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크리스마스의 흥분이 가신 뒤에 나는 소중한 성경책을 침대 옆 책상 위에 두고 그 날 밤부터 날마다 성경 읽기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지속해 오고 있다. 지금 계산해 보니 약 60년쯤 되었다. 그 날 크리스마스 이후 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성경을 읽거나 연구하지 않은 날은 거의 없다. 아마도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대략 스무 번 내지 스물다섯 번 정도 읽은 것 같다. 사복음서, 사도행전, 창세기는 훨씬 더 많이 읽었다. 내가 성경을 너무나 사랑했고 또 꼼꼼하게 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나 종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잔혹한 구절들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성경책 여기저기에서 혼란스럽고 혐오스러우며 불쾌한 부분들을 마주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성경의 어두운 부분을 내가 처음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스물네 살에 성공회 신부로 서품되었고 마흔 네 살에 주교로 선출되었다. 나는 신부 서품은 선생님의 역할로, 교회는 교육센터로 간주하고 신부로서의 직책을 신학교 교수 개념으로 수행한 사람이다. 내가 수십 년 간 주일마다 회중에게 가르친 책이 성경이다. 교구센터에서는 남부 지방과 전국에서 최초로 성경에 대한 회의를 인도하기도 했으며, 교구에서는 성인반 성경공부를 창설하여 주일예배 전에 한 시간씩 가르쳤다. 주일날 성경공부에서 가르친 내용은 거의 신학대학 수준의 것이었으며, 나는 우리 교구 신도들이 내가 배운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 성경공부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해 다른 무엇보다도 더 철저히 준비를 했다. 만약 나의 교구 신도들이 내가 제공하는 샘으로부터 물을 마시기 싫다면 그들은 주변의 다른 교회를 선택하면 되었다. 나는 학생들의 종교적 수준에 맞춰 진리를 둘러막음으로써 강의를 손질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목표는 그들이 학자적 통찰력에 도전하도록 하고 시대에 맞는 성경적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나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 편견을 뒷받침하고 폭력을 은폐시키는 데 사용됐는지 알고 있다. 또한 나는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종교적 상징의 부정적 측면을 보지 못하는 희한한 능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세상의 인간적 갈등에는 항상 종교적 요인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웬만한 분들이면 다 아는 이야기다. 점차로 나는 내가 신부와 주교로서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답기를 요구하며 참여한 모든 투쟁이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역사를 통해 사용되어 온 방식에 대한 투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경건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핍박하거나, 종교적으로 힘있는 사람들이 남에게 가하는 억압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 것이 바로 성경이었다. 성경을 가장 자주 인용하는 사람들이 지극히 당연한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성경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성경이 사용되는 방법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방어적일 뿐 정직한 답이 아니었다. 나는 성경 자체가 적(敵)이라고 느껴지는 부분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반복적으로 성경이 자신의 말로 성경 자체를 저주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 후에도 미국의 유명한 TV 부흥목사들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그리고 그들의 주요 희생양인 동성애자들에 대해 또 다른 형태의 종교적 독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성경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따금 성경은 분명히 악하며, 그 내용은 가공스럽다. 이런 성찰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이것은 성경을 자기 파괴성에서 구출하고, 교회로 하여금 그 동안 “성경”의 인용을 통해 정당화시켜 왔던 자신의 소름끼치는 역사를 직시하도록 만드는 개혁운동으로 연결되었다.
--- 본문 중에서
오사마 빈 라덴이 2001년에 비행기 납치와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자폭을 지시하면서 신(神)을 거론하지 않았던가?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사람들에게 폭탄과 미사일을 퍼부으면서 거론한 것도 역시 하나님 아니었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허리에 다이너마이트 띠를 두르고 이스라엘의 만원 버스나 대중식당에서 자폭하면서 외친 것도 역시 다름 아닌 하나님이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웨스트 뱅크나 가자 지구에 탱크를 보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행한 테러에 대해 정당하고 적절한 복수를 한다는 미명 아래 적의 은신처라고 생각되는 집들을 파괴해 버릴 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렸다.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도들이 30년 간 지속된 종교전쟁에서 하나님 이름으로 서로를 죽였으며, 1588년에는 스페인 무적함대가 바티칸을 위해 개신교 국가인 영국을 치려다 전멸하기도 했다.
