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0년 10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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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96쪽 | 956g | 140*210*35mm |
ISBN13 | 9788958623601 |
ISBN10 | 8958623608 |
발행일 | 2010년 10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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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696쪽 | 956g | 140*210*35mm |
ISBN13 | 9788958623601 |
ISBN10 | 8958623608 |
지은이의 말 찾아보기 첫 번째 이야기_ 허공 속으로 난 길 ― 한시의 언어 미학 두 번째 이야기_ 그림과 시 ― 사의전신론(寫意傳神論) 세 번째 이야기_ 언어의 감옥 ― 입상진의론(立象盡意論) 네 번째 이야기_ 보여주는 시, 말하는 시 ― 당시와 송시 다섯 번째 이야기_ 버들을 꺾는 뜻은 ― 한시의 정운미(情韻味) 여섯 번째 이야기_ 즐거운 오독 ― 모호성에 대하여 일곱 번째 이야기_ 사물과 자아의 접속 ― 정경론(情景論) 여덟 번째 이야기_ 일자사(一字師) 이야기_ ― 시안론(詩眼論) 아홉 번째 이야기_ 작시, 즐거운 괴로움 ― 고음론(苦吟論) 열 번째 이야기_ 미워할 수 없는 손님 ― 시마론(詩魔論) 열한 번째 이야기_ 시인과 궁핍 ― 시궁이후공론(詩窮而後工論) 열두 번째 이야기_ 시는 그 사람이다 ― 기상론(氣象論) 열세 번째 이야기_ 씨가 되는 말 ― 시참론(詩讖論) 열네 번째 이야기_ 놀이하는 인간 ― 잡체시의 세계 1 열다섯 번째 이야기_ 실험정신과 퍼즐 풀기 ― 잡체시의 세계 2 열여섯 번째 이야기_ 말장난의 행간 ― 한시의 쌍관의(雙關義) 열일곱 번째 이야기_ 해체의 시학 ― 파격시의 세계 열여덟 번째 이야기_ 바라봄의 시학 ― 관물론(觀物論) 열아홉 번째 이야기_ 깨달음의 바다 ― 선시(禪詩) 스무 번째 이야기_ 산과 물의 깊은 뜻 ― 산수시(山水詩) 스물한 번째 이야기_ 실낙원의 비가(悲歌) ― 유선시(遊仙詩) 스물두 번째 이야기_ 시와 역사 ― 시사(詩史)와 사시(史詩) 스물세 번째 이야기_ 사랑이 어떻더냐 ― 정시(情詩) 스물네 번째 이야기_ 한시와 현대시, 같고도 다르게 ― 상동구이론(尙同求異論) 에필로그 _ 그때의 지금인 옛날 ― 통변론(通變論) |
산책은 가벼운 마음으로 나서는 거다. 일상생활의 스트레스와 긴장을 풀어주고 내 몸에 쉼을 주기 위해 하는 것이다. 신선한 공기와 푸르른 자연환경은 신선함과 자극을 준다. 그럼 책에서의 산책이란 뭘까? 무거운 마음으로 무언가를 꼭 알아내겠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는 것을 산책이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몸으로 하는 산책처럼 부담가지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책읽기. 머리로 무언가를 꼭 얻어야 되겠다는 마음보다는 가슴으로 여유 있게 느끼며 생각하는 책읽기. 그것이 책 읽기에서 산책이라고 생각한다.
‘한시미학산책’ 이란 책도 그런 의미로 접근하고 싶었다. 결코 친하지 않는 한자와의 만남이 부담이 되지만 작가의 친절한 설명은 그런 장애물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도록 길 안내를 잘 해준다. 결코 혼자서는 다가설 수 없을 것 같은 영역을 산책이라는 덜 부담되는 방식을 통해 안내해 준다.
