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거기서 교리와 생활이 일치한 펄펄 살아있는 실제의 사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의 내용이 그대로 자신의 몸과 마음이 되어 그 교리대로 철저하게 산 생생한 삶을 알게 되면 교리에 대한 이해도 심화될 뿐 아니라 본인도 그렇게 살 수 있는 나침반과 동기부여를 동시에 얻는다. 선사들의 삶은 교리와 생활이 일치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된다. --- p.8
영원한 평안과 대자유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진리에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출현했든 출현하지 않았든 늘 존재했던 진리, 석가모니는 그 진리를 보여주었다. 진리에 대한 무지가 무명無明이고, 이 무명에 의해 끝없는 애착인 갈애渴愛가 생겨난다. 무명과 갈애 뒤에는 괴로움과 속박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우리의 마음을 진리에 초점을 맞추어 진리대로 살면 모든 대자유인들이 걸었던 영원한 평안과 자유자재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길로 가는 문은 바로 당신 앞에 언제나 열려 있다. --- p.22
우리의 본래 모습도 이와 같아서 그 어떤 처지나 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비록 가난하더라도 나는 그것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그래서 때가 되면 잘살 수 있다. 성공과 실패, 칭찬과 비난,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나는 구속되어 있지 않고 자유롭다. 나는 벼락에도 멍들지 않는 허공과 같다. --- p.39
눈앞의 삶이 진정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올 때,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산다. 행복이라는 안경도, 불행이라는 안경도 끼지 않고 그냥 맨눈으로 삶을 본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이름에 필요 없는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지금 여기 눈앞의 일에 온전히 몰두한다. 돌아올 대가를 생각하고 몰두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몰두가 될 뿐. 더 행복해지려는 탐욕도 없고, 불행이라는 생각이 드리우는 우울한 그늘도 없다. --- p.87
당나라 때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에게 제자가 물었다.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해탈은 어떠한 구속도 없는 대자유의 경지를 말한다. 석두 선사는 즉시 대답했다. “누가 너를 구속하느냐” 눈이 있는 자는 금방 “아!” 하고 알 것이다. 이 간단한 한마디에 우리는 까마득히 잊고 있던 천금 같은 진실에 눈을 뜬다. 누가, 무엇이 나를 절망에 빠뜨리는가? --- p.101
누군가가 돈과 주택과 자녀양육 문제 등으로 괴로워한다고 하자. 그런 그가 이런 문제가 전혀 없는 지상낙원에 들어갔다. 지긋지긋했던 문제들에서 해방되었으니 얼마간 그는 행복을 만끽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은 바꾸지 않고 몸만 들어가는 한, 그의 어리석음과 탐욕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그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지위와 명예, 남녀 간의 애정관계 등이 새로운 문제로 등장할지 모른다. 마음의 눈은 뜨지 않고 처세술과 테크닉만 찾으려 한다면 괴로움과 갈등의 종식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 p.106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비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다. 가난에 쪼들린다고 하지만 자신보다 덜 가진 사람도 무수히 많다. 그들에 비하면 그는 부자다. 빈부를 나누는 어느 하나의 기준에만 매달리지 않는다면, 그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사실 우리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아니다. 부와 가난, 어디에도 물들어있지 않은 대자유인, 이것이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 p.138
우리는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공부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숫제 공부를 하지 않으려 하고, 돈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면 돈 버는 일을 아예 그만두려고 한다. 그런데 어떤 것에 매달리는 것도 집착이지만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집착이다. 매달림과 거부,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자유로운 것이 중도다. 해야 할 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돈도 성실히 벌어야 한다. --- p.187
남이 알든 모르든, 자신이 의식하든 못 하든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향 싼 종이에는 향내가 배고 생선 싼 종이에는 비린내가 배듯이, 모든 행위는 일어나는 순간과 동시에 당사자에게 그 행위의 영향력을 남긴다. 착한 행위는 또다시 착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영향력과 좋은 과보를 가져오는 영향력을 남기고, 악한 행위는 이후에 다시 악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영향력과 괴로운 과보를 초래하는 영향력을 남긴다. --- p.235
형이 세상을 떠난 뒤로 어머니는 하나 남은 아들에게 온 정성을 다 기울였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옆방에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새벽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다. 예불을 마치고는 아들에 대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데 아무 액난이 없기를 기원하는 내용이었다. 기도 소리에 실려 오는 그 절절한 정성. 아들을 위한다면 당신의 몸은 가루가 되어도 좋다는 심정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거의 매일 그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잠을 깼던 나는 결코 나태하거나 불량한 옆길로 샐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내가 불교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어머니 기도의 영향 때문인지 모른다. --- p.258
오곡도에 들어와 참으로 많은 짐을 지게로 날랐다. 선착장에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따라 수련원까지 사시사철 날랐고 지금도 나르고 있다. 몇 년 전 큰 공사 때 포클레인이 동원되어 짐도 나르고 땅을 파는 것을 보고 그 힘의 대단함을 남다르게 생생하게 느낀 적이 있다. 내가 나르는 짐의 수십 배 되는 양을 기계 한 대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순식간에 싹 해치운 것이다. 과학기술을 개발하는 인간 두뇌의 위대함을 절절히 실감했다. 요즘 나는 화두 또한 과학기술에 못지않은 인류 정신문명의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말한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 곧 ‘화두’를 고안해낸 위대한 선사들의 지혜에 새삼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것도 이렇게 넓으면서 깊이 볼 수 있도록 하는 화두를.
--- p.275