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진짜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냐?”
“그래, 어제 영만 선배 보니까 정신이 확 들더라.”
“방법이 있긴 한데, 해볼래?”
명훈의 말에 홍 대리는 눈이 번쩍 떠졌다.
“정말? 그게 뭔데?”
“독서.”
홍 대리는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인생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에게 주는 해답이 독서라니,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말이다. 그러나 명훈이 장난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아니 장난으로 독서를 입에 올기기엔 명훈은 책을 너무 사랑했다.
“네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독서에 달려 있다면 어떻게 할래?”
“독서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
“평생 텔레비전 보면 인생이 바뀔 것 같냐?”
“아니.”
“평생 인터넷 게임에 몰두하면 인생이 바뀔 것 같냐?”
“아니.”
“그럼 책을 읽는다 해도 니 인생이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냐?”
홍 대리는 선뜻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테이블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회사로 이직할까?”
“그럴 능력은 있냐?”
“없지.”
“오라는 데는 있냐?”
“없지.”
“그럼 계속 다녀야겠네.”
이번엔 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명훈이 이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치만 책을 읽는다고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뭘 읽어야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독서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거냐?”
“인생을 변화시키는 조건이 아닌 필수니까.”
명훈은 조금 전과 똑같이 명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 p.24
“오빠……, 지금 뭐 하는……거야?”
“응? 책 정리 하잖냐. 오빠가 이제부터 책 좀 읽으면서 살려고.”
“왜 현관문이 열려 있니? 누가 왔어? 진영아, 진수야.”
시장에 갔던 어머니가 문을 닫으며 이름을 불렀다. 진영은 홍 대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숨이 넘어갈 듯 큰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 이리 좀 와봐. 오빠가 미쳤어!”
“뭐라고? 진수가 어떻게 됐다고?”
다급한 진영의 부름에 장바구니를 내팽개치고 달려온 어머니는 방안의 책꽂이와 쌓인 책들을 바라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니를 보던 홍 대리는 자신이 되레 놀라서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크게 떠진 어머니의 눈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이게, 무슨, 진, 진수야, 너 왜 그러니. 무슨 일 있니?”
“아이 참, 책 좀 읽으려고 그런다니까요. 진영이랑 엄마야말로 왜 그래?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진영은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는 어머니의 등을 슬며시 떠밀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는 방문을 닫으며 이렇게 말했다.
“놀랄 일이 아니라 무서운 일이지.”
닫힌 방문 사이로 어머니와 진영이의 대화가 들렸다.
“진영아, 도대체 진수가 왜 저런 대니? 내 아들이 갑자기 왜 저런 대니? 응?”
“몰라. 책 읽는다잖아.”
“책을 읽는다고? 진수가?”
“그래. 오빠가 책을 읽는대. 엄마, 나 오빠가 갑자기 무서워. 이렇게 무서운 일이 우리 집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어. 아빠 사업이 망한 것보다 오빠가 콧노래 부르며 책 정리하는 모습이 더 무서워.”
어머니와 진영은 홍 대리가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한바탕 이런 저런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회사에서 잘린 걸까?”
어머니는 홍 대리의 닫힌 방문을 보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진영은 쯧쯧 혀를 차며 현관에 떨어진 장바구니를 집을 뿐이었다.
“냅둬. 저러다 말겠지. 오빠가 꾸준히 책을 읽으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진영과 어머니가 이런 대화를 나누든 말든 홍 대리는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마저 정리했다. --- p.68
“전 원래 책을 잘 안 읽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도 만화책이나 좀 읽었을 뿐이죠. 대학에 가서도 독서나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단 적응을 못 해서 중퇴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마음의 고통이 심하던 어느 날 도서관에 갔던 게 계기라면 계기랄까. 압도적으로 많은 도서관 책들을 보니까 너무 근사해서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운명적인 꿈을 꾸게 된 거죠. 그렇다고 대단한 건 아니고요. 사실은 작가가 되고 싶었던 거창한 이유보다는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책을 읽었던 이유가 더 커요. 적어도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계속해서 지후가 들려준 독서 스토리는 홍 대리가 예상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나 깜짝 놀랄 정도의 이야기임엔 틀림없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제 꿈을 주변에선 모두 비웃었어요.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절 지지하는 사람이 없었죠. 오직 책에서만 ‘넌 할 수 있다’는 말을 해줬어요. 그래서 용기를 받을 수 있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어요. 그렇게 스무 살 때부터 평일 하루 한 권은 기본이고 어떨 땐 하루에 서너 권씩 읽기도 했어요.”
“하루에 서너 권을요?”
“처절하게,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였죠.”
지후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살아남기 위해 책을 읽어야 했던 그 절박함과 마음의 고통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홍 대리로선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 ‘독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본격적인 독서를 하기 시작한 건 스물여덟 살 때부터예요. 그 때가 초등학교 교사 2년차였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내가 빈민가에서 살고 있더라고요. 집에 빚도 있었는데 원금만 4억 정도 되고.”
홍 대리는 지후의 과거가 자신과도 비슷하게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 남 일 같지가 않았다.
“너무 이상했어요. 7년이 넘도록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는데, 분명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사회의 패배자가 되어서 이러고 있는지. 그때까지 해왔던 독서방법에 철저하게 의문을 품고 고민하기 시작했죠. 그 후 완전히 다른 독서를 시작했어요. 마음의 고통을 잊고, 힘을 얻기 위한 독서에서 인생을 바꾸기 위한 독서를 하게 된 거죠. 잘 살펴보니까 제가 하루에 밥은 꼬박꼬박 세 끼를 먹으면서 책은 세 권을 못 읽고 있더라고요, 또 하루에 잠은 네 시간 이상 자면서 책은 네 권도 못 읽고. 책 읽는 시간이 많아야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 이건 아니다 싶었죠. 교사로 계속 일하면서도 평일에 책을 끼고 사는 것은 물론 공휴일이나 주말에는 하루에 열 권 정도 읽었어요. 완전히 독서에 미친 사람이었죠.”
--- p.1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