그림은 세상에 보이는 현상을 작가의 눈으로 표현한다. 사실성을 강조한 기법이 유행한 경우도 있지만 사실성에 작가의 표현법이 들어가 추상성이 극대한 되는 기법도 유행한다. 그러기에 단순히 ‘잘 그렸네, 못 그렸네’ 라고 쉽게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시’도 세상을 표현하는 하나의 기법이다. 단지 형상화에서 문자화로 수단의 이동이 있을 뿐이다. 사실성을 강조해 모든 것을 보여주는 시도 있지만 함축성을 강조해 한 단어 한 단어에 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시, 그림 등을 포함한 문학과 예술은 읽는 독자,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다름의 배경에는 다른 성장배경, 지식수준 등이 연결되기 때문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생각하도록 훈련받아 온 나로서는 ‘한시’라는 종목을 접함에 있어서 자연스레 정답을 찾으려는 습성이 나타났다. ‘왜 비 오는 모습을, 그리고 왜 나무가 우거져 있는 모습’ 등을 묘사하는 시를 썼는가? 거기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라는 것처럼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하려고만 했다. 그 시를 지을 당시 작가의 모습, 심정 그리고 나를 그 사람과 동일시해 느낄 감정과 나만의 경험에서 불러올 이미지 등을 놓쳤다. 이런 놓친 부분을 시 안내자인 저자는 짤막한 설명으로 다시 방향을 잡아준다.
시와는 담 쌓고 지낸 나. 그 와중에 처음 접한 한시. 책의 제목처럼 산책하듯 반복해 천천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거칠고 울퉁불퉁한 길도 평탄하고 매끈한 길을 걷는 것처럼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을 다 읽었다. 이 경우에 다 읽었다는 표현은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한시 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저자가 번역해놓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단지 ‘읽었다’는 이유로 책장을 넘긴 게 한두 장이 아니니 말이다. 그저 읽었으니 다 읽었다고 인정해달라는 나 스스로에 대한 투정이나 다름없다.
1월 12일에 읽기 시작하여 21일에 다 읽은 것으로 표시를 했으니 딱 열흘인 셈인데,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오며 가며,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소파에 앉아서, 백화점에서 아내를 기다리며, 아내와 아이들이 모두 잠든 한밤 중에 이렇게 읽어 열흘이다. 뭐랄까. 공을 들인 책을 다 읽었을 때의 대견함이랄까... 그렇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번역이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와 같은 양주동의 번역이 놀랍지 않을 정도이다. 그저 번역한 한시만을 읽더라도 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물론 원래 한시의 공이기도 하지만 번역한 저자의 공이기도 하다.
시의 정신과 한시에 대해서 많은 것을 얘기했지만, 거의 다 읽으면서 딱 한 가지 더 바라고 싶은 것이 생겼다. 중국의 한시와 우리나라의 한시를 비교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한시라는 것이 당연히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흉내만 낸 것은 아닐 것인데, 과연 어떤 점이 다를까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그 다른 점이 저자가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소리 높인 과거-현재-미래에 대한 의미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싶다. 즉, 과거를 온전히 이해하고 현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과연 우리나라의 한시에서 그런 작업은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것이었는지 그게 궁금하다.
바로 앞에서 언급했지만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사실 책 전체에서 저자의 목소리는 뚜렷하다. 시라고 속삭이고 있지만은 않다. 저자의 낮지 않은 목소리는 책을 더 또렷이 읽을 수 있게 하는 장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에필로그에서 더 커진다. 하고픈 얘기라서 그렇다. 혹은 어떤 하소연 같기도 하고, 또는 자신이 하는 학문에 대한 존재 이유를 설파하는 선언 같기도 하다. 이런 것이다.
“옛날은 그 때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훗날의 옛날이다. 현재에 충실하라. 그러면 그것이 훗날의 모범이 된다. 옛것을 맹종치 말라. 그 옛것도 그 때에는 하나의 ‘지금’이었을 뿐이다. 세월은 흘러간다. 오늘의 주인공이 내일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지금’과 ‘여기’가 차곡차곡 쌓여 역사가 된다.” (660쪽)
그리고 또한 이런 것이다.
