다. 사내대장부가 큰 뜻을 표현하기에 넓은 마음과 열린 자세로 '호연지기(浩然之氣)식의 생각을 하는구나'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달도 차면 기울고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듯 적절한 모습을 유지 못하고 일그러지는 사람들의 모습들은 나를 슬프게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업을 통해 일가를 이룬 분이 정치라는 낯선 그리고 평소 동경하던 무대를 넘나들며 활약을 펼친다고 하지만 결과도 시원치 않고 그나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재능마저 써먹을 수 없을정도로 패가망신(敗家亡身)하는 경우도 종종 보아서인지 저자의 ‘갈 때 가고 멈출 때 멈춘 삶’을 난 책을 읽는내내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지혜’라는 생각을 해본다.
왜 나는 이 책을 읽고 주목하는가?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굴곡(屈曲)많은 대한민국 현대사 사건을 재음미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이 책.
며칠 전 노태우씨가 회고록이란 이름으로 글을 써서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한다. 항간 소문에는 전두환씨도 이에 뒤질세라 회고록을 준비중이라고 한단다. 이들뿐만이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삶을 마칠 때 쯤이면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을 것으로 본다. 특별히, 자신이 무엇인가를 했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더할 것이다. 1980년 5·18에 대한 바라봄이 내게는 대단히 궁금하게 다가올 것이다.
특별히 각자의 방식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 또는 견강부회(牽强附會)식의 서술이 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마음이 스며든다. 어차피 이청준 著《조만득씨》에서 보듯 자기세계에 빠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사람들을 볼 때 불편함으로 다가오는데 역사를 바라볼 때 현실에서 느끼는 생각보다 이 강도는 더하게 밀려온다. 이것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은 독자 및 국민들의 몫이기에 올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형성해주는 책을 읽는 것은 필수다.
굴곡이 많은 현대사를 보내오면서 어려운 시기를 당당하게 그리고 슬기롭게 지성인으로서 품격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곡학아세(曲學阿世)하지 않는 자세 등을 이 책에서 나는 만났다. 진정한 학자의 올곧음이라 말하고싶다. 책 내용 중 저자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부분을 옮겨본다.
“사람이란 현실에서는 안전하게 살지만 역사 위에서는 불안전하고 부당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현실에서는 불안전하고 손해보는 삶이지만 역사 위에서는 안전하고도 당당한 삶을 살 수도 있다.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는 물론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그러나 남을 가르치는 처지, 즉 남에게 일정하게나마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는 삶은 비록 고통이 따르더라도 어느 길을 택해야 하는가는 자명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길고도 긴 역사의 길과 짧은 현실의 길이 일치할 때야 쉽지만 그렇지 않을 때, 즉 긴 역사 노정에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되면서도 현실적으로 이익의 길을 택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따른다해도 역사의 길을 믿고 택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현실적 이익의 길이 아닌 역사의 길을 택했다가 어려움을 당한다해도 그것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일이 아닌가 한다.” 243~244쪽
자라나는 청소년 진로선택에 도움이 되는 이 책.
중고등학교로 대변되는 학창시절을 보낼 때 다양한 가능성을 토대로 여러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도 필요한 작업들이라 하겠다. 이에 역사학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분의 삶의 자세를 볼 수 있으며 한평생 다른곳을 둘러보지 않고 가르침을 준 분이라 생각하기에 훌륭한 사표(師表)가 되는 좋은 스승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역사를 하게 된 동기부터 여러사람들과의 만남들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한문실력이 대단한 훗날 부산대학교 교수가 된 이재호선생님과의 만남.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인 성낙준선생님과의 만남. 다른대학에 비해 고려대학교의 접수마감 기일이 아직 남은 것을 보고 혹시 지원자가 있을까 하고 원서 두어 장을 사오신 것이 인연이 되어 평소 좋아하던 역사학과를 선택한 것이 평생 직업이 되는 관계를 말해준다.
신석호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 “만약 합격하면 평생 역사공부를 하며 살 생각입니다”를 완전하진 않지만 ‘약속’을 이루며 살아간 인생여정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사표(師表)가 되는 부족한 시대에 던지는 아름다운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만남들을 꿈꿔보고 또한 이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자세를 기를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라는 학문에 대한 다가감과 알아감 그리고 진정성을 만나게 해준 이 책.
