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본질은 느림이다: 쓰지 신이치 교수의 슬로 라이프 선언서이자
21세기 문화인류학의 ‘출발서’
문화인류학자인 메이지가쿠잉대학의 쓰지 신이치 교수가 90년대 일본에서 시작한 슬로 라이프 운동을 종합한 하나의 선언문이자 ‘슬로(slow)를 키워드로 한 최초의 책이다. 문화의 본질은 작고 느린 것이다. 무한성장 신화를 숭배하고 있는 현대인의 위기는 바로 이러한 문화의 작음과 느림의 상실에서 나왔다. 그런 만큼 이 책은 성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생태적이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고민으로 내놓은 한 문화인류학자의 21세기 문화인류학의 ‘출발서’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후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나갈 길이 없는데도 들어오게만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가르쳐주지 않는 불친절한 ‘입문서’가 아닌 세상으로 나가는 출구가 어디인지를 묻고자 하는 책이다. 저자는 책 속에서 반복하고 강조한다. 속도를 줄여라! 그리고 뺄셈을 배워라!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의 방향을 틀어 슬로 이코노미, 슬로 테크놀로지, 슬로 푸드, 슬로 디자인, 슬로 보디, 슬로 러브를 상상하라! 자기 부정과 자기 증오라는 저주로 가득 찬 현대사회에 우리 자신을 지키는 주문이자 처방전, 그것이 바로『슬로 이즈 뷰티풀』이다.
‘슬로’와 ‘뷰티풀’의 의미
쓰지 교수는 ‘느리다’와 ‘천천히’로 해석되는 ‘슬로’라는 단어에 ‘생태적(ecologigical)’, ‘지속가능한(sustainable)’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절망만을 안겨주는 속도사회에 맞서 느리게 사는 삶의 가치와 그 속에 담긴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의 슬로 라이프 선언은 현대인의 상식과는 다른 방향에서의 경제, 과학, 식생활, 예술, 신체 그리고 사랑의 방법 등 전 분야에 걸쳐 상상하는 삶으로서의 자유라는 화두를 던져주고자 한다. 슬로 이코노미, 슬로 테크놀로지, 슬로 푸드, 슬로 디자인, 슬로 보디, 슬로 러브 등이 그것이다.
미국 흑인들이 외친 “블랙 이즈 뷰티풀”에서 따온 ‘뷰티풀’이란 단어 또한 쓰지 교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지도 자랑하지도 않고 그대로 보듬어 안는”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보고자 한다. 그는 우리 자신이 전통적 삶의 방식과 자연관, 인간관 등을 하루아침에 낡고 뒤쳐진 것으로 치부하여 폐기해버리고, 그 잔해 위에 ‘풍요로운 사회’라는 괴물을 낳아 놓았으며, 그로 인해 우리 시대는 자기 부정과 자기 증오라는 저주에 가득 차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그 저항의 주문으로서 저자는 “슬로잉 다운slowing down”, 속도를 늦추라고 반복해 강조한다.
인생은 시간이 걸리는 것,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미국의 여성 인구학자인 도넬라 메도우즈는 ‘나무늘보클럽’ 홈페이지에 실린 글에서 환경운동가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아직 언급하지 않은 것 한 가지로 ‘슬로잉 다운’을 들고 있다. 산다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먹고 배설하고 자고 아이들과 놀고 사랑하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러나 지금 자연과 인간은 산업사회가 휘두르는 시간의 채찍에 내몰려 이전의 생태계 흐름 속에서 천천히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고 수인과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움직이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 그러는 사이 ‘멈추는 것’에 대한 가치를 잊어가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멈추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배워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좀 더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문화의 본질은 느림이다!
사람의 키에 어울리는 속도와 페이스가 있듯 문화에도 그 크기와 속도에 어울리는 규모와 페이스가 있다.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적정한 박자의 완급이 있고, 사람의 신체적인 모습에도 그리고 사회적인 모습에도 그것에 어울리는 시간의 흐름이 있다. 전통사회에서의 기술은 크기와 속도와 힘의 한도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균형을 잡고 조절하고 정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란 바로 이러한 조절과 정화와 힘을 우리가 사는 사회에 가져다주는 메커니즘에 다름 아니다.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불문율, 도덕, 의례, 신화, 연장자들의 정겨운 옛날이야기 등이 그것이다. 자연환경의 위기란 어라한 사회 안에 작동하고 있는 문화적 매커니즘의 파괴, 즉 문화의 작음과 느림의 상실에서 기인한다. 문화를 성장시키고 풍성하게 했던 그 느림이 없어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이대로 방치하고만 있을 것인가. 전통사회에서 생활기술의 역사는 몇 백 년에 걸쳐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천천히 갈고 닦아 만들어졌다. 이 느림이 바로 문화의 본질이다. 이제부터는 덧셈식 발전이 아닌 뺄셈식 발전을 해야 한다. 작가 생 텍쥐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완벽함이란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아무 것도 더 없앨 것이 없는 상태이다.”