종교적 해악은 매우 민감한 부분을 주시해 보면 더욱 복잡하고 파괴적으로 나타난다. 즉 오늘날 신부들이, 보호해 주기를 바라며 그들에게 맡겨진 어린아이들을 학대하거나 폭행할 때에도 예의 하나님을 들먹인다. 교회는 신도들에게 신부들을 영적인 아버지로서 존경하라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이런 폭거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신뢰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은 더욱 악화되어 신분이 높은 주교, 대주교, 추기경들도 피해자보다는 폭력적 범죄와 그 가해자들, 나아가서는 그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역시 하나님을 동원했다.
교황과 캔터베리 대주교를 포함한 세계적 종교 지도자들은 동성애자들이 그렇게 태어난 “죄”(sin)로 인해 지속적으로 핍박받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기독교인들의 동성애자 혐오를 정당화시켜 주면서 또한 하나님을 거론한다. 두 사람 모두 진리보다는 교회의 일체성을 더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에는 별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 본문 중에서
이런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면, 성경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전통적 주장은 잘해야 문제투성이고, 못하면 우스개소리 밖에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 교회에서의 예배의식도 어느 정도까지는 성경에 대한 이런 주장에 의존하여 왔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잘못됐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예배의식 자체도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와 그 문자적인 역사성을 전제하고 이에 계속 근거한다면 기독교의 앞날은 별로 밝지 않다. 성경에 대한 이런 분명한 진실을 복음주의 개신교나 보수 가톨릭 같은 우익 교회(right- wing churches)가 신경질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정말로 희망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이런 교회에 권위와 확신을 갈망하는 수천 명의 신자들이 모여드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제대로 다루지 못한 교회의 내부적 질병의 또 다른 증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학자들에 대한 우익 교회의 지속적인 공격은 그들이 현실을 인정하기 싫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의 메시지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고전적이고 아직도 널리 쓰이는 방법으로 그 메시지를 전달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
유대인의 부족 이야기로 시작된 이 성경 서사시는 한때 인간을 차별하던 경계선 앞에서 거듭 정지하곤 했다. 궁극적으로 그 경계선은 하나의 인간 공동체가 가시화되기까지 걸림돌이 되었고, 하나님의 무제한적 사랑은 성과 인종, 성적 성향과 종교 등 경계선을 긋는 성향으로 인해 농락당했다. 그렇다. 우리는 아직도 인간 사회에서 부족, 인종, 성 및 종교의 장벽들을 본다. 세계 평화에 역행하는 살인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 더러는 기독교인들이고 더러는 유대인들이며 더러는 무슬림들이고 더러는 힌두교인들이고 불교인들이다. 그들은 모두 역사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우상 곧 부족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부족신 숭배가 역사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을 악한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비록 그런 부족신 숭배가 사라지는 데 따라 공포가 생겨나며, 증오심과 살해가 늘어난다 할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인간성에 대한 비전은 아직도 등장하고 있는 중이며, 그것은 부정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는 예수로 하여금 병이 치유될 때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10:9)고 선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말하기를,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있다. 즉 그것은 우리들 각자 안에 있다고 했다(17:21).
이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경험(a God experience)이다. 이 때문에 예수는 죽음이나 무덤이 삼킬 수 없는 생명이라고 선포되었고, 또한 종교의 형태를 포함하여 과거의 모든 형태 밖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한 생명이라고 선포된 것이다. 이 때문에 예수의 이야기가 유대 서사시에 접목되었고, 그 서사시가 민족사에서부터 인류의 보편적 이야기로 전환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영적 인간(Homo spiritus)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인간성이 등장하고 있다. 예수는 그 새로운 인간성의 첫 열매인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전해 주는 성경은 그가 누구이고 또한 그가 무슨 일과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해 진실하고(시공에 묶인 이야기가 할 수 없는), 보편적 이야기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이 때문에 성경은 결코 또 다시 어떤 사람의 인간성을 모독하고 손상시키고 억압하고 노예화하고 또는 폄하하는 데 이용될 수 없다. 이 때문에 교회는 더 이상 권력과 권위, 그리고 (가장 잠복되어 있는 유혹인) 내적인 일치를 추구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고, 그 대신 이 세계를 변혁하고 우리의 차이점들을 조화시키며, 장벽 없는 인간성을 선포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가 하잘 것 없는 분열들, 지나친 주장들 및 권력의 상징들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다른 종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전적으로 바칠 의지가 없는 한, 우리는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예수의 기도문으로 기도드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