“한시 연구에서 논문을 쓰자는 것인지 위인전을 쓰고 있는지 분간 안 되는 연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생애나 역사 배경을 죽 늘어놓고, 거기에 작품을 꿰어맞춰 일대기적 구성으로 재배열하거나, 자기가 연구하는 시인이 언제나 최고가 되는 당착은 병폐가 된 지 오래다. 툭하면 현실인식이고, 입만 열면 역사의식을 말한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문학성이 담보되지 않은 의식이란 대자보나 설교와 무엇이 다른가?” (669쪽)
오래 전의 한시를 읽지만, 그건 그저 읽자는 것이 아니고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자는 것이리라.
(2011. 1)
2012년 2월 3일에 읽기 시작한 <한시 미학 산책> 이 책을 오늘 2013년 10월 21일에 다 읽었다. 기간만 두고 보면 무려 1년 8개월이 넘게 걸렸으니 꽤 오랫동안이다. 책이 참 재미있는데 왜 이리 오래 걸렸을까. 우선 이 책을 직장의 옷장 속에 두고 읽었던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교대근무를 하면서 야간근무일 때에만,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만 야금야금 읽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책에 나온 한자로 된 좋은 문구들을 따라서 써보며 읽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나오는 멋진 한시와 마음에 드는 단어 등등 내 맘 내키는대로 필사를 하다보면 -물론 고작 한 번씩 써보는 것일 뿐이고, 그 글자를 다시 혼자 쓰라면 쓰지 못할 글자들이 많았고, 그저 음을 속으로 읽으면서 저자가 번역한 것을 새기는 정도니 필사라는 말이 사실 어울리지는 않는다- 30분 정도의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세 번째, 이 책을 읽는 기간이 지난해 천자문을 쓰던 시기와 한 해 동안 겹쳤었다. 그러고보니 야간근무시간을 꽤 알차게 보낸 것 같아 흐뭇하다.
내 마음속에는 오래전부터 한시라면 이 책 119쪽에도 나와있는 정지상의 送人이다. 특히 뒷부분의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는 늘 생각할 때마다 아!하며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한시의 다양한 매력에 빠져들었고 한국과 중국의 시인들이 한자라는 매개체를 얼마나 아름답게 사용했는지 보았다. 때로 한자이기에 가능한 장난과 표현을 만들었을 만큼 우리 글자가 아니지만 글자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또 그 글자에 얽매이지 않으며 나아가 글자를 벗어나는 시를 읽으며 이야~!하는 감탄이 절로 났다.
“당시가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취향이라면, 송시는 고전적이고 이성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고개 끄덕이며 읽었고, “난간에 기댄다는 뜻의 ‘등루’, ‘의루’,….등의 표현 속에는 ‘그리움’의 의미가 담긴다”는 것도 알게되었고, “같은 어휘가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며 책장을 넘겼다.
아, 중요한 소득이 하나 더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같은 기간에 천자문을 각 글자마다 11번씩 따라써서 그런지, 내 생애 최초의 7언절구를 썼다. 어버이날을 맞아 아버지를 생각하며 썼던 것 같다. 물론 제대로 한시와 한자를 아는 사람들이 보면 코웃음을 칠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한시를 내가 직접 짓다니, 이건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한자가 그만큼 친근해졌다고 할까. 영어로 된 글을 오래 읽거나 미드를 보다보면 문득 혼자 영어로 중얼거리게 될 때가 있는데, 내 생애 최초의-이자 최후의- 한시를 지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는 곳곳에 내용과 어울리는 좋은 그림과 글씨들이 실려있어 참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춰놓았을까 감탄하며 보게된다. 저자는 유려한 번역으로 한시가 자기 향기를 갖게 하고, 현대시와 비교하며 한시를 설명하여 이해의 폭을 넓게 만들었다. 책의 만듦새도 마음에 든다. 딱맞는 디자인과 제본이 오랫동안 이 책을 이러저리 보았는데도 훼손되지 않도록 했다. 게다가 내가 발견한 오자가 딱 2개(66족과 187쪽)인데 66쪽은 글씨크기 오류니 꽤 많은 쪽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불편한 게 비교적 적어 더 좋았다. 뒷장을 보니 초판을 1996년에 내고 이번 개정판을 낸 게 2010년이니 그동안 계속 고쳐낼 만큼 학자로서 완벽을 기하려는 자세가 이 멋진 책을 만들었고 내게도 오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