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이 아닌데 바닥의 담요와 나무문이 어떻게 이만큼 많을 수 있어요? 천국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부자이고 행복하대요.”
고모부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미국은 아주 멋진 곳이야. 하지만 천국은 아니란다.”
나는 눈을 내리깐다. 내 입술도 처진다.
고모부가 내 얼굴을 유심히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무릎 위에서 나를 흔들면서 손가락 하나를 치켜든다.
“미국은 천국만큼이나 좋은 곳이야. 그러니까 천국에서 딱 한 걸음 떨어진 곳이지.”
나는 그 말이 맘에 안 든다. 천국에서 한 걸음 떨어진 곳? 나는 엉금엉금 고모부 무릎에서 내려와 똑바로 선다. 그러고는 자신 있게 큰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가 천국이 아니라면 난 집에 돌아갈래. 할머니가 기다린단 말이야.”--- p.38
때로 아만다는 내가 도통 모르는 말을 하곤 한다. 어제 그 애가 말하길, 부모님이랑 사과를 따러 가서 도넛과 뜨거운 사이다를 먹었다고 했다.
“난 사이다가 좋아. 너도 그러니?”
머리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했지만 난 사실 사이다가 뭔지 몰랐다. 아만다는 내가 준호가 죽었다는 거짓말을 하자 사탕을 주었을 때부터 줄곧 내 가장 친한 친구다. 그렇다고 뭐든지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며 사전에 나오는 사이다에 관한 설명을 떠올려본다. 사과를 짜낸 주스. 사이다와 사과 주스는 어떻게 다르지? 발효는 뭘까? 사전이 항상 모든 걸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가기(going)’ 같은 말이 그렇다. 4학년 학기가 시작된 뒤로 우리 반의 아만다와 몇몇 여자애들은 종종 ‘지미란 남자애와 가는 것(going with Jimmy)’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 애는 누구랑 가고 싶어 할까?”
아이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나는 이해하는 척하지만, 사전에서 알 수 있는 건 ‘가기’가 행동, 움직임, 사업상의 거래와 같은 많은 다른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뿐이다. 그중 어떤 것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대체 지미가 누구랑 어딜 간다는 거지?(go with는 ‘~와 사귀다’라는 뜻의 숙어:옮긴이) (본문 81-82쪽)
“만날 말대꾸나 하고, 이게 아주 제멋대로야! 그 미국 계집애랑 너무 오래 붙어 다녀서 그래. 다시는 그 애 만나지 마. 너한테 안 좋은 영향만 미치니까.”
아만다를 만나지 말라고? 하나뿐인 친구를? 내 말을 들어주고, 착한 한국인 딸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친구를? 아만다를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 화가 나서, 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다.
“너도 미국 애들처럼 돼가고 있잖아. 그 계집애는 하나도 도움이 안 돼.”
“안 그래요.”
나는 조용히 대든다.
“아만다는 안 그래요.”
철썩.
욱신거리는 두 뺨에 카펫이 서늘하면서도 부드럽게 와 닿는다. 나는 실 가닥들을 움켜쥔다.
“일어서지 마.”
아빠가 나를 내려다보며 소리친다.
“다시 한국인다워지는 법을 깨닫기 전까지는 일어서지 마.”--- pp.173-174
나는 수화기를 들고 귀에 갖다 댄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속삭인다.
“제발, 도와주세요.”
“무슨 일인지 말씀해주세요.”
“아빠가 엄마를 죽이려고 해요.”
“라 마데라 가 1872번지 맞죠?”
그 여자가 우리 집 주소를 어떻게 아는지 어리둥절하지만, 다른 말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예.”
수화기를 귓가에 바싹 대고 대답하는 순간, 또다시 쨍그렁 소리가 공기를 가른다.
“제발, 제발, 서둘러주세요.”
나는 다시 속삭인다.--- pp.220-221
우리의 손톱과, 손마디, 손바닥을 힐끗 훑어보기만 해도, 엄마의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준호와 나 모두 엄마를 닮아 손가락이 가늘지만, 혹독한 육체노동으로 딱딱하고 누렇게 못이 박혀 있지는 않다. 우리의 손은 책장을 넘기거나, 연필과 펜을 쥐거나, 손가락 끝으로 키보드를 누르는 데만 쓸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손은 부드럽고 보들보들하다. 엄마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엄마의 손을 꼭 감싸 쥐고 함께 산책을 하다 보면, 우리가 어렸을 적에 느꼈던 엄마의 손힘이 세월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는 엄마의 손을 오므려 잡은 다음, 하나 둘 엄마의 손가락들을 펴준다. 그러면 엄마의 손금들이 하늘을 향해 스스로 이야기한다. 이것들은 세월과 삶의 역사가 남긴 자취라고.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손금들과 숱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얻은 손금들을 분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분간할 수 있다.
--- pp.24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