누군가에 의한 역사왜곡, 미화, 비꼬기, 비틀기 등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역사를 읽고 마주해야할 자세를 알려준다. 고압적이고 다그치듯이 알려주는 게 아니라 때론 결연하게 때론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겨울밤 화롯가에서 밤과 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하듯이 말하고 있다. 요즘에는 핵가족으로 인해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어 아쉽지만 예전 생각도 나고 저자의 부담없는 필치가 반갑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소개하며 주목받지 못하고 그냥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잊혀져 버린 존재’들 아니 ‘잊혀져야만 했던 존재’들을 다시금 현실 속에서 재생하여 생생하게 독자에게 소개하는 모습이 역사에 대한 다가감으로 인해 흥미롭다. 쿄오도제국대학의 두 조선인교수 이야기에서 소개하는데 이승기박사와 이태규박사를 언급하며 두 사람의 너무도 다른 행적을 알려주고 있으며 자칭 자유주의자 오기영이야기, 박무덕이야기 ,천관우이야기, 프랑스 파리에 사는 어느 한국인 학자 이야기, 비전향장기수들과의 이야기 등은 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들이어서 희소한 가치와 더불어 무한한 지적풍부함으로 다가온다.
나 역시 지금 한권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지만 특별히 역사서술에 대한 기준점을 제시해주는 부분이 왜곡과 미화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서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상일의 진실을 후인들에게 숨김없이 전하는 일일 것이다. 역사서술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고 어떤 조건에도 구애됨이 없이 있었던 사실 그대로를 진실되게 전하는 일일 것이다. 한때 잘못 갔던 길이라 해도 결과가 좋으면 그 길 자체가 마치 옳았던 것처럼 해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결과와 상관없이 잘못 갔던 길은 잘못 갔던 길 그것으로 분명히 밝혀내는 것이 곧 역사가 추구하는 진실이라 할 것이다.”
아울러,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며 ‘역사해석’과 ‘역사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우리가 취하고 있는 공화정 시대를 역사가관점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을 소개한다.
“역사적 평가는 종합적이고 객관적인 평가에 바탕을 둔 ‘최고최종적’평가를 지향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독도를 비롯해 일제시대에 벌어진 비극들은 여전히 ‘과거의 것’이 아닌 ‘현재의 것’으로 이해되기에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혜안(慧眼)을 찾을 수 있다. 일제시대를 일컬어 ‘식민지근대화론’ 이라고 미화하는 자들에게 저자는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에서 그 허구성의 단초를 밝히고 있고 널리 읽혀지길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일제시대 빈민생활사 연구》는 저자가 쓴 3대빈민, 즉 농촌 춘궁민과 화전민 그리고 도시지역 토막민의 생활상을 밝힌 논문집이다. 이 책에는 당시 지식인들 지금으로 보면 ‘학교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로 이해되는 분들이 지식인 대우를 받지 못하고 몰락해가는 사실을 실증했다고 한다. 제국주의 속성을 여실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한 생각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역사적 가치보다 계량적 수치 중심으로 경제상황을 보는 경우, 그 운영주체가 누구이건 또 누구를 위한 경제시설이건, 비록 침략자들에 의해 운영된 것이라 해도 수치상으로나 양적으로 많아지기만 하면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라 하겠다.”
저자께서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담당하고 있던 시절 친일파로 거론된 후손들이 위원회의 결정에 대한 반론으로 여러가지 이유를 포함한 헌법소원을 하였다 한다. 이 책에는 ‘과정’만 소개되고 있어 ‘결과’가 궁금하던 차에 독자로서 호기심이 발동하여 헌법재판소 홈페이지를 찾아가 결정문을 보니 모두다 ‘각하’되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싶은 분은 헌법재판소 결정 2006헌마1298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저자께서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을 사임한 이후 사실이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학계에 대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 책.
