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시멘트 바닥에서 혼자 아기를 낳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 발견된 것은 선명한 핏자국과 새파랗게 질린 아기뿐이었지요. 소녀는 온데간데없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간 이야기였습니다. 카메라가 핏자국이 남아 있는 시멘트 바닥을 몇 초 동안 비추고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으니까요. 하지만 제 마음은 그 붉은 화면에서 딱 멈추어 버렸지요. 그 날 소녀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왜 혼자서, 그것도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아기를 낳을 수밖에 없었는지 머릿속에 그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습니다. 울면서 소녀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저는 정말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무작정 덤벼든 거지요. 미친 듯이 썼습니다. 하지만 다 써 놓고 보니 허탈해졌습니다. 저는 소녀들이 처한 상황에 슬퍼하고 분개하기만 했을 뿐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한 것입니다. 처음으로 다 쓴 글을 버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정말 장한 결심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쓴 글은 처음 쓴 것보다 확실히 나아져 있었으니까요. 좀더 이성을 찾은 것이지요. 물론 끝끝내 버리지 못한 감정 덩어리는 아직도 고스란히 작품 속에 남아 있습니다. 덜어 내고 또 덜어 냈는데도 말이지요. 그래서 이 작품은 불안정한 면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주홍이가 꿋꿋하게 살아 나가는 결말을 바라는 독자들이 많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기대를 저버려 죄송합니다. 주홍이를 살리고 싶었는데, 너무너무 붙잡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주홍이는 맨발로 터벅터벅 가 버렸습니다. 그 점이 못내 가슴 아픕니다. 저와 가까운 분들께 작품을 보여 드렸더니 왜 하필 쥐를 상징물로 사용했느냐고 많이들 물으시더군요. 독자 여러분도 궁금해 하실 것 같아 살짝 공개합니다. 처음 쓴 글을 버려야 겠다고 마음먹은 날이었습니다. 뜨겁게 불태우던 의욕이 한 줌 재로 돌아갔음을 인정하기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순간순간이 괴롭고 나 자신이 그렇게 못나게 느껴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잠에 탐닉했습니다. 열일곱 시간을 내리 잤던 것 같습니다. 그 기나긴 꿈 속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해서 저를 위로해 주었지요. 그런데 난데없이 쥐가 나타나 평화롭던 꿈 속마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어요. 저 쥐를 어떻게 잡을까 궁리하다가 깼습니다. 곱씹을수록 이상한 꿈이었습니다. 마치 제 무의식이 저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았어요. “어리광은 그만 피워! 다시 쓰면 되잖아.”라고 말이지요. 저는 꿈에서 얻은 『쥐를 잡자』라는 제목으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낙태 전후 몸과 마음의 변화는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분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 분의 낙태 경험을 들으며 뼛속이 시려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분께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이 말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죽은 아기들은 천사가 되었을 거라고. 그러니 부디 잠을 푹 주무시라고요. 부모님과 수많은 나의 선생님들, 그리고 기댈 곳이 없어 홀로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습니다.
2007년 5월 꼭꼭 숨고 싶은 날에 임태희
<미래의 작가상> 부분 심사 소감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고1 여학생의 낙태와 자살을 통해 우리 청소년들의 성문제와 그에 따른 현실을 그린 청소년소설 『쥐를 잡자』는 쥐가 주는 상징성이나 호기심이 긴장감을 유발시키며 끝까지 읽게 만드는 작품이다. 고1 여학생과 담임교사, 엄마가 번갈아 화자가 되어 들려 주는 이야기는 강렬하고 흡인력이 있으며 성에 대해서 여전히 취약한 우리 청소년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다만 세 사람의 화자가 똑같은 강박증을 갖고 똑같이 강렬한 톤으로 이야기한다는 점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이 아쉬웠다. 그러나 인생에 대한 유연함과 성숙함은 세월이 가르쳐 주는 것이고, 신인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패기와 끈기라는 점, 무엇보다 우리에게 부족한 청소년소설에 많은 장점과 가능성을 가진 신인이라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정했다. -제4회 <푸른문학상> 심사 소감 중에서 (강숙인, 동화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