슬로 라이프로서의 의식주, 그리고 일과 사랑
슬로 푸드: 먹거리 자체는 생명체다. 따라서 먹는다는 행위는 생명체를 그대로 몸 안으로 삼키는 것이다. 지금 땅과 아무 관련없이 슈퍼마켓 진열장과 식당메뉴 그리고 가정의 냉장고와 식탁 위에 쌓여있는 음식물은 실제로는 침입자들에 불과하다. 진정한 먹거리는 우리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이제 ‘먹는 일’이 위기에 처했다. 패스트 라이프라는 광기에서 우리 자신을 구할 방법은 슬로 푸드 식탁을 차리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을 즐길 권리를 찾아야 한다. 유전자 조작식품인 ‘프랑켄 푸드(괴물 음식)’는 빨리 쑥쑥 자라나는 아이, 기저귀도 빨리 떼고, 걸음도 빨리 걷기 시작하고, 필요한 지식을 재빨리 몸에 익혀 빨리 어른이 되는 ‘프랑켄 키드(괴물 아이)’를 키워낸다. 슬로 푸드는 이러한 우리 현재를 돌아보게 하고 변화될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이러한 미래먹거리의 핵심은 잡곡이다. 잡곡을 재발견하자.
슬로 홈: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동화가 있다. 돼지 삼형제가 각각 지은 지푸라기 집, 나무 집, 벽돌 집 중에서 가장 튼튼한 벽돌 집을 지은 막내 돼지가 제일 현명했다는 엉터리 같은 이야기이다. 서구인들은 식민지 땅에서 이런 우화를 남발하며 그들 문명의 우월함을 고취시키고 원주민 문화를 농락해왔다. 여기에서 벽돌을 콘크리트로 바꾸어 생각하면 고스란히 20세기 후반의 개발 이데올로기가 된다. 지금도 유치원에서 이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연극으로 만들어 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서 오랜 세월 동안 대지에 의해 길러지고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슬로 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가정은 그곳에 사는 사람을 위한 장소인 반면 건물로서의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보다 가구나 그 외의 여러 가지 편의용품을 늘어놓기 위한 공간일 뿐이다. 건축물로서의 집이 아닌 따뜻한 가정으로서의 집의 대표는 짚으로 만든 흙집이다.
슬로 비즈니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지치지 않고 살아가고자 한다. 따라서 피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이다. 그러나 피로는 언제나 우리의 이웃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버틀런드 러셀은 “현대인들은 무슨 일이든 어떤 목적을 위해서만 하고, 일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는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삶의 보람이란 생산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로부터 나온다. ‘쓸데없는 것’이야말로 ‘알찬 것’이다. 헛된 것은 악이고 쓸데없이 보낸 시간은 나쁜 시간이라는 사고는 모든 것의 가치를 과정이 아닌 목적에 두는 근대적 사고가 만들어낸 직선적인 질서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귀한 피로에 몸을 맡겨라. 빈둥거리는 즐거움을 스스로에게 허락하자. 그렇게 할 때 좋은 일과 좋아하는 일이 하나로 합쳐지는 슬로 비즈니스가 가능해진다.
슬로 보디: 우리는 자주 ‘나의 몸’이라고 말하지만 진짜 나의 것인지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들이 타인의 시선, 거울, 사진 등의 영상을 수없이 만들어내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간접적으로 보며 쾌감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타인으로부터 격리시키고 싶다는 욕망은 타인과의 접촉을 꺼린다. 80년대 이후 결벽증이나 청결증후군 또한 현대인들이 타자로부터 격리되고 싶다는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우리 몸은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다. 패닉 보디가 된 것이다. 옛날의 느슨함과 허술함 그리고 그 빈 틈새를 다시 한 번 회복하여 다른 사람의 몸과 접촉하면서 기분 좋음을 느낄 수 있는 ‘슬로 보디’를 찾아야 한다. 신체가 갖는 유한성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신체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다른 이에게 전달할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자기뿐이라면 우리 모두는 너무나 외로워진다. 정상인들이 뼈 빠지도록 열심히 노력해서 이룩한 자립이란 것은 결국 자립이 아니라 고립이다. 느린 사랑으로서의 치유, 그것이 슬로 러브가 필요한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