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의 의뢰인들은 반복적인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에 현혹되어 자격 조건도 안 되면서 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그러다가 경제의 거품이 빠지고 부도덕한 채권은행들이 가차 없이 담보권을 행사함에 따라 다시 한 번 피해를 보게 되었다. 한때는 자긍심이 넘쳤던 대다수의 주택 보유자들이 간소화된 캘리포니아의 압류 규정하에서 회생의 기회를 거의 얻지 못했다. 은행이 누군가의 집을 빼앗는 데에 판사의 승인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위대한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경제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고, 계속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동산 위기가 극에 달해 경기가 바닥을 치면 그때부터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할 거라고 주장했다. 페나 부인이 들으면 기가 막힐 이야기였다. --- p.16~17
정확히는 세 군데였다. 부검 보고서에 나온 사진에는 피해자의 정수리에 하나의 선이 그려져 있었다. 정수리에 가격 지점이 세 군데 있었는데 세 개 모두가 찻잔에 덮일 만큼 매우 촘촘히 붙어 있었다.
이 그림을 보자 흥분되었다. 나는 부검대상 시신의 신체 치수를 설명해놓은 맨 앞 페이지로 돌아갔다. 미첼 본듀란트는 키 185센티미터에 몸무게는 81킬로그램이었다. 리사 트래멀의 신체 치수를 알 수 없어서 나는 그날 오전에 시스코가 리사에게 마련해준 휴대전화기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리사, 미키 할럽니다. 빨리 하나만 묻겠는데 키가 몇이죠?”
“160이요.”
나는 전화를 끊고 리사 트래멀의 신장을 테이블 위에 놓인 리걸패드에 적었다. 그 옆에는 본듀란트의 신장을 적었다. 흥분되는 사실은 피살자 본듀란트는 살인 피의자보다 키가 25센티미터나 더 컸는데 정수리를 가격당해 두개골 골절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른바 물리학의 문제를 제기했다. --- p.89~90
“편지에 그렇게 썼잖아. ‘이 문제에 관해 우리가 합의와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근데요, 그게 왜요?” 애런슨이 물었다.
“행간을 읽어봐. 나는 본듀란트가 거리를 두고 있는 거라고 생각 안 해. 이건 협박편지야. ALOFT의 행동을 원했던 거지. 그래, 이 편지를 보냄으로써 발뺌을 하고 있는 것도 맞아. 하지만 또 다른 메시지가 있어. ALOFT가 행동하지 않으면 오파리지오에게서 뭔가를 뺏을 거라는 거지. 심지어 SAR을 제출하겠다는 위협까지 하고 있잖아.”
“근데 SAR이 도대체 뭐예요?” 애런슨이 물었다.
“의심스러운 활동 보고서(Suspicious Activity Report).” 시스코가 말했다.
“ALOFT가 돈을 얼마나 많이 긁어모으고 있는지 알아?” 내가 물었다.
“우리가 맡은 사건의 3분의 1은 ALOFT와 관련이 있을 거야. 비과학적이긴 하지만, 그걸 전체로 확대해서 생각해보면, LA 카운티에서 일어나는 압류 사건들 중 3분의 1이 ALOFT와 관련이 있다는 뜻이 돼. 그 말은 LA 카운티에서만도 수백만 달러의 수수료를 챙겨간다는 뜻이고. 앞으로 2~3년 후 주택 압류 문제가 일단락될 때까지 캘리포니아 주 한 군데에서만도 1천만 건의 압류 사건이 발생할 거라고들 하지. 게다가 기업 매각 문제도 있고.”
“기업 매각이라뇨?” 애런슨이 되물었다.
“신문 좀 읽지그래. 오파리지오는 ALOFT 매각을 추진 중이야. 르무어라는 대형 투자기금에 팔아치우려고. 르무어는 상장 기업이고 기업인수와 관련해 잡음이 들리면 주가뿐만 아니라 거래 자체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그러니까 본듀란트가 작정을 하면 평지풍파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얘기지.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물의를 일으킬 수도 있었을 거야.” --- p.120~121
두 청년이 내게로 걸어왔다. 항공 점퍼를 입은 청년들이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나는 괜히 모르는 사람들과 시시덕거리고 싶지 않았다.
“어, 아니. 사람 잘못 본 것 같은데.”
“아냐, 당신 맞는데 뭘. TV에서 봤다고.”
나는 포기했다. “그래, 맞아. 소송을 맡았거든. 그것 때문에 TV에 나왔나 보군.”
“그래, 맞아, 맞아……, 근데 당신 이름이 뭐였더라?”
“미키 할러.”
내가 이름을 말하자 말없이 있던 청년이 항공 점퍼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고 어깨를 딱 펴고 섰다. 청년은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장갑을 낄 정도로 춥진 않았는데. 그 순간 나는 2층에는 다른 차가 한 대도 없기 때문에 그들이 2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말 없던 청년이 내 복부를 향해 있는 힘껏 왼 주먹을 날렸다. --- p.141~142
“재판장님, 검찰은 변호인 측에서 나올 것이 분명한 이의 제기와 항의를 막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건 당일 피고인의 집과 차고를 수색하면서 발견해 압수한 피고인의 신발에서 아주 작은 혈흔을 발견해서 분석을 의뢰했었는데요, 그 DNA 분석결과를 어제 오후 늦게 받아보았습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배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어찌나 강한지 갈비뼈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이것이 게임의 판도를 뒤집는 강력한 요인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분석 결과, 신발에서 발견된 혈흔은 피살자인 미첼 본듀란트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실험실 업무가 산적해 있고 작업할 혈흔 샘플이 극소량이어서 혈흔 분석이 늦어졌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더군다나 변호인 측을 위해 혈액 샘플을 약간 떼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분석의 어려움이 더욱 컸습니다.”
나는 펜을 공중으로 툭 던졌다. 펜이 테이블에 맞고 튀어서 탁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정말 기가 막히네요. 배심원단 선정 하루 전날에요? 이런 걸 이제 내민다고요? 오 세상에, 변호인단을 위해 혈흔 샘플을 남겨뒀다니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뛰어나가 내일 배심원단 선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분석해서 돌아와야겠군요. 재판장님, 이건 정말…….”
--- p.21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