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계집애인지 궁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모를 일이지만 만약 자주 만나게 되면 차차 알게 되지 않겠어요. 사실 그런 것 꿰고 있어봤자 서로 불편하고, 어색하고, 실망하고, 배신감 느끼고, 후회스럽고, 뭐 그런 것 아니겠어요? 똑똑한 사람들이 겪는 불행이 뭔지 아세요? 앞으로 닥칠 일을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항상 머릿속이 뒤숭숭하지요. 어엿한 대학 졸업하고도 떠돌이 생활을 한다고 해서 세상이 발칵 뒤집히도록 떠들썩한 꼴 본 적 있습니까? 사소한 말다툼 끝에 아내를 죽이고 깨끗하게 토막내서 보란듯이 강가에 버리는 사건이 일어나도 그런가보다 하지요. 십대가 용돈을 조르다가 수틀린다고 늙은 제 어머니를 칼로 찔러도 금방 잊어버리는 세상입니다. 세상 살기 복잡해지면서 남의 일로 고민하고 눈물 짜내는 순진한 세상은 19세기가 지나면서 멀리 떠내려가버렸어요. 아저씨나 저나 살다보면 단 한 번도 예상하지 않은 일과 마주치게 될 거예요. 우리가 서로 마주앉아 있는 이런 경우가 바로 그것이겠지요.” --- p.97~98
어머니가 나타나면, 그날 밤 굿판에 석유 불을 붙인 생쥐를 던져넣은 것은 굿판을 난장판으로 만들려 했던 저주에서가 아니라, 오직 어머니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말해야 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비로소 어머니와 나 사이, 혈육이란 이름으로 맺어진 삶에 세월이 흘러가도 돌이킬 수 없는 앙금이 생겨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흘러가서 사라지는 여울물에도 산그늘의 흔적은 남는다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주고받은 애증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p.139~140
나는 일찍부터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면, 그것이 시체에서 나온 손이라도 지체 없이 마주잡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난데없이 모습을 드러낸 아이가 혈육이란 것도 그래서 내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기적이었다. 기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그때부터 기적을 믿기 시작했다.
모든 일상에서 소소하게 일어나는 것들이 내겐 모두 기적이었다. 역 광장에서 장씨를 만난 것도 기적이었고, 단심이네가 나를 찾아낸 것도 기적이었고, 아이가 내 피붙이란 것도 기적이었다. 낯선 사람을 통해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도 기적이겠지만, 일상에서 하찮게 만나는 삶들도 내겐 기적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내겐 우연도 기적이었고 필연도 기적이었다. --- p.268~269
등에 업힌 아이 때문에 추운 밤공기 속에서도 온몸이 따뜻했다. 그 때문에 작은 행복감이 가슴속으로 가만히 스며들었다. 아이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포대기 밖으로 기울어진 고개가 왼쪽으로 꺾였다 오른쪽으로 꺾어지기도 했지만, 작은 몸뚱이가 포대기 밖으로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칠칠맞고 궁색해 보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행복이 별건가 싶었다.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질 때, 찢어진 우산이라도 준비돼 있다면 그것이 행복일 것이고, 따뜻하게 데워진 우유 한 잔에도 행복감은 담길 수 있었다. 살갗을 베어갈 것처럼 혹독한 추위가 닥쳤을 때, 조그만 마루방에서 잠잘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일 것이다.
빈대떡 한 조각이라도 말문이 막히게 맛이 있다면 그것 역시 행복일 것이다. 닭장 같아도 밤낮으로 전기가 들어오는 조그만 방이 있다면, 홑이불깃으로 얼굴을 가리고 누워 그 입김으로 추위를 막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손을 뻗으면 먹을 것을 집을 수 있거나 여행하는 젊은 여자에게 풀빵 한 개를 덤으로 넣어주었을 때 그녀가 웃음을 보내준다면, 그 또한 행복일 것이다. 엉덩이를 차가운 방바닥에 붙이고 자다가 요때기라도 깔고 잘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일 것이다. --- p.276~277
내가 그랬잖아. 난 지옥은 안 믿어도 운명은 믿는다고. 운명이 시키는 대로 살다보면 바보처럼 보이긴 하겠지만 세월은 물처럼 거침없이 흘러가기 마련이야. 나같이 하찮은 인생이라고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겠지. 인생이 뭔지 알아? 걸어다니는 그림자야. 해 떨어지면 사라지는 것이지.
--- p.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