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딸애는 공부를 지나치게 많이 했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배우다가 배울 필요가 없는 것, 배우지 말아야 할 것까지 배워 버린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세계를 거부하는 법. 세계와 불화하는 법.” --- p.32
“이 애들은 유식하고 세련된 깡패일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는 주먹을 쓰는 대신 주먹보다 강한 걸 쓰는 방법을 가르쳐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뺏긴 줄도 모르고, 당한 줄도 모르고,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나 같은 피해자가 나오는 거겠지.” --- p.46
“네가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이미 많이 들었다. 무슨 말을 또 얼마나 해서 가슴에 대못을 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권리가 있다. 힘들게 키운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단 말이다.” --- p.66
“그리고 아프게 깨달았다. 이대로 딸애를 계속 당기기만 하면 결국 이 팽팽하고 위태로운 끈이 끊어지고 말겠구나. 이대로 딸을 잃고 말겠구나. 그러나 그게 이해를 뜻하는 건 아니다. 동의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쥐고 있던 끈을 느슨하게 푼 것뿐이다. 딸애가 조금 더 멀리까지 움직일 수 있도록 양보한 것뿐이다. 기대를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또 무언가를 버리고 계속 버리면서 물러선 것뿐이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딸애는 정말 모르는 걸까. 모른 척하는 걸까. 모르고 싶은 걸까.” --- p.68
“엄마, 여기 봐. 이걸 보라고. 이 말들이 바로 나야. 성소수자, 동성애자, 레즈비언. 여기 이 말들이 바로 나라고. 이게 그냥 나야.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른다고, 그래서 가족이고 일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이게 내 잘못이야? 내 잘못이냐고.” --- p.107
“손발이 묶인 채 어디로 보내질지도 모르고 누워 있는 저 여자가 왜 나로 여겨지는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런 너무나도 분명한 예감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기댈 데도 의지할 데도 없는 게 저 여자의 탓일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나는 이제 딸애에게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단념해 버린 걸까. 어쩌면 나도, 딸애도 저 여자처럼 길고 긴 삶의 끝에 처박히다시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벌을 받게 될까.”
외동딸을 둔 엄마인 ‘나’는 딸이 살던 집에서 쫓겨 날 처지에 처하자 딸에게 자기 집으로 들어올 것을 제안하고, 딸은 자신의 동성 연인과 함께 엄마 집으로 들어온다. 한 집에서 딸의 연인과 마주하는 것도 모자라 딸은 동성애 문제로 대학에서 해고된 동료들을 위해 시위에 나서고, 급기야 함께 시위하는 사람들마저 집을 드나든다. ‘나’는 많이 배우고 똑똑한 딸이 거리에서 시위하며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인생을 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분노와 미움은 딸의 연인을 향한다. 한편 노인요양병원에서 치매 환자를 돌보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는 ‘나’는 담당 환자인 젠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병원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성심껏 젠을 돌본다. 하지만 요양소는 가족도 없고 의식도 불분명한 젠을 저렴한 병원으로 옮겨 이익을 남길 생각뿐이다. 집에서도 일터에서도 ‘나’는 입장을 요구받고, ‘나’의 고민은 깊어져만 가는데......
『딸에 대하여』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와 그녀의 딸, 그리고 딸의 동성 연인에 관한 이야기다. 퀴어가 어떻고 페미니즘이 어떻고 담론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사이 이 소설은 담론을 가로지른다. 대학의 지식 노동자로 살지만 제대로 생존하기 어려운 딸을 지켜보는 엄마의 시선은 칠레 출신의 작가 이사벨 아옌데가 딸에게 쓴 편지 『파울라』에서처럼 자연스럽고 솔직하다. 한밤중에 다들 두려움에 떨며 숲을 가로지를까 말까 논의하는 사이 혼자 도주해 숲을 건넌 한 어린아이의 이미지처럼, 『딸에 대하여』는 대단히 앞서가는 소설이고 대담한 작품이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죄인 것처럼 생각하는 엄마도,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그린과 레인도 다들 여성이고, 우리가 지금껏 기다려온 소설도 이런 여성들의 서사가 아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