본 것을 본대로 말할 수도 쓸 수도 없었던 시대적 아픔이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평생 일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하고 모진 세월을 살아온 삶을 통해서 독재시대의 모습에 한 단면과 마주하게 된다. 일기를 마음대로 쓰지 못했던 시대상황, 꼬투리잡기에 혈안이 든 사람들에게 애꿎은 빌미를 받을까봐 쓰지못했던 한스러운 상황속에서 책 부록에 나온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일지 ‘일지 쓰기를 시작하면서’ 이 부분을 읽다보면 ‘당대사’에 대한 인식이 보이는데 객관적이고 진실되게 이해하고 서술하기 어려웠던 시절에 대한 자기반성 및 자기고백의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아직도 국정교과서에는 일제에게 우리가 어떻게 강탈당했는지는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지만 일제에 대항해 우리가 벌인 독립운동에 대한 서술에는 개략적인 부분만을 소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많이 있다. 그리고 순서도 우리가 어떻게 어려움을 극복했느냐를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닌 어떻게 당했는지를 먼저 서술하는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아래는 우리 역사학계의 소극적 행태에 대한 아쉬움을 전하고 있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순수 실증논문과 나름대로의 사론을 제시한, 말하자면 사론문(史論文)이라는 글을 엄격히 구분하는 편이다. 실증일변도의 역사논문과 사론은 물론 구분되어야 하지만, 순수 실증논문만을 학문적 업적으로 간주하고 사론은 일종의 ‘잡문’으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학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아카데미즘을 고집하면서 순수 실증논문만을 써야 학자로 대접되고, 사론 같은 글을 혹시라도 쓰면 흔히 학자라기보다 논객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통일’에 대한 정통 역사학자의 시선을 알 수 있는 이 책.
통일이란 말이 조롱당하고 통일이란 말이 희화화 되는 시대를 어쩌면 우리는 살고 있는 지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어 자칫 한국사의 인류에 대한 가장 큰 기여와 의무를 망각하면서 살아 가야만하는 상황으로 현재 우리들은 몰아가고 있는 줄 모르겠다. 얼마전 방송한 KBS통일대토론 같은 언론의 역할도 있어야겠지만 국민 개개인적으로도 통일에 대한 이해와 앎이 필요한 시점이다. 통일에 대해 접근하기에 앞서 저자께서 말하는 6.25전쟁에 대한 통찰력은 적어도 나에게는 이론이 없어보인다. 6.25가 주는 상징성은 전쟁으로는 더 이상 통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저자.
이어서 6.25전쟁의 교훈은 전쟁으로는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 요원(遼遠)하며 흡수통일 또한 가당치 않다는 것이다. 오로지 평화통일만이 대안이라 말한다. 저 처절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에서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지 말 것을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전쟁’이란 것을 통해 ‘전쟁무용론’을 배우라는 것이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특별수행원으로 북한을 오가며 북한한계와 학문적 교감을 가진 정신을 말하고 있다. 역사적인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자리에 남북의 약 50~60명 역사학 전공자는 나 혼자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듦으로써 무거운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런 책임감의 실천으로 평생모은장서를 북녘에 기증한 이야기를 보며 말뿐인 말장난만 일삼는 사람들과는 달리 평화적 민족통일에 대한 염원을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이 책으로 인해 배우는 유익이다.
역사와 통일을 갈망하는 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
역사와 통일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말뿐이 아닌 실천으로 우리에게 시사하고 보여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 책으로 들어오기 바란다. 인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진수(眞髓)들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희망도 발견하게 되고 어려움도 발견하게 된다. 독재시대 당시를 살던 사람들이 그러하듯 감옥에 대한 기억도 발견할 수 있고 생물학적 나이로는 80을 넘은 고령이지만 아직도 꿈을 꾸는 청년의 삶을살고 싶은 인생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만났다. 얼마전 본 연극 ‘노인과 바다’에서 아프리카 사자 꿈을 꾸는 주인공 ‘노인’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대목이다.
자기반성과 자기고백이 따른 이 책 참으로 좋다. 참으로 반갑다. 참으로 바람직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책을 읽고 또 읽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기쁨이다. 670쪽 가까운 분량의 책이 꽤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여느 전공서와 비할 데 없을정도로 책을 읽는내내 집중력을 요하는 것도 사실이나, 전문적 학술용어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열린마음으로 다가가면 보람을 느낄 것이다. 선굵고 큰 그릇을 만난듯한 즐거움을 이 책을 읽는 내내 경험하였다.
저자께서 강변하시고 설파하시는 “역사는 인류사회가 추구해 마지않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라는 명제가 더욱더 많은 독자들에게 전파되어 E.H.카를 비롯한 외국의 학자들의 명제만 귓가를 맴도는 우리네 현실에서 우리땅에서 자라고 체험하고 고민하면서 제대로 역사공부를 한 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이 많아지면 좋겠다는 개인적 소망을 피력하며 글을 맺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