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구 flypaper@yes24.com
영화에 있어서 대사는 가능한 절제되는 편이 영상의 적극적인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이른바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대사에 안배되기보다는 영상의 교차편집에 의해 머리 속에 각인되는 편이 좀 더 영화적이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그런 이유로 영화란 가능한 3인칭 시점으로 이끌어 가야지 나레이션이 깊숙이 개입되는 시도는 관객을 수동적인 대상으로 이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확실하게 뒤바꾼 스타일이 홍콩 영화의 몽롱하면서도 다소 두서 없어 보이는 나레이션의 총공세이다. 자다 깬 젊은이들의 주변치기 대화처럼 뜬금없이 진행되다가도 결코 유치해 보이지 않는 사념의 아포리즘에 맞장구를 치며 좋아했던 기억. 1인칭 시점 나레이션의 나열이 이렇게도 관객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이끌 수 있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집인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는 「지진의 뒤에」라는 타이틀로 일본 『신쵸』지에 연재된 작품들을 중심으로 엮은 단편 소설집이다. '1995년 2월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일관된 테마로, 각각의 단편을 유기적으로 엮어 연출한 이른바 '컨셉트 앨범'인 셈이다.
그 '컨셉트'의 핵을 이루는 것은 1995년 1월의 '고베 대지진'과 그 두 달 후인 3월에 일어난 '옴진리교 사린 사건'이다. 후자인 옴진리교 사린 사건이 하루키의 전작 『언더 그라운드』에서 여과 없이 다뤄진 경험이 있다면, 전자인 '고베 대지진' 역시 이미 작품집 『렉싱턴의 유령』과 『하루키의 여행법』에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는 고베(작가의 고향이기도 하다)에서 행해진 작가 낭독회에 쓰인 작품을 수정해 수록한 위령곡인 셈이고, 『하루키의 여행법』 에서는 좀 더 적극적인 방식 즉, 고베를 단독으로 도보 여행 하면서 느낀 지진의 상념을 기록한 글 「고베까지 걷다」를 수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추측이 가능하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옴진리교 사린 사건'의 희생자를 인터뷰 해 그 생생한 리얼리티를 전달했던 작가가 『하루키의 여행법』을 거쳐 신작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에서 본격적으로 '고베 대지진'을 다루기로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 말이다. 하지만 추측은 추측일 뿐, 한 인간에게 자연과 인간이 안겨준 거대한 피해는 단순히 물리적인 기간과 성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작가는 두 사건이 결코 별개의 것으로 위치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물리적인 동시에 심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 두 사건 사이를 잇는 통로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음을 시사한다.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하루키가 시도한 방식이 그의 전작에서는 일례를 찾아보기 힘든 3인칭 시점으로의 전환이다. 홍콩 영화의 나레이션처럼 1인칭 화자로서 자신이 직접 개입하는 방식에 익숙해 있던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장면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작가가 이렇게 자신과 화자와의 거리감을 부러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루키가 1997년 5월에 니시미야에서 고베까지 혼자서 걸었던 기행 에세이 「고베까지 걷다」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9월 XX일. 내 출판 기념회 때문에 오랜만에 고향인 가야와 고베에 다녀왔다. 지진의 재앙을 입은 이래 처음으로 방문했다. 8개월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방에 남아 있는 자연의 깊은 상흔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막으려 해도 막을 길이 없는 천재지변이라고는 해도, 그런 광경을 직접 목격하니, '왜 하필이면 이런 일이 여기서 또 일어나야만 했을까' 하고 깊이 생각하게 된다."
옴진리교 사린 사건과 같은 인재야 비참한 재앙을 극복할 수 있는 내면적 반성과 사유를 제공할 꺼리가 있다 치더라도,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처럼 전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한순간에 불현듯 찾아와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고 마는 재앙의 참담함이 가져다 주는 또 다른 무력감은 어쩔 것인가. 인재와는 다른 허탈함 그 자체인 것이다. 아픔에 1인칭으로 개입하기보다는 관찰자의 시점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3인칭 시점으로의 전환을 꾀한 이유인 듯 하다.
돌연한 재앙,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게 된 사람들의 충격과 아픔, 그로 인한 일종의 결락감을 경험한 사람들을 앞세워,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불러온 고통이 각각의 내면 인자에게 어떻게 상처입고, 극복되어지는지, 나아가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위해 가져다 줄 수 있는 희망의 모습을 찾는다. 또한 1인칭 시점의 친숙함을 버린 대신 3인칭 내러티브의 효과적인 활용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 그리고 섹스에 관한 경이로우면서도 엄숙한 삽화를 구사하며, 매우 뜻깊은 주제를 무겁지만 자유로운 코드로 풀어놓는다.
너무도 애달프고 벅찬 슬픔을 담고 있는 책. 유년시절의 즐거웠던 기억들이 산산이 흩뿌려진 채, 소리도 없이 사려져 버리는 듯한 허한 슬픔을 형상화시킨 작품. 지진이라는 모티프가 직접적으로 주제로서 자리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주제, 3인칭 시점으로의 전환만큼이나 지진 그 자체의 참혹한 파괴상을 효과적으로 에둘러 기술한 놀라운 심리 묘사의 집결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