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경계가 아니라 공간이 아닐까요? 경계는 오직 하나의 선이어서 바로 눈앞에 두고도 넘어갈 수 없게 하는 장벽, (투명한) 차단막입니다. 따라서 경계는 관계의 균열입니다. 하지만 관계 사이의 공간은 공명을 가능하게 하죠. 공간은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때로는 물리적인) 영역이고, 그것은 사생활의 존중이라는 방식으로, 또는 정서적 여유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적, 또는 특수한 환경으로서 공간의 제공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나는 이해를 돕기 위해 몇 세션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했다. 제니스는 이제 관계는 경계로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사이에는 공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물론 말로는 이해하고 수용한다고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금방 쉽게 체화되지는 않았다. 그녀의 오랜 습관은 쉽게 사라질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떻게 관계의 공간을 마련할 것인가? 평범한 사람 중에도 관계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 서툰 이들이 너무나 많다. --- pp.46~47
‘내담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변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것이 어렵다.’심지어 라캉은 “내담자들은 변화하기 위해 분석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유지할 방법을 찾기 위해 분석가에게 온다.”고까지 말한다. 그저 고통을 계속 지킬 수 있는 방식으로써 분석가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라캉은 계속 말한다. “내담자가 정말 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부터 내담자는 진정한 분석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진정한 결심, 과거로부터 벗어나겠다는 변화의 결심, 이 자체만으로도 많은 것은 해결된다." --- p.103
처음에 나는 그가 상실한 것, 그리고 우리가 애도해야 할 것은 두 다리의 기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애도한 것은 그의 오래된 자신, 변화하지 않으려는 과거의 자신이었다. 잃어버린 다리는 오히려 언제나 마주쳐야 하는 생생한 현실이다. 하지만 안락했던 과거의 삶의 방식은 그의 무의식 깊숙이 결착되어 쉽게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우리는 감정의 씨줄과 날줄을 낱낱이 분석했고, 그 결과 그는 극심한 심리적 고통을 이겨내면서 스스로 직면해야만 애도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벗어야 할 것은 오래된 자신이며, 변하지 않으면 삶은 헛되고 헛된 것임을 알아냈다. --- pp.107~108
그렇다. 분노가 자신을 향할 때 우울이 된다. 우울한 사람은 사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누구에게 분노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납득하지 못한다면 우울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녀의 우울을 해결하기 위해선 분노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연해졌다. 중요한 것은 그 분노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사실은 누구에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도사리고 있는 평생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교활’하게 행위해왔는지 통렬하게 깨닫고 그것을 멈추겠다는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pp.144~145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고통에 숨은 쾌락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순전히 고통만으로 채워졌을 때, 인간은 그것을 단호히 거절한다. 고통스러운 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고통 속에 도사린 작은 쾌락이나 마약 같은 만족이 가끔 단맛을 주기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채영 씨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열망이 또 다른 고통을 가져올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분석가를 통해 그 고통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구원받으려는 그 행위가 고통으로 연결될 것임을 알면서도, 꿈처럼 허망하고 짧은 편안함을 얻기 위해 분석가를 찾아온 것이다. 고통 속에서 찾으려는 그 쾌락이나 만족조차도 사실은 헛되고 헛되고 또 헛된 것임을, 그것은 그저 고통임을 통렬히 깨달을 때, 그 고통스러운 행위의 사슬을 내려놓을 수 있다. --- p.156
분석을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삶의 축을 형성한 경험을 스크린에 상영하듯 의식에 떠올리며 그 영향력을 통렬히 깨닫는 과정을 겪게 된다. 그러한 과정을 통찰이라 불러도 좋고,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해도 좋고, 내적 통합의 증거라고 해도 무방하다.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자신의 삶에 깃들인 어떤 장막들을 걷어내고, 거짓 없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와 방법을 얻게 된다. (중략) 분석가는 어떻게 내담자의 경험 안으로 틈입해 들어가는지, 그것이 어떻게 내담자의 무의식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의 틈에서 분석가는 무엇을 하는지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글을 읽는 분들도 이 미세한 과정에 비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오래된 아픔의 한 부분을 납득하고 그것을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 pp.164~165
미영 씨가 우는 동안, 나는 그녀가 외롭지 않게 울도록 잘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울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존재감이 드러나진 않되 존재함은 느낄 수 있도록, 단 한 번도 눈길을 떼지 않고 그녀를 지켜보았다.--- pp.187
‘외로움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로부터도 말 걸어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때문에 발생한다.’--- p.204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중략) 그러나 자신의 일부만이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어중간한 외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외로움은 대체로 어정쩡하다. 절절히 외롭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드러운 말과 어루만지는 대화와 수용되는 느낌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받을 수도 있다. (중략) 이제 남은 과제는 말 걸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수용되지 않는 아이는 아니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자신을 스스로 먼저 수용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자기 연민을 벗어버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것이다.--- pp.217~218
무엇을 결정하건 그것은 오롯이 그의 결정이어야 하고 그의 과정이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 통찰도, 깨달음도, 성장도 모두 내담자가 거두어야 할 열매다. 나는 그저 그들을 위해 나 자신을 성찰하고, 나의 경험을 재방문하고, 나의 저항을 깨닫고 돌파할 뿐이다. --- p.259
우리는 대체로 가능하면 고통을 빨리 잘라내고 싶어 한다. 어떤 고통들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삶의 핵심과 관련된 고통일수록 단박에 잘라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 고통을 친구로 삼아야 한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지금의 삶이 불행하다는 반증이다. 고통을 없애려는 노력보다 고통을 받아들이고, 고통을 장악하고, 고통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마음의 품격이 고매한 사람일수록,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안다. 그들은 삶과 고통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인 이들이다.
